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은 이들의 인간적인 풍경

김주연 연극 칼럼니스트
2017.08.01

배삼식 작, 류주연 연출의 연극 <1945>는 해방 직후인 1945년, 만주의 조선인 전재민 구제소를 배경으로 그곳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인간군상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우리에게는 독립과 해방을, 일본에게는 패전을 의미하는 ‘1945’라는 중립적인 숫자를 제목으로 내세운 이 작품에서, 작가는 근·현대 역사의 시작이자 이른바 ‘0년’이라 불리는 이 시기의 풍경을 다양한 등장인물의 삶 속에서 매우 구체적이고도 생동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던 역사와 편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문화내시경]버림받은 이들의 인간적인 풍경

배경은 해방 직후의 만주 장춘(長春)이다. 조국과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조선인 전재민 구제소에 모여 언제일지 모르는 귀환을 기다리고 있다. 이곳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기쁨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이 들끓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당장 내일의 삶도 모르는 데서 오는 불안과 혼란이 공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일단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고향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밥을 짓고 떡을 팔고 막노동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그런 그들 앞에 과거를 알 수 없는 두 여자가 등장한다. 당찬 조선처녀 명숙과 그녀의 벙어리 여동생 미숙이다. 실은 미숙은 벙어리도 조선인도 아닌, 일본인 미즈코다. 일본군 위안소에서 만나 지옥 같은 시절을 함께 보낸 그들은 조선과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매 행세를 하고 있는 중이다. 구제소에서 함께 지내는 동안 명숙 자매와 사람들 사이에는 어느덧 인간적인 정이 싹트는 듯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미숙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잠깐의 따뜻했던 시간은 곧장 끝이 난다. 사람들은 이들 위안부와 자기들 사이에 선명한 선을 긋기 시작한다. 역사와 사회의 중심부로부터 한없이 밀려난 존재들이라 할 수 있는 이 사람들 속에서조차 또 다른 차별과 편견이 존재하는 것이다. 구제소 사람들은 명숙에게 미즈코를 버리고 갈 것을 요구하지만, 명숙은 결코 그녀를 버리지 않겠다고 답한다. 또한 자신들은 결코 더럽지 않다고, 더러운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 자신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문화내시경]버림받은 이들의 인간적인 풍경

[문화내시경]버림받은 이들의 인간적인 풍경

한편 무대 한편에서는 병으로 죽어가는 장씨와 그의 아내 선녀가 이를 지켜보고 있다. 전염병인 장티푸스에 걸린 장씨와 마약쟁이 선녀 역시 전재민 구제소 사람들로부터 내쳐진 지 오래다. 죽어가는 남편을 힘겹게 들쳐업고 떠나는 선녀 곁에 명숙과 미즈코가 다가가 함께 부축한다. 사실 위안소 포주였던 선녀와 위안부 출신 명숙/미즈코는 앙금이 깊은 철천지원수 같은 사이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의 죄를 묻고 책임을 따지기 전에 일단 서로의 고통을 나누고 함께 하려 한다.

그리하여 장티푸스 환자와 포주 출신의 마약쟁이, 그리고 그들을 돕는 조선과 일본의 위안부, 모든 인물 중에서도 가장 버림받은 인물인 이들이 서로에게 의지하여 한 발 한 발 무대 뒤로 걸어 나가는 이 장면은 가장 따뜻하고 인간적인 감동을 자아내면서 그 아래에서 멀찍이 그들을 바라보는 구제소 사람들의 모습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러면서 과연 인간을 더럽고 깨끗하게 나누는 기준은 무엇이며, 옳고 그름의 잣대는 누가 정하는 것인가.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과 함께 나누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객석에 던진다. 7월 30일까지, 명동예술극장.

<김주연 연극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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