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김치냉장고는 ‘한국형’ 테크놀로지인가?

2016.05.10

현재의 김치냉장고는 ‘한국의 대표 식품’이라고 인식되었던 김치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던 한국의 여러 과학자들의 노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월남전 당시에는 김치 통조림을 만들어 파월 장병들에게 보냈고, 1990년대에는 자동제어식 김치냉장고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4월에는 대전에 갈 일이 많았다. 평일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대전행 KTX 열차는 하루에도 수십 편 배차돼 있다. 하지만 KTX라고 다 같은 KTX가 아니다. 일부 열차는 ‘KTX-산천(山川)’이라고 따로 표기가 되어 있다. 한국에서 고속철도가 개통된 것은 2004년이었다. 처음에는 프랑스 고속철 TGV에 이용되는 철도 차량을 제작하는 알스톰(Alstom) 사의 완제품을 수입해 운영했다. 이후 도입된 차량은 알스톰과 현대로템의 기술 제휴를 통해 로템에서 조립·생산했다. 그러던 것이 2010년에 한국생산기술연구원과 한국철도기술연구원의 주관 하에 로템과 한국중공업이 개발한 KTX-산천이 운영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차세대 모델인 ‘해무(海霧)’가 시험운영 중이다.

새 테크놀로지 한반도 유입의 과정
토종 물고기 산천어의 유선형을 모티브로 설계했다는 산천은 국내 독자기술로 개발한 ‘한국형’ 고속철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기존의 KTX와 KTX-산천의 차이는 무엇인가? 필자가 직접 경험해본 바에 따르면, 승객 입장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대전까지의 운행시간도 거의 비슷하고, 내부도 눈에 띌 만한 차이를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공기 저항을 받는 열차 앞부분의 디자인은 확연하게 달랐다. 기존의 KTX가 뾰족한 모양이라면 산천은 둥그스름한 형태다. 기술적인 차이를 찾아보니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로 한국형 테크놀로지라고 할 수 있을까? 도대체 한국 실정에 맞는 한국형 테크놀로지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한국형” 테크놀로지, KTX-산천. 외관이 토종 물고기인 산천어를 닮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한국형” 테크놀로지, KTX-산천. 외관이 토종 물고기인 산천어를 닮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이는 고속철도 기술에만 적용되는 질문이 아니다. 그동안 ‘한국 테크노컬처 연대기’ 연재를 통해 살펴보았듯이 우리가 생활하면서 이용하는 대부분의 테크놀로지는 해외 선진국에서 처음 개발돼 특정 시기에 한반도에 도입됐다. 이들은 개항 초기에는 박래품(舶來品)이었고,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의 선진문물, 해방 후에는 서구 선진국들의 앞선 기술이었다. 미국에서 건너온 기술이 많았지만 유럽에서 만들어진 기술도 상당히 있었고, 미국과 유럽의 기술이 일본을 통해 들어오기도 했다. 이렇듯 다종다기한 기술적 지식과 인공물이 다양한 경로를 거쳐 한반도로 유입되었고, 이들은 우리가 경험하고 영위하는 테크노스케이프를 만들어냈다.

1974년 신문에 실린 금성사 냉장고 광고. 냉장고의 보급에 따라 한국인의 식생활 역시 급격하게 달라졌음을 보여 준다.(사진 위)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만든 김치 통조림. 섭씨 85도로 살균했기 때문에 김치찌개 냄새가 강하게 났으나, 아삭한 식감은 살아 있었다고 한다.(사진 아래)

1974년 신문에 실린 금성사 냉장고 광고. 냉장고의 보급에 따라 한국인의 식생활 역시 급격하게 달라졌음을 보여 준다.(사진 위)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만든 김치 통조림. 섭씨 85도로 살균했기 때문에 김치찌개 냄새가 강하게 났으나, 아삭한 식감은 살아 있었다고 한다.(사진 아래)

외국에선 관심 가질 수 없는 김치냉장고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한반도에 유입된 과정을 역사적으로 조망해 보면 대개 이렇다. 처음에는 주로 해외에서 제작한 완제품 형태로 들어온다.(알스톰사에서 만든 KTX를 생각해 보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한국의 기업이 외국과의 기술 제휴를 통해 조립 생산을 시작한다. 이 단계에서 기술 라이선스 계약을 맺는 경우가 많다.(대동공업은 1962년 국산 생산 협약을 맺은 미쓰비시중공업으로부터 경운기 부품을 공급 받았다.) 시간이 지나 기술적 경험이 쌓이면 일부 부품의 국산화를 시도한다. 처음에는 간단하고 주변적인 부품으로 시작해 점차 복잡하고 핵심적인 부품을 국산화하는 것이 당연히 일반적인 과정이다. 100%의 부품을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게 되면 후속 모델 개량에 들어가 성능을 향상시키고 국내 실정에 맞게 변형하는 단계에 들어선다. 분야에 따라 어느 정도의 시차는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새로운 기술은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한국인의 테크노스케이프에 편입됐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된 기술을 ‘한국 기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기술 혁신, 즉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내는 것을 중심으로 본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인을 둘러싸고 있는 테크놀로지의 대부분은 해외에서 처음 개발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산’, ‘한국형’, 또는 ‘독자’ 기술의 의미는 새로운 기술의 혁신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한국형’ 기술은 한반도에 소재한 공장에서 조립했고, 수입부품의 비율을 20% 이하로 사용했고, 한국의 엔지니어들이 설계한 것을 지칭하는 용어로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해 왔다. 이렇듯 테크놀로지의 역사는 혁신의 역사만이 아니라 제작의 역사, 나아가 이용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떠오르는 새로운 의문. 근본적으로 ‘한국형’일 수밖에 없는 테크놀로지는 없는가? 이 질문은 인류의 보편성과 한국인의 특수성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혹시 김치냉장고 같은 기술이 그렇지 않을까? 김치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서 핵심에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권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인이 아니고서야 누가 김치냉장고에 관심을 갖겠는가? 이는 거꾸로 말해 김치냉장고 기술은 해외로부터 도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해외에 전범(典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근본적으로 ‘국내 독자’의 기술로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치냉장고 이전에 냉장고가 있었다. 냉장고가 한국에 도입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의 일인 것으로 보이는데, 일반 가정에는 1960년대까지도 생소한 물건이었다. 1958년 7월 10일 <경향신문>은 가십란을 통해 “냉장고, 냉방장치, 선풍기 등은 말마따나 한국 가정에는 시기상조. 서울에 냉장장치가 있는 곳이 몇 개나 되는지? 수 개의 극장, 국회의사당, 불완전하게나마 반도호텔, 미국대사관 이런 정도인가?”라고 말할 정도로 인위적인 방법으로 온도를 낮추는 기계들이 드물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지만, 당시에는 냉장고가 있어도 저장할 식품이 별로 없었다. 한국인의 식생활은 염장 또는 발효 처리한 식품이 많았고, 육류는 소량 구매하여 바로 먹었으며, 김치는 뒷마당에 김장독을 묻어 보관했기 때문이었다. 최초의 국산 냉장고는 1965년에 출시된 금성사 GR-120 ‘눈표’ 냉장고였다. 이후 1970년대에 냉장고가 보편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한국인의 식생활 역시 급격한 변화의 과정을 겪게 된다.

서울대 식품공학과 전재근 교수가 제일제당 식품연구소와 삼성전자 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제작한 최초의 김치냉장고.(사진 위) 특허 1991-0011141 “김치냉장고의 발효 및 저장기능 제어시스템”에 실린 제어시스템 구체회로도.(사진 아래)

서울대 식품공학과 전재근 교수가 제일제당 식품연구소와 삼성전자 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제작한 최초의 김치냉장고.(사진 위) 특허 1991-0011141 “김치냉장고의 발효 및 저장기능 제어시스템”에 실린 제어시스템 구체회로도.(사진 아래)

김치 전용 냉장고를 만들기 위해서는 김치의 특성에 대한 탐구가 우선 필요하다. 이에 대한 연구는 1950년대부터 여러 기관에서 수행하기 시작했다. 국방부 과학연구소의 기관지인 <과연휘보(科硏彙報)>에는 김치를 비롯한 여러 발효식품에 대한 연구 결과가 실렸다. 1959년에 설립된 원자력연구소에서도 방사선을 이용해 김치의 보존성을 높이고 회충·십이지장충 알을 소독하는 방법을 시도했다. 이 무렵 서울농대 학장이자 국방부 급식자문위원이었던 김호식(金浩植)은 원자력연구소 과제로 ‘김치 통조림 제조에 관한 연구’를 수행했다. 파월 장병들에게 부식으로 김치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는 동료 교수 이춘녕(李春寧), 박사과정 대학원생이었던 전재근(全在根)과 함께 김치의 맛을 유지하면서 세균을 없애는 공정을 개발했다. 이 연구는 근본적인 딜레마를 안고 있었다. 발효식품인 김치의 독특한 풍미는 세균에서 나오는데, 그 세균 때문에 오래 보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서울농대 연구팀은 실험 결과 섭씨 85도에서 25.2분간 살균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만들어진 김치 통조림은 ‘김치찌개’ 맛이 나기는 했지만 식감은 살아있었다고 한다.

김치의 숙성 과정에서 온도제어 시스템
전재근은 이 연구에 참여한 이후 서울농대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미국에 1년 반가량 연구차 머물다가 식품공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1980년대 중반 무렵 그는 김치냉장고를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마침 제일제당 식품연구소로부터 산학연구 과제를 제안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전재근은 1986년부터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이용한 가정용 김치 제조기의 개발’이라는 제목으로 과제를 수행했다. 이 연구에서 그는 김치에 대해 “우리나라의 식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식품학적으로 우수한 식품으로 인정되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는 “한국을 대표하는 식품”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당시 도시화 경향에 따라 많은 한국인들이 아파트에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김장독을 묻는 전통적인 방식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발효식품이라는 김치의 특성상 살균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저장성이 취약하다. 이러한 사회·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김치 전용 냉장고’가 제시됐다.

당시 전재근이 참고할 만한 선행기술이 있었을까? 인류는 역사적으로 여러 발효식품을 먹어 왔지만(맥주, 간장, 요구르트 등), 김치만이 가지는 고유한 특성은 분명했다. 김치냉장고 개발의 핵심은 김치의 숙성과정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김치에 대한 각종 연구 결과 김치의 숙성을 파악할 수 있는 척도는 산도(酸度·pH)였다. 문제는 숙성과정에 있는 김치의 산도를 연속적으로 측정하는 방법이다.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pH 감지장치를 설치하는 것이겠지만, 이는 실용적이지도 경제적이지도 않았다. 전재근은 김치액 내에 기체 발생량으로 산도를 간접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김치냉장고 기술의 핵심은 김치의 숙성과정에서 발생하는 기포를 정량적으로 측정하는 센서의 개발에 있었다. 시간에 따른 기포 발생량의 변화를 측정하면 김치발효곡선을 그릴 수 있고, 이 곡선을 분석하여 온도 제어 알고리듬을 만들면 최적의 김치 발효상태를 자동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전재근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삼성전자는 1989년에 ‘김치냉장고의 발효 및 저장기능 제어시스템’이라는 특허를 출원했다.

하지만 김치냉장고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첫 기업은 기존 가전업체가 아니라 자동차 부품과 에어컨을 생산하던 만도기계였다. 만도기계는 1995년 ‘딤채’라는 상품명으로 김치냉장고 CFR-052E를 출시했다. 출시 첫해에는 반응이 그리 뜨겁지 못했으나 불과 2~3년이 지나자 매년 20만대 이상 팔리기 시작해 김치냉장고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결국 1998년 삼성전자와 만도기계는 김치냉장고 특허권을 둘러싸고 분쟁을 벌이게 되었다. 삼성전자의 입장은 “만도기계의 ‘위니아 딤채’에 채용한 김치 숙성기술이… 삼성전자의 특허를 침해했다”는 것이었다. (<전자신문>, 1998년 5월 27일) 몇 년을 끌던 특허분쟁은 결국 두 회사 사이의 합의로 원만히 조정되면서 사그라졌다. 지금은 김치냉장고의 세세한 기능을 둘러싸고 삼성전자-LG전자-대유위니아의 3파전이 치열한 형국이다.

결국 현재의 김치냉장고는 ‘한국의 대표식품’이라고 인식됐던 김치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던 한국의 여러 과학자들의 노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 월남전 당시에는 김치 통조림을 만들어 파월 장병들에게 보냈고, 1990년대에는 자동제어식 김치냉장고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김치냉장고는 ‘한국형’ 테크놀로지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전재근이 김치 전용 냉장고가 필요한 이유로 아파트로 상징되는 서구식 주거환경으로의 변화를 들었다는 것은 테크놀로지의 역사가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최형섭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과학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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