들어가야 할 재료들은 충분히 다양하게 들어가 있는데 결과적으로는 다소 밋밋한 감정을 이끌어낸 작품들로 기억된다. 어쩌면 그가 사회와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방관까지는 아니더라도 소극적이기 때문일까?
2013년 여름 공개된 허정 감독의 <숨바꼭질>은 관객들에게 이전까지와 다른 영화 체험을 선물했다. 아파트나 골목처럼 흔히 마주치고 시간을 보내는 일상의 공간을 끔찍한 폭력의 무대로 탈바꿈시킴으로써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현실적 공포를 제공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개봉 직전까지는 아무도 성공을 장담하지 못했지만 롱런에 ‘생활밀착형 스릴러’라는 신조어까지 등장시키며 크게 환영받은 이 작품은 이후 관객들에게는 유사소재의 기대를, 제작자들에겐 새로운 노다지의 희망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기대는 충족되지 못했다. 비슷한 형태의 기획이 있다는 이야기들은 많이 들려왔지만 정작 완성까지 이른 작품은 거의 없었고 눈에 띄는 성공작도 없었다. 스릴러 장르에 있어 현실에 발을 디딘 영화적 상상이란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님이 다시 한 번 입증된 것이다. 영화 <목격자>의 개봉을 앞두고 여기저기서 자연스럽게 <숨바꼭질>에 대한 기억들이 언급된다. 외형적으로는 충분히 타당성 있는 연결이다.
보험회사 직원인 상훈(이성민 분)은 최근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며 이사한 아파트로 인해 기분이 좋다. 동료들에게 한턱 쏘고 새벽에 귀가한 오늘도 그는 잠든 아내(진경 분)와 어린 딸의 얼굴을 확인한 뒤 맥주 한 캔을 손에 들고 베란다에 서서 고즈넉한 아파트 풍경을 내려다보는 여유에 젖어 있다. 그런데 난데없이 그의 눈에 화단 옆에 쓰러져 누군가의 손에 죽어가는 여자의 모습이 들어온다. 이내 그녀를 공격하던 살인마(곽시양 분)도 이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상훈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학계와 영화에 영향을 미친 실제사건
이 작품 <목격자>의 모티브가 된 ‘키티 제노비스 사건(Murder of Kitty Genovese)’은 꽤나 유명한 사건이다. 1964년 3월 13일 새벽 키티 제노비스라는 28세 여성이 뉴욕시의 자기 집 근처에서 강도를 당한다. 30여분에 달하는 긴 시간 동안 격렬히 저항하며 사투를 벌인 그녀가 세 차례나 공격을 받는 동안 현장 주위에는 38명이나 되는 목격자들이 존재했지만 직접적으로 나서서 도움을 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결국 그녀는 죽음에 이르고 만다.
이 사건 보도에 충격을 받은 사회심리학자 존 달리와 빕 라타네는 연구와 실험을 거듭해 1968년 ‘방관자 효과(傍觀者 效果·Bystander Effect)’라는 결과를 발표했다. 사람들의 이 같은 행동을 이해하는 두 가지 이론으로 다수의 개인들이 주목하고 있는 공통의 이슈임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입장일 것이라고 잘못 인지하거나 반대로 소수의 의견을 다수의 의견으로 잘못 지각하게 된다는 ‘다원적 무지(Pluralistic Ignorance)’ 현상과 상황을 함께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으면 막연히 누군가는 행동할 것이라고 생각해 소극적이 된다는 ‘책임감 분산(Diffusion of Responsibility)’이 제시됐다. 주위에 사람이 많을수록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게 되는 이런 ‘방관자 효과’는 실제사건의 피해자 이름에서 비롯된 ‘제노비스 신드롬’ 또는 ‘구경꾼 효과’로도 불린다.
무난한 범죄스릴러의 재현
일단 소재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대한민국 어디나 빼곡히 들어차 있는 아파트라는 무대나 점점 극악무도해지는 묻지마 범죄, 소통의 단절로 인해 나날이 골이 깊어지는 개인주의까지 영화를 채우고 있는 현실적인 요소들은 동시대의 관객들을 제대로 공략하고 있어 보인다. 또 선의와 안위 사이에서 갈등하는 목격자의 딜레마는 작품을 어떻게 풀어갈지에 대한 기대를 배가시킨다. 그러나 입맛 당기고 먹음직스러워 보였던 재료들에 비해 막상 테이블 위에 올라온 음식은 꽤나 평범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돌이켜보면 감독 조규장의 모든 전작들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사회의 그늘진 구석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생존하는 한 남자의 비루한 행보를 쫓는 장편 데뷔작 <낙타는 말했다>(2009)나 고속열차에서 만난 하룻밤의 인연으로 무미건조하게 굳어버린 인생의 2막을 열게 되는 두 청춘남녀의 티격태격 신경전을 로맨틱 코미디 형식으로 풀어낸 <그날의 분위기>
(2016) 역시 마찬가지였다. 들어가야 할 재료들은 충분히 다양하게 들어가 있는데 결과적으로는 다소 밋밋한 감정을 이끌어낸 작품들로 기억된다. 어쩌면 그가 사회와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방관까지는 아니더라도 소극적이기 때문일까? 어떻든 이제껏 만든 세 편의 영화가 모두 다른 색깔을 지닌 다양한 시도를 성사해낸 감독이었던 만큼 다음에는 어떤 소재의, 어떤 감정의 작품을 들고 올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제노비스 사건, 충격적 현실의 진실과 거짓
얼마 전 ‘스탠퍼드 감옥 실험(Stanford Prison Experiment)’이 거짓이었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이 발표되면서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1971년 진행된 이 실험은 스탠퍼드대학교의 필립 짐바르도 심리학 교수의 지도하에 이루어졌는데, 24명의 대학생에게 임의로 죄수와 교도관 역을 분담시키고 가짜 감옥에 살게 하며 행동 변화를 관찰한 연구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교도관 그룹의 권위의식과 과잉대응이 두드러지기 시작했고, 점차 두 집단의 대립과 갈등이 격해지자 실험은 6일 만에 종료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40여년간 인간의 본성은 원래 악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로 대접받아온 이 연구는 현대심리학의 대표적 실험 중 하나로 다양한 매체를 통해 꾸준히 언급되어 왔었기에 조작의혹의 충격은 클 수밖에 없었다. 이를 바탕으로 최소 세 편 이상의 극영화도 만들어졌었다.
영화 <목격자>에 모티브를 제공한 ‘키티 제노비스 사건’ 역시 이후에 많은 논란을 불러왔다. 사건을 처음 보도한 <뉴욕타임스>가 애초 사실과는 다른 과장·왜곡된 기사를 감정적으로 작성했다는 주장들이 제기된 것이다. 보도에 언급된 38명 중 대부분은 실제 범인의 가해장면을 목격하지 못한 채 쓰러져 있거나 일어서서 걷는 여인의 모습을 봤다고 진술했다. 그래서 단순한 술주정이나 말다툼 정도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신고자도 있었다. 2016년에는 키티 제노비스 사건에 대한 의문과 <뉴욕타임스>의 왜곡보도 가능성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공개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이 작품의 제목 역시 <목격자>(The Witness)였다.
<최원균 무비가이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