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정치 시대, 식민지 조선에서 민족의 발견

2017.06.20

1930년대 대중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넘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볼셰비즘과 파시즘이 부딪혔고 포퓰리즘적 수정자본주의가 등장하였다. 식민지·주변부에서는 민족이라는 주체가 저항과 이념의 전선을 형성하였다.

세계 정치가 들썩이고 있다. 의회정치, 정당정치를 집어삼킨 대중정치의 파도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탈정치의 정치는 때로는 극우로, 때로는 극좌로 향한다. 온건이나 중도를 표방하고 나선 지도자들조차 기존 정치와 인연이 옅은 이가 대부분이다. 한국 사회를 들었다 놓은 촛불혁명도 정당정치를 뒤에서 떠민 대중정치에 의해 가능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 대중은 어디서 왔는가. 식민지 조선의 1930년대로 눈을 돌려보자.

대중정치의 기원, 1930년대

지하운동을 벌이던 조선공산당 주류는 1926년 11월에 합법적 정치운동으로의 진출을 주장하는 정우회 선언을 발표한다. 1925년 일본에서 보통선거 법안이 통과되어 혁신정당의 약진 가능성이 점쳐지던 상황이었다. 정우회 선언에는 머지않아 식민지에도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리라는 기대가 깔려 있었다. 한편 1920년대 중반 이광수 등 타협적 민족주의자는 또 하나의 정치운동이라 할 자치론을 설파하였다. 자치론을 경계하던 홍명희·안재홍 등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는 사회주의자와 연대하여 1927년 2월 ‘민족단일당’ 신간회를 창립한다. 신간회는 ‘기회주의를 일절 부인’한다고 내걸어 자치론을 비판했지만, 과연 식민지에서 합법적인 정치가 가능한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은 스스로에게도 남을 수밖에 없었다.

1938년 7월 24일에 일제가 조직한 친일 전향자 단체인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창립 사진. 일제는 식민지 조선인의 합법적 정치공간을 폐쇄했지만 전쟁이 일어나자 ‘내선일체론’ 등으로 조선인의 참전을 적극 독려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조선인들의 권리의식과 정치적 욕구를 자극했다. 일제가 만든 친일 전향자 단체의 적극성조차 견제해야 했다. /위키백과

1938년 7월 24일에 일제가 조직한 친일 전향자 단체인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창립 사진. 일제는 식민지 조선인의 합법적 정치공간을 폐쇄했지만 전쟁이 일어나자 ‘내선일체론’ 등으로 조선인의 참전을 적극 독려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조선인들의 권리의식과 정치적 욕구를 자극했다. 일제가 만든 친일 전향자 단체의 적극성조차 견제해야 했다. /위키백과

1925년 일본 정부는 사회운동에 대한 탄압을 목적으로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였다. 민주주의 확대를 가져와야 할 보통선거는 실은 치안유지법과 이란성 쌍둥이였던 셈이다. 일본과 조선에서 사회운동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이 일었고, 식민지에도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기는커녕 민족운동 역시 치안유지법 적용 대상에 포함되어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1931년 신간회는 해소되었고 정치의 시대는 끝이 났다. 조선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농민 속으로 들어가 격렬한 사회운동을 조직하였고 대부분 체포되었다. 사회운동이 정점을 찍은 1932년 한 해 동안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검찰에 넘겨진 이는 무려 4500명에 달했다. 1930년대 들어 일본에서도 정치인에 대한 극우세력의 테러가 빈발하여 결국 정당내각이 무너지고 거국일치내각이 성립되었다. 정치의 시대가 종언을 고한 셈이다. 1931년 만주 침략을 계기로 일본 사회 전반에 전쟁의 기운이 감돌았다. 1933년에는 일본 사회주의자들의 대량 전향이 발생하였다.

1930년대는 정당정치·의회정치가 크게 흔들린 탈정치의 시대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첫 총력전이었다. 수많은 노동자·농민이 병사로서 전장에 보내졌고, 각성된 채 사회에 복귀한 대중은 의회를 무대로 하는 이른바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만족하지 않았다. 1920년을 전후한 유럽은 혁명의 도가니였다. 많은 혁명이 실패에 그쳤지만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인류 첫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을 남겼다. 1920년대 들어 자본주의 열강이 중심이 된 기존 질서가 복구되는 듯했지만, 1929년 찾아온 대공황은 다시금 자본주의의 운명을 재촉하였다.

탈정치의 대중정치와 민족이라는 주체

한편에서는 정치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빨아들이며 파시즘이 대두하였다. 수세에 빠진 자본주의는 미국의 뉴딜정책과 같은 수정자본주의로 위기를 벗어나고자 했다. 정치는 볼셰비즘, 파시즘, 사회민주주의로 삼분되었고 각 세력의 이합집산은 인민전선과 국민전선의 대립으로 드러났다. 정치의 상궤를 벗어난 ‘전선’ 즉 싸움의 시대가 찾아왔다. 세계적으로 보통선거제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인데, 거의 그와 동시에 탈정치로서의 대중정치가 대두된 것이다. 민주주의의 완성이어야 할 보통선거 실시가 민주주의의 토대를 허무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졌다. 일본에서 보통선거와 치안유지법을 동시에 도입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권력 측의 궁리였던 셈이다.

기존 정치가 외면당한 것은 각성된 대중의 요구를 담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변부로 눈을 돌리면 또 하나 정치적으로 소외된 주체가 있었다. 바로 피식민자이다. 참정권이 없는 식민지의 참상은 본국에서 보통선거가 실시되면서 더욱 두드러졌다. 결국 대중과 피식민자가 탈정치의 주요한 동력이었다. 치안유지법이 맹위를 떨치면서 일본의 사회운동은 사그라졌다. 거국일치체제는 전향한 사회주의자들의 체제내화를 꾀하였다. 조선의 사회운동도 큰 타격을 입었지만 대량 전향은 일어나지 않았다. 식민지 조선에는 민족이라는 넘어서기 힘든 벽이 있었다. 어쩌면 그때까지 사회주의 운동이 내비친 국제주의적 편향을 반성하는 가운데 새롭게 민족이 발견되었다고 보는 게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앞서 말한 대로 치안유지법은 민족운동에도 적용되었다. 본국의 사회운동과 식민지의 민족운동을 대상으로 하는 치안유지법 운용은 그것이 지키고자 하는 정치의 내포와 외연을 잘 드러내 준다.

식민지 조선에서 신간회 이후 합법적인 정치는 불가능하였다. 정치가 사라진 조선의 언론공간을 불 지핀 것은 조선 연구였다. 안재홍·정인보 등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는 조선의 전통과 문화에 대한 연구를 통해 민족이라는 주체를 발견하였다. 여기에 백남운 등 사회주의자가 결합함으로써 일종의 민족통일전선이 형성되었다. 민족통일전선은 파시즘에 반대하는 인민전선의 식민지 버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국민전선의 성격도 지녔다. 예컨대 나치스는 민족사회주의를 내걸었다. 인민전선과 국민전선이 교차하는 민족통일전선은 기존 정치에서 배제된 민족이라는 주체를 옹호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중국 관내에서 벌어진 임시정부를 포함한 민족통일전선운동, 중국 동북지역에서 김일성이 이끈 조국광복회 역시 같은 맥락에서 위치지어질 수 있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형성된 인민도 국민도 아닌 민족이라는 주체는 오늘날까지 남북한의 정치를 깊게 규정하고 있다.

1931년 신간회 해소를 주장하는 책의 표지. 신간회가 부르주아의 이해관계에 경도됐다고 비판하며 무산계급 중심의 사회활동을 주장한다. 1930년대 초반의 급진적 대중운동이 성장해 나타난 면모다.

1931년 신간회 해소를 주장하는 책의 표지. 신간회가 부르주아의 이해관계에 경도됐다고 비판하며 무산계급 중심의 사회활동을 주장한다. 1930년대 초반의 급진적 대중운동이 성장해 나타난 면모다.

식민지 조선에도 정치는 존재했다. 납세액에 따른 제한 선거였지만, 부·군·읍·면 단위로 지방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적어도 지역 차원에서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경계 없이 이권 분배를 둘러싼 정치가 활발하게 작동하여 대중의 혐오를 불러일으켰다. 사회주의자 김명식이 이를 놓고 조선은 이미 ‘비식민지화’되어 ‘부르주아지 민권은 보장’되었다고 분석했을 정도였다. 큰 정치가 미치지 않은 식민지에서는 민족통일전선이라는 저항의 이념이 지배하였고, 이념의 뒤편에서는 이권을 다투는 작은 정치가 횡행하였다.

촛불혁명은 1930년대를 넘어설 것인가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식민지를 포함한 일본제국은 총력전 체제 구축을 서둘렀다. 전시체제라고 하면 동원과 수탈이 먼저 떠오르지만, 효율적인 전쟁 수행을 위하여 사회 전반의 합리적 재편이 추진된 것도 사실이다. 충성스럽고 강인한 병사를 전선에 보내려면 교육, 위생, 복지 등에서의 개혁이 앞서야 했다. 본국의 총력전 체제가 대중의 포섭을 필요로 했다면 식민지 제국 차원에서는 피식민자에 대한 배려가 중요하였다. 총력전 체제는 기존 정치의 사각지대에 빛을 비추는 의도하지 않은 효과를 낳은 셈이다.

식민지 조선의 총력전 체제를 상징하는 슬로건은 내선일체였다. 내선일체는 민족 말살의 위협이었지만 동시에 내선평등을 이룰 기회이기도 했다. 조선인이 내선일체에서 ‘차별로부터의 탈출’을 읽어내고자 한 사실은 일찍이 주목된 바 있다. 예컨대 1938년 실시된 육군 특별지원병 제도로 조선인이 일본군 병사가 될 길이 열렸다.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모병제와 시민권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식민지 조선에서 지원병 제도가 발휘한 효과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내선일체 슬로건은 조선인의 권리의식, 평등의식을 자극했다. 많은 조선인들이 총독부를 향해 내선일체라는 슬로건에 걸맞은 대우를 요구했다. 이른바 내선일체의 정치가 작동한 것이다. 아울러 중일전쟁기에는 앞 시기 조선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조선어, 조선문화를 탐구하는 기운이 높아졌다. 내선일체 슬로건이 오히려 민족의 정체성을 돌아보게 하는 역설적 효과를 낳은 셈이다.

총독부가 전시 동원을 위해 만든 여러 단체에서는 조선인의 정치열이 문제가 되었다. 전향자 단체인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은 조선인 회원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활동에 놀라 조선인 중심의 간사회를 금지시키고 ‘연맹은 결코 정당이 아니’라고 밝혀야 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도 1939년 규약을 개정하여 ‘본 연맹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명문화하였다. 이념의 전선이 체제 내로 포섭된 결과인 이러한 접근전 역시 탈정치 시대 정치가 띨 수 있는 한 가지 모습일 것이다. 일본의 신체제운동이 의회 해산과 대정익찬회 수립으로 귀결된 데서 알 수 있듯이 탈정치는 결국 정치의 소멸로 귀결되고 말았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권리의식을 부추기는 내선일체라는 슬로건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도의조선이나 멸사봉공만이 외쳐지게 되었다.

해방과 더불어 정치도 되살아났다. 해방 공간을 지배한 정치는 1930년대 발견된 민족 주체를 둘러싼 저항과 이념의 대중정치, 바로 탈정치 시대의 정치였다. 1948년 제헌의회 선거는 보통선거로 치러졌지만, 전통적인 의미에서 정당정치·의회정치는 한국에서 죽은 채로 태어난, 즉 사산된 셈이다. 자칫 공허할 수 있는 민족이라는 주체는 4·19, 5·18, 87년 6월, 그리고 촛불혁명을 거치면서 민중의 피와 땀으로 채워졌다.

1930년대 대중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넘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볼셰비즘과 파시즘이 부딪혔고, 포퓰리즘적 수정자본주의가 등장하였다. 식민지·주변부에서는 민족이라는 주체가 저항과 이념의 전선을 형성하였다. 21세기 오늘날 대중은 여전히 거리에 있다. 그리고 기능부전에 빠져 있는 정당정치·의회정치를 넘어 대중은 극좌로 극우로 치닫는다. 대중의 요구를 담아낼 새로운 정치적 틀에 대한 고민은 1930년대 이래 계속되고 있다. 촛불혁명에 이은 개혁정권의 수립이 세계의 민주주의를 구했다고 격찬 받고 있다. 만일 오늘 우리가 민족이라는 주체를 이끌어온 민중의 에너지를 끌어안아 새로운 정치를 구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1930년대 이래 지속된 세계적인 탈정치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 소중한 실천이 될 것이다.

끝으로 ‘탈정치 시대의 정치’는 한국어로 엮인 왕후이의 책 제목이다. ‘포스트 정당정치’에 대한 왕후이의 문제의식에서 많은 시사를 받았음을 밝혀둔다.

<홍종욱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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