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장 박원순… 도시에 갇혀 ‘야성’을 잃고 있는 호랑이

글·사진 원희복 선임기자·이상훈 선임기자
2017.07.25

1997년 대통령선거 직전 대선후보 TV토론이 벌어졌다.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는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70%가 넘었다. 그런데 이 후보의 30여년 법관생활 중 가장 ‘회한의 판결’이 바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에 대한 사형 판결이었다. 이 판사는 5·16 쿠데타 직후 혁명재판소 심판관으로 차출돼 신문사 발행인의 사형 판결에 서명한 것이다.

이회창 후보의 최대 ‘아킬레스건’인 이 <민족일보> 사건을 질문한 사람이 바로 박원순 변호사였다. 기자는 여당 유력후보의 아킬레스건을 정확히 찍어 용기 있게 질문한 이 장면을 오래 기억하고 있다. 당시를 떠올리자 박 시장은 “그때는 총명했다”며 웃었다.

이번 촛불혁명에서 ‘상징’은 바로 광화문광장이다. 그러나 촛불은 광화문광장이 아닌 청계광장에서 시작했다.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는 “두 번째 촛불시위 때부터 서울시가 세종대왕상 아래쪽 집회를 허가했다”면서 “당시 서울시의 이 결정은 촛불혁명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모멘트였다”고 증언했다.

“당시가 생생하다. 덕수궁 대한문 앞은 중구청 관할이고, 그동안 중구청장은 새누리당 출신이어서 옛날 쌍용차 해고노동자 시위를 도울 길이 없었다. 광화문광장은 제 관할이다. 대규모 시민이 안전하게 의사표현을 할 수 있었던 데는 첫째 물대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겨울에 물대포만큼 위력 있는 게 어디 있나.(그는 서울소방본부에 경찰 살수차에 물을 제공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둘째는 계단·환기구 등에서 밀려서 압사사고가 날 우려가 컸다. 휴일에 직원들이 나와 지하철 계단 앞뒤에서 “밀지 마세요”를 외치게 했다. 특히 화장실을 개방하라고 했다. 안전과 화장실 문제가 보장돼 단 한 건의 안전·폭력사고 없는 집회가 됐다. 서울시 공무원의 역할이 컸다.”

[원희복의 인물탐구]서울시장 박원순… 도시에 갇혀 ‘야성’을 잃고 있는 호랑이

광화문광장 사용 허가, 촛불 도화선 역할

사실 이번 촛불혁명에서 박 시장의 역할은 적지 않았다. 2016년 11월 국무회의에 참석해 “대통령과 총리·내각은 총사퇴하라”고 일갈하고, ‘박근혜 탄핵’을 처음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촛불정국에서 박 시장의 이런 용기·혜안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언론의 무관심이었는지, 박 시장 측 메시지 전달의 문제였는지. 사실 이번 인물탐구는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한 것도 있다. 이에 박 시장은 “그것은 혜안이 아니라 상식”이라면서 “예술계 블랙리스트 그것 하나만으로도 외국의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였다면 탄핵감”이라고 말했다.

박 시장은 1956년 3월 26일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다. 1975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했으나 유신체제하의 교정은 싸늘했다. 4월 11일 서울대 김상진이 유신체제의 폭력과 허위와 악을 폭로하며 할복 자살했다. 이 사건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순진한’ 박원순을 시위에 가담케 했고, 그는 결국 제적됐다. 1979년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다시 입학한 그는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잠깐의 검사를 거쳐 1983년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1986년 그는 역사문제연구소를 만들었다. 박 시장은 “그때만 해도 가려져 있던 역사, 숨겨져 있던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았지만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역사에 대해 단순한 관심을 넘어 ‘국회 프락치 사건 진실인가’(<역사비평>·1989년 가을)라는 논문을 직접 쓰기도 했다. 박 시장은 “그 길로 계속 갔으면 현대사의 독보적인 저술가가 됐을 것”이라며 웃었다. 그의 역사에 대한 애정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임시정부기념관 건립을 외면한 정부 대신 그는 서대문 구의회 자리를 선뜻 내줬다.

조영래 변호사 충고로 사회운동에 눈떠

돈을 잘 벌던 박 변호사는 1990년 조영래 변호사가 숨지기 직전 “박 변호사, 돈 버는 것도 좋지만 이제 좀 눈을 돌려보라”는 말에 충격을 받은 후 영국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귀국해 1995년 참여연대를 만들며 시민운동가로 변신했다. 이후 총선시민연대, 아름다운재단, 희망제작소 등을 만들며 시민운동을 이끌었고, 정부와 민간의 ‘거버넌스’(협치)라는 말을 처음 도입했다.

분명 그는 시대를 앞서간 뛰어난 시민운동가였다. 2011년 그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당선됐다. 보수야당은 물론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과도 단일화를 이뤄낸 ‘범야권 대표’였다. 그리고 2014년 연임에 성공했다. 기자가 보기에 그는 역사, 철학(시대적 어젠다), 게다가 1000만 시민을 대표하는 정치력까지 갖췄다. 이는 과거 누구도 갖추지 못한 ‘대권의 3요소’를 모두 갖춘 독보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서울시장 재임 중 재난 컨트롤타워 보강, 청년 일자리 대장정, 신혼부부 임대주택 사업 등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일을 했다. 본인 스스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복지 전달체계의 혁명이고, 도시재생정책도 중앙정부가 가져갈 정도”라고 자신의 업적을 자부하고 있다. 게다가 문 대통령은 “서울시의 검증된 인재를 최대한 활용하겠다”면서 임종석 비서실장, 하승창 사회혁신수석, 김수현 사회수석 등을 데려갔다.

-문 대통령은 지방분권을 연방제 차원으로 하겠다고 했다. 지금 지방분권의 부족한 점은 무엇인가.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중앙집권적 국가다. 지방자치가 실시됐지만 아직도 중앙정부가 사사건건 간섭하고 있다. 마음껏 실험하고 혁신하고 세계적 모델을 만들어 내기에는 재원·제도·입법 권한의 문제가 있다.”

-지방재정의 자주성 논란이 있지만 자치제도는 나무랄 데 없이 선진적 아닌가.

“예컨대 내가 1000만 서울시를 운영하는데 부시장을 몇 명, 국장을 몇 명으로 하고, 어느 부서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자유가 없다. 모스크바에 가보니 공항에 마중 나온 사람 직함이 모스크바의 외교부 장관이다. 코펜하겐이란 그 작은 도시에 장관이 수두룩하다. 또 예산(세금)은 중앙(국세)이 8, 지방(지방세)이 2다. 이 얘기는 중앙정부가 돈을 다 쓰고 있다는 뜻이다.”

-국세와 지방세 비율이 자치권의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영국은 95%가 국세이고, 북유럽은 국세 비율이 90%가 넘는 나라도 많다.

“아니다. …그것은 아마 국세와 지방세 징수의 편의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지. 돈을 주긴 주는데 교부·보조금이라는 형태로 자기 입맛에 따라 준다. 주민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실상을 가장 잘 알고 가장 맞춤형으로 돈을 현실적으로 쓸 수 있다.”

지방분권 얘기만 나오면 항상 등장하는 것이 이것이다. 지방정부는 재정의 자주성을 위해 과감한 국세의 지방세 이전을 요구한다. 하지만 국세와 지방세 비율이 꼭 지방자치의 선진화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박 시장이 지적하는 “4대강 사업에 21조원, 창조경제 실패 등 중앙정부는 하는 일마다 실패가 많다”는 지적도 옳다. 그렇다고 지방정부의 선심성 예산 낭비도 문제다. 결국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는 것은 항상 갈등이고 고민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동남아시아국가연합 특사로 베트남 쩐 다이꽝 주석을 면담하고 있다. / 서울시 제공

박원순 서울시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동남아시아국가연합 특사로 베트남 쩐 다이꽝 주석을 면담하고 있다. / 서울시 제공

-서울시장을 두 번 했는데 여전히 자치권 확대를 요구하는 것을 보면 3선을 하려는 느낌이 든다.

“그건 곧 발표한다고 했고…, 꼭 지방분권만이 아니다. 지방정부도 관료적일 수 있다. 결국은 시민 민주주의로 전환돼야 한다. 시민들이 일상에서 참여하고 논의, 결정,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시민들에게 주권을 돌려주는 일이 중요하고 필요하다.”

-지난 대선 때 중도에 포기하면서 “나다운 면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말했다. 뭘 못 보여줬다는 것인가.

“내가 준비를 안 했다. 밤낮 없이 서울시정만 고민하다 보니. 국가지도자는 품성과 역량과 세력 그런 것을 준비했어야 하는데 그 준비를 못했다. 시대적 이념은 10년 보수정권의 폐해로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미 4년을 엄청 준비했다. 몇 달 해보니 이번 판은 내 판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자치단체장의 행정영역과 대권의 정치영역은 다르다는 것인가.

“다른 게 분명히 있다. 시장을 하면서 서울시라는 감옥 안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그 감옥을 버리면 홀가분하지 않을까.

“버려야 한다. 사실은 서울시가 전국이고 서울시가 세계다. 전 세계 1200개 도시가 가입한 도시협의체 회장, 디지털 시장, 세계적 혁신….”

‘감옥을 버린다’는 얘기에 기자는 귀가 솔깃했다. 3선 도전을 포기하겠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 시장은 다시 도시재생, 소프트웨어 시대, 복지 패러다임, 사람특별시 등 서울시 얘기로 돌아간다. 그리고 일본과 러시아, 싱가포르 등 외국의 도시문제를 한참 얘기한다. 그리고 “이런 걸 주목 안 해서 그렇다”고 언론에 화살을 돌린다.

가만히 박 시장의 말을 듣다 보면 그도 ‘보통의’ 17개 광역단체장 중의 한 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 역사나 국가보안법, 고문과 거버넌스 등 시대적 큰 주제를 제시하고 이끌었던 그가 요즘 너무 ‘작은 주제’에 몰입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역사·철학·정치 등 대권의 3요소를 모두 갖춘 ‘천하의 박원순’이 시장이 되면서 오히려 작아진 느낌이다. 본인은 열심히 일하는데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닐까.

대부분 자치단체장이 ‘돈’(예산)과 ‘자리’(조직)가 없어 일을 못한다고 할 때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도둑이 많은 것이다”라고 일갈했던 경기도의 기초자치단체장이 있다. 그리고 예산을 아껴 ‘기본소득’이라는 선진적 제도를 도입했고, 중앙정부에 맞서 단식도 했다. 박 시장에게 아픈 질문을 던졌다.

-지난 대선 때 이재명 성남시장은 산뜻한 정책과 시원한 발언, 단식투쟁을 통해 높은 지지도를 올렸다. 성남시보다 훨씬 더 많은 예산과 파워를 가진 박 시장은 국민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박 시장은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길게 놓고 보라. 반짝하는 그런 사람과 그런 시대가 있고, 진중하게 가는….”

-너무 모험을 안 하는 것 아닌가.

“서울시를 갖고 어떻게 모험을 하나. 실험은 하지만. 지난번에는 정권교체라고 하는 시대 요구가 있었다. 그때도 박원순을 미워서 (지지) 안 하는 게 아니라, 이번은 문 후보가 하게 해달라는 흐름이 컸다.”

기자가 탐구해본 여러 인물을 직업별로 보면 특징이 있다. 평생 법에 얽매여 산 법조인 출신 정치인은 ‘모험’이나 ‘승부수’에 약하다. 노무현 변호사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승부수를 띄운 것이 큰 요인이 됐다. 문재인 변호사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쌍용차 고공농성장에 오르고, 광화문에서 단식투쟁이라는 승부수를 던졌기 때문 아닐까. 물론 이제는 박근혜 정권 같은 ‘독재’와 맞서는 승부수나 과단성 있는 리더십이 필요 없을 수 있다. 하지만 국민은 단호한 결단의 리더십을 원하기도 한다.

이제는 ‘창조적 정치력’ 보여줄 때

그런 면에서 박 시장은 문 대통령이 이루지 못한 분야를 선점하는 ‘창조적 정치력’를 보여야 한다. 박 시장은 ‘너무 법에 얽매여 있다’는 기자의 지적을 완강히 부인했다. 그는 “취재해 보시면 알텐데 직원들이 (안 된다는 이유로) 법을 들고 나오면 혼난다”면서 “서울시가 개정한 법이 많다”고 항변했다.

박 시장은 “매사에 ‘디테일한 성격’은 직원들에게는 단점”이라고 인정하며 “이 단점을 무마시키기 위해 늘상 지니던 수첩도 버렸다”고 말했다.

그를 보고 있으면 ‘도시에 갇혀 야성을 잃고 있는 호랑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진정 그가 버려야 할 것은 뭔가.

<글·사진 원희복 선임기자·이상훈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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