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캐릭터교회의 몰락과 보수대연합의 시대

2016.08.16

지난 1990년대에 보수주의 내의 분화된 측면을 지녔던, 그러나 아직은 캐릭터로서만 ‘그 다름’이 표현될 뿐인 몇몇 새로운 대형교회적 신앙은 2000년대의 이분법적 이념의 시대에 다시 보수대연합의 기치 아래 포획되었다.

1990년대 한국개신교 신자들에게 가장 주목받았던 두 교회인 사랑의교회와 온누리교회는 2000년대 이후 신망도가 크게 실추했다. 캐릭터화를 선도했던 두 교회의 이미지 정치 효과는 급락했고, 대중에게는 또 다른 권력화와 비리, 그리고 부조리함의 표상으로 비쳐지기 시작했다.

온누리교회는 1999년 저 유명한 ‘옷로비 사건’과 연루되었다는 언론 보도와 함께 이미지 추락이 시작되었다. 신동아그룹의 재정이 이 교회로 지속적으로 유용되었다는 사실, 나아가 최순영 신동아 전 회장의 비밀장부와 교회 재산이 얽혀 있다는 풍문 등이 연이어 터져나왔다. 미담이 넘쳐났던 교회에 관한 이야기들이 추문으로 재해석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2004년 이라크에서 피랍되어 살해당한 김선일씨 사건이 그 대표적 사례다. 오랫동안 성장지상주의를 제1 원리로 삼아온 한국교회에 있어 교세의 정체가 뚜렷해진 1990년대는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게 되는 출발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즈음에 본격화된 해외선교라는 비전은 국내선교의 위기로 인한 위축감을 자긍심으로 보상받게 하려는 가장 적극적인 돌파구인 셈이었다. 한데 이 무렵 해외선교를 선도했던 교회가 바로 온누리교회다. 1996년부터 시작된 해외선교 프로젝트는 2000년대 초 ‘Acts 29 비전’(28장으로 끝나는〈사도행전>(Acts)의 새 장을 해외선교로 구체화하겠다는 선교 어젠다)으로 체계화되는데, 김선일씨는 바로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현지에서 섭외된 활동가였다. 그는 이라크의 미군 군납업체이면서 일종의 선교 브로커 역할을 하고 있던 가나무역의 팀장이었고, 온누리교회는 이 회사를 거점 삼아 이라크 선교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온누리교회의 Acts 29는 포교를 위해서라면 전쟁마저도 기회로 활용하는 맹목적인 전도 중심주의, 그것에 다름 아니라는 비판을 받았다.

2002년 광화문 사거리에서 열린 미군 궤도차량에 의해 희생된 여중생들을 추모하는 촛불시위 / 박민규 기자

2002년 광화문 사거리에서 열린 미군 궤도차량에 의해 희생된 여중생들을 추모하는 촛불시위 / 박민규 기자

사랑의교회와 온누리교회 신망도 추락
실제로 이슬람 지역에서 악명 높은 국제선교기구 인터콥의 주요 후원자가 바로 온누리교회였다. 몇 년 후 아프간에서 피랍된 분당샘물교회 단기선교팀의 현지 인솔을 맡은 이들도 바로 이 단체 소속 선교사들이었다. 결국 온누리교회의 적극적인 해외선교 프로젝트는 한국개신교의 위신을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실추시키고 말았다.

사랑의교회는 설립자인 옥한음 목사를 이어 2003년 제2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오정현 아래에서 치명적인 이미지 추락을 경험한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장지상주의로 회귀하였다는 비판이 도처에서 제기된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교회 교인인 권력 엘리트들이 교회의 불법과 탈법에 동원되고 있다는 사회적 평판이 폭넓게 회자되었다. 앞의 김선일 사태 때에 온누리교회와 관련된 외교관들이 교회와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사태에 먼저 대처하려 했던 탓에 국가가 빠른 대처를 할 수 없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사랑의교회에 속한 권력 엘리트들도 공공적 직무보다는 사적 단체의 일원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 때의 소망교회 인맥이 특권적 지위를 누렸던 것을 빗댄 ‘고소영’이라는 표현처럼 박근혜 정부 시절의 ‘사미자’라는 표현은 사랑의교회가 이 정권의 핵심 인맥으로 깊이 관여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 최근 전무후무한 대형 법조비리의 중심인물인 홍만표씨도 이 교회의 교인이라는 사실은 사랑의교회가 우리 사회에서 어떤 방식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시사한다.

이렇게 2000년대에 이 두 교회는 천민적 성장지상주의의 화신이라는 굴욕적 평판의 대상이 되었다. 1990년대에 참신해 보였던 그 캐릭터들로 기억하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하여 이 교회들로 모여들었던 많은 주권교인들의 일부는 또 다른 교회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더 많은 이들은 신앙적 문제의식을 유보하고, 이미 거대하게 형성된 인맥과 그것이 일으키는 사회적 자본에 취해가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비단 이 두 교회만의 현상이 아니다. 과거에 성장지상주의적 신앙은 풍요를 신앙의 열매로 갈망하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풍요는 낯선 것이었기에, 자본주의와 신앙 간에는 미묘한 긴장이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에 오면 종교, 특히 개신교는 자본주의에 깊게 매수되어 버렸고, 강남·강동·분당 지역에 집중된 대형교회의 신자들인 중상위계층에서 그 현상은 훨씬 더 두드러졌다.

[김진호의 ‘웰빙-우파와 대형교회’](7) 캐릭터교회의 몰락과 보수대연합의 시대

진보대연합 대 보수대연합으로 이분화
‘2000년대’는 거칠게 요약하면, 사회가 2개의 범주로 이분화된 시대였다. 반면 그 이전 시대까지 한국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개념은 ‘총화’였다.

총화가 권위주의 시대의 가치였다면, 2000년 어간 이후는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1998년 이후 두 번에 걸친 민주정권이 포스트권위주의 시대의 첫 번째 국면을 추동했다. 이때 민주주의는 ‘공화주의적 요소가 결여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사회를 결속시키기보다는 시민 각자의 고조된 권리의식이 사회관계를 규정하는 주요 작동원리가 된 사회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 민주주의는 ‘탈권위주의적’ 혹은 ‘권위주의 해체적’ 성격이 강했다.

한편 이 시대에 결속의 논리를 부여한 것은 공화주의적 가치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였다. 이 시기에 사회는 심하게 양극화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사회적 결속이란 평등과 기회균등을 통한 결속이 아니라 자본을 통한 권위주의적 결속이다. 이 새로운 권력의 원리는 누가 이윤을 창출하는 능력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따른 것이다. 아무튼 2000년 어간 이후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라는 사회 형성의 기조는 ‘자본에 의한 재권위주의적’ 성격이 강했다.

이러한 탈권위주의적 가치를 추구하는 이상과 재권위주의적 가치를 추구하는 이상, 이 2개의 이상이 2000년대 한국 사회를 2개의 범주로 양분시키는 주된 요소였다. 하여 이 시기 한국 사회에서 진보는 탈권위주의 혹은 권위주의 해체적 지향성이 강했고, 보수는 자본친화적인 재권위주의적 성격이 강했다.

2004년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발언을 해 물의를 빚자 조계종 종교평화위원회 위원들이 서울시청을 항의 방문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2004년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발언을 해 물의를 빚자 조계종 종교평화위원회 위원들이 서울시청을 항의 방문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여기서 2000년대 초 격화된 진보-보수의 갈등을 주목해 보자. 당시 진보의 가장 중요한 의제는 권위주의와 친미주의의 청산에 있었다. 진보진영이 이러한 조합을 권위주의 청산의 요소라고 본 것은 남한 사회의 권위주의 세력이 줄곧 미국을 등에 업고 형성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진보진영의 권력 해체적 청산주의에 위협을 느낀 보수도 대대적으로 결속하였는데, 이때 보수의 중심 기조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친미주의였다. 2002년 이후 시청 앞 광장에서 대규모로 벌어진 진보의 반미 촛불집회와 2004년 이후 벌어진 보수의 친미집회는 그러한 첨예화된 진보-보수 갈등의 단면을 보여준다.

민주주의적 사회 통합에 실패하고 신자유주의적 양극화를 심화시킨 두 번에 걸친 민주정부는 2008년 대선에서 재집권에 실패한다. 이로써 포스트권위주의적 대안가치로서 부상했던 민주주의라는 이상은 좌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새로 집권한 정부의 상징적 인물은 민주화운동 투사가 아니라 기업인이었다. 그것도 전형적인 한국적 자본주의의 표상인 토건주의적 전설을 등에 업은 존재였다.

그렇게 이명박 정권이 탄생했다. 그 이면에는 민주정부들이 초래한 양극화를 기업가 정부가 해소시켜줄 것이라는 시민사회적 기대가 깔려 있었다. 하여 새 정권은 토건주의적 기업국가답게 전 국토를 공사판으로 만듦으로써 경제적 성공을 이룩하려 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고, 그것으로 인한 사회적 갈등을 ‘반미=종북’이라는 이념 프레임으로 환원시켜 물타기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뜻밖에도 기업가 정부는 경제지상주의적 합리성을 강화한 것이 아니라 이념지상주의적 보수대연합을 낳았다. 그렇게 대두한 것이 바로 박근혜 정권이라는 극우주의 정부였다.

지난 글에서 우리는 1990년대 이후에 등장한 대형교회들은 대규모의 교회당을 지을 수 있는 여건과 능력이 갖추어진 강남, 강동, 분당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하여 대형교회는 중상위계층이 대대적으로 결집한 사회적 장소가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연재의 두 번째 글에서 대형교회가 보수주의적 장소라고 주장한 것을 주목하자. 즉 대형교회는 강남, 강동, 분당 지역의 중상위계층을 보수주의적으로 결속시킨 장소라는 것이다.

[김진호의 ‘웰빙-우파와 대형교회’](7) 캐릭터교회의 몰락과 보수대연합의 시대

교회들, 장로대통령 만들기에 동참
그런데 2000년 어간 이후 사회가 진보 대 보수라는 이분화된 가치로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고, 진보와 보수가 각기 대연합을 구축하게 되었을 때, 대형교회의 보수주의는 보수의 깃발 아래 결속한 가장 적극적인 사회적 단위가 되었다. 1990년대에 보수주의 내의 분화된 측면을 지녔던, 그러나 아직은 캐릭터로서만 ‘그 다름’이 표현될 뿐인 몇몇 새로운 대형교회적 신앙은 2000년대의 이분법적 이념의 시대에 다시 보수대연합의 기치 아래 포획되었다.

특히 이명박 정부 탄생 무렵 교회는 전무후무한 바이블벨트를 구축하여 장로 대통령 만들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그것은 형식적으로 보면 일종의 기독교국가의 이상이었다. 하지만 내막은 민주정부들이 추구했던 권위주의 세력의 해체라는 청산주의에 대한 대항전선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다. 가령 기독교계 사립학교의 편협한 종교교육이 민주주의와 인권의 잣대에 의해 청산의 대상으로 지목되는 것에 대해 포교의 권리를 보장받음으로써 종국에는 기독교국가를 이룩하겠다는 주장으로 교회를 결속시켰다. 이러한 한국판 바이블벨트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이른바 ‘성시화 캠페인’이다. 1972년 김준곤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총재가 춘천시를 하나님의 거점도시로 봉헌하는 캠페인을 벌였던 것을 2005년에 그가 다시 리바이벌해서, 한국 전역에서 나아가 한인교회가 만들어진 전 세계 각 지역에서 그곳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기 위한 복음운동의 장소로 봉헌하자는 캠페인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각 지역의 기독교 신자인 권력 엘리트들이 그 운동에 앞장서도록 압박을 가했다. 이것은 기독교국가 건설이라는 이상으로 이명박 장로를 지지하는 선거연합을 구축하는 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2013년 박근혜 정부가 집권하게 될 때는 훨씬 미약했지만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등을 축으로 하는 극우주의 기독교 동맹이 구축되었다.

이렇게 2000년대 이념대립의 정세 속에서 한국개신교는 보수대연합의 기치 아래 결속되었고 다른 목소리는 가려졌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전선에서만 그랬다. 문화적·경제적·사회적인 차원에서 대형교회 내부에서는 새로운 보수주의적 실험이 벌어지고 있었다.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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