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거대한 골리앗 클레인, 고공농성의 보루로

2016.04.26

1990년 9월과 10월에 춤패 ‘불림’의 <무노동 무임금 춤판>과 극단 ‘한강’의 <노동자, 골리앗, 크레인>이 공연됐다. 두 작품 모두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을 소재로 했다. 울산 골리앗 크레인이 세상에 던진 질문을 예술이 새로운 감각을 더해 되묻는 작업이었다. 역사는 그렇게 강렬함을 충전받고 더 오래 기억될 수 있게 된다.

1990년 늦봄의 일이다. 울산 현대중공업에서는 공장 점거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100명의 노동자가 82m 높이의 골리앗 크레인에 매달려 절규했다. “우리는 죽을 수 있으나 물러서지 않기로 결의하고 기름통과 산소탱크와 아세틸렌가스통을 품에 안고 있다. 당국이 계속 우리를 천대한다면 이곳에서 모두 죽겠다.”

그해 전·월셋값이 폭등했다. 임금인상은 한 자릿수를 넘지 못했다. 비교적 임금수준이 높다는 대기업 블루칼라 가족의 살림살이가 중학생 자녀의 학비 감당조차 쉽지 않은 형편이었다. 1990년대에도 계속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같은 시기 전국 30대 재벌 일가는 부동산을 3조8000억원어치나 사들이고 있었다. 이들 기업 상당수가 빚으로 연명하는 부실기업이었다. 30대 재벌의 부채총액은 1988년에 나라 예산의 3배에 달하는 58조원을 넘어섰다. 참고로 2016년 30대 기업의 부채총액은 1740조원에 육박한다. 회사는 빚더미를 떠안아야 하고 노동자들의 임금은 쥐꼬리 신세를 못 면하는데, 재벌 일가의 곳간은 우주적인 스케일로 불어났다.

김진숙과 골리앗 크레인 / http://hadream.com(하종강 교수 홈페이지)

김진숙과 골리앗 크레인 / http://hadream.com(하종강 교수 홈페이지)

하늘에 매달려 세상과 싸우는 사람들
197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대형 조선소마다 세계 최대 규모의 골리앗 크레인이 경쟁적으로 설치됐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작업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백무산 시인과 김진숙 지도위원의 증언에 따르면, 1980년대의 조선소는 사흘에 2명꼴로 사람이 죽어 나가는 참담한 일터였다. 사고가 났다 하면 즉사가 대부분이었다. 금융권에서 조 단위의 투자금을 끌어와서 건설된 조선소이지만 의무실은 소독약이나 발라주는 곳에 지나지 않았다. 배 한 척 완성될 때마다 사람을 갈아넣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일해도 노동자들은 가난을 면하기 어려웠다. 이런 현실은 반드시 바뀌어야 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한 변화의 요구는 1988년과 1989년의 128일 파업투쟁과 1990년 울산 현대중공업 투쟁으로 이어졌다.

싸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2009년 1월 용산 남일당 옥상에 설치됐던 망루는 1990년 골리앗 크레인 투쟁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같은 해 7월에 있었던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옥쇄파업에서는 1990년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벌어졌던 무자비한 노동탄압보다 더한 참사가 벌어졌다. 1990년대를 지나 2000년대를 넘어 2010년대가 되었지만, 세상은 갈수록 더 잔인해졌다. 김진숙은 한진중공업 노동자 해고에 항의하며 2011년 1월 5일부터 11월 10일까지 309일간 고공농성을 했다. 스타케미칼 해고자 차광호는 45m 높이의 굴뚝에서 무려 408일 동안 고공농성을 계속했다.

모든 기계는 사회적 관계를 생산하는 장치다. 이 사실의 가장 지난한 증명이 골리앗 크레인이다. 새로운 사회에 아주 조금씩 다가가고 있지만 고통스러운 난산의 과정이 계속되고 있음을 하늘에 매달려 세상과 싸우는 사람들로부터 배운다. 그들은 골리앗 크레인을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선용할 방법을 발명했다. 이 기계는 거대한 물음표가 될 수 있다. 체제와 사람에 대한 물음을 증폭하고, 모든 이들에게 생각을 재촉하는 장치로 쓰일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런 발명과 발견의 순간은 한국 테크노 컬처 연대기에서 매우 소중하다. 노동의 문제를 사유하지 않는 기술론은 공허하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노동을 빼놓고 기술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지배체제의 생산물이다.

그날을 기억해야 한다. 울산 현대중공업 공장 점거투쟁은 1990년 4월 28일 아침 6시에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된다. 이날 경찰은 불도저, 다연발 최루탄 발사차, 헬기, 화학차, 소방차, 구급차, 그리고 73개 중대 1만명의 경찰력을 동원해 진압작전을 시작했다. 작전명은 ‘미포만 작전’이었다. 쇠파이프와 안전 헬멧, 사정거리 120m의 사제 박격포인 ‘민주포’ 6문으로 무장한 정당방위대가 정문 방어벽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막아섰지만 역부족이었다.

1990년 9월과 10월에 춤패 ‘불림’의 <무노동 무임금 춤판>과 극단 ‘한강’의 <노동자, 골리앗, 크레인>이 공연됐다. 두 작품 모두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을 소재로 했다. / 1990년 8월 3일 <한겨레>

1990년 9월과 10월에 춤패 ‘불림’의 <무노동 무임금 춤판>과 극단 ‘한강’의 <노동자, 골리앗, 크레인>이 공연됐다. 두 작품 모두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을 소재로 했다. / 1990년 8월 3일 <한겨레>

경찰은 5개 출입구와 4, 5도크 입구 등 7개 방면에서 최루탄을 쏟아부으며 밀고 들어왔다. 하늘에서는 헬기가 농성을 중단하라는 방송을 했다. 미포만 앞바다로 군함이 들어와 전경이 상륙했다. 7분 만에 1차 저지선이 뚫렸다. 16분 뒤에는 노조 사무실을 뺏겼다. 6시50분에는 4, 5도크가 경찰에 장악됐다. 훗날 용산참사, 쌍용차 평택공장 참사에서도 벌어지게 될 장면이었다.

정부의 무력진압에 노동자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일부는 울분을 못 이기고 투신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경찰은 파업노동자를 보호해야 할 국민이 아니라 간첩 취급하고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정부 정복이나 전쟁이 아니었다.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비참함을 해결해 달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사회적 합의와 해결책을 찾을 능력도 정의도 없는 국가는 폭력과 매도로 국민을 내버렸다.

이것은 공권력이 기계를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2010년대에도 달라진 건 없다. 골리앗 크레인의 정치적 잠재성과 공권력의 야만적인 폭력은 한국 테크노 컬처에서 함께 기억해야 할 역사다. 우리의 일상은 그 양극의 테크놀로지 사이에 붙박인 채 체제에 길듦과 동시에 바깥을 꿈꾸는 일의 반복일 것이다.

공권력의 야만적 폭력 ‘미포만 작전’
4월 28일 경찰 진압이 시작되자 전국 각지에서 울산에 거주하는 친인척의 안부를 묻는 전화가 쇄도했다. 울산전화국은 통화 폭증으로 통신망이 한때 마비됐다.

미포만 작전 이후, 농성은 골리앗 크레인으로 장소를 옮기게 된다. 4월 29일에도 경찰의 진압작전이 이어졌다. 비상대책위의 이갑용 위원장을 비롯한 파업지도부 300여명은 ‘무기한 항전’을 선언했다. 하지만 5월 3일이 되자 골리앗에 비축했던 식량이 바닥나고 말았다. 경찰에 봉쇄된 상태에서 식량 보급이 원활하게 이뤄지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낮에는 쩔쩔 끓고 밤에는 냉기가 되는 무쇠 바닥에서 지내다 보니 환자가 속출했다.

5월 7일부터 골리앗 크레인은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라면, 쌀, 물 등의 보급품은 모두 아래로 내려보냈다. 죽기를 각오한 것이다. 투신사고에 대비해서 경찰은 크레인 아래에 폭 9m·길이 150m 크기의 대형 그물망을 설치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가족들은 속이 타들어 가는 심정이었다. 이 시점에서 경찰은 가족들의 불안과 공포, 그리고 목소리를 진압도구로 활용했다. 대형 확성기가 장착된 픽업 차량을 골리앗 크레인 가까이 대고 심리전을 전개했다. 회사 간부들이 파업노동자들의 가족과 일가친척을 회유해서 설득방송에 동원했다. 협조하지 않으면 아이들 장래에 지장이 생길 거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5월 8일에는 가족들이 식수, 쌀, 과일, 의약품을 전달하려 했지만 회사 측에서 반입을 막았다. 설득방송을 위해 가족들을 동원할 때와 돌변한 태도였다. 이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려는 가족 30여명과 이를 막는 경찰 경비원 100여명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다른 단위의 울산지역 노동자들과 가족들도 현대중공업의 몰상식에 분개했다. 연일 대규모 가두시위가 이어졌다. 5월 3일에만 가두시위 관련 연행자가 730명을 넘어섰다. 전국적 차원의 전노협 총파업도 이어졌다. 5월 10일까지 골리앗 크레인에 남아 싸웠던 사람들은 51명이었다. 고공농성을 해산하면서 노동자들은 동지가와 현중노동조합가를 부르며 땅으로 내려왔다. 더부룩한 수염과 지친 모습이었지만 모두 당당했다.

싸움의 경험은 싸움의 기술을 발전시켰다. 1993년 전면파업에서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강력한 세 과시를 위해 오토바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콧수염과 선글라스를 쓰고 머플러를 뗀 수십 대의 오토바이를 동원해서 청각적 효과를 극대화했다. 전면파업을 하지 않으면서도 그에 필적하는 효과를 낼 방법도 다채롭게 모색됐다. 조선소 안을 움직이는 수백 대의 운반기기를 정지시키는 방법이었다.

골리앗 크레인과 노동자 / 1989년 6월 24일 <한겨레>

골리앗 크레인과 노동자 / 1989년 6월 24일 <한겨레>

‘광장’으로 변한 골리앗 클레인
많은 인원이 대오를 유지하고 농성을 지속하기에 골리앗 크레인이 적합하지 않은 장소라는 당연한 사실도 철저히 분석해볼 수 있게 되었다. 불가피하게 고공농성에 나서게 되더라도 최소 인원의 장기 농성을 위한 보급선 확보가 대단히 중요했다. 그리고 이 싸움은 골리앗 크레인을 강력한 상징적 메시지로 활용하는 방법에서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었다.

1990년 9월과 10월에 춤패 ‘불림’의 <무노동 무임금 춤판>과 극단 ‘한강’의 <노동자, 골리앗, 크레인>이 공연됐다. 두 작품 모두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을 소재로 했다. 전국 순회공연을 위해 과감하게 무대장치를 생략하고 골리앗 크레인과 공권력 투입장면 등을 담은 사진 콜라주 슬라이드가 공연장 바닥과 배경에 비쳤다고 한다. 울산 골리앗 크레인이 세상에 던진 질문을 예술이 새로운 감각을 더해 되묻는 작업이었다. 역사는 그렇게 강렬함을 충전받고 더 오래 기억될 수 있게 된다.

그로부터 20년 뒤, 연극과 춤판보다 훨씬 더 강력한 확산력을 지닌 골리앗 크레인 싸움법이 발명됐다. 김진숙의 309일간의 고공농성이 1990년 투쟁과 결정적으로 달랐던 것은 스마트폰과 SNS였다. 전파가 대기를 가로지르며 수십만, 수백만 명의 마음을 골리앗 크레인에 연결했다. 그러자 골리앗 크레인은 고립된 장소가 아니라 광장으로 변했다. 전파만 오간 것이 아니었다. 희망버스를 타고 사람들이 직접 찾아왔다. 더불어 행복해지기 위해, 내 이웃의 비탄을 함께 아파하기 위해서, 상처 입은 삶을 소생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의로움을 행하는 이가 있음을 확인한 사람들은 큰 용기를 얻었다. 자신도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신념을 갖게 된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 자신이 한때 조선소 노동자였던 백무산 시인은 그 감동을 이렇게 적었다.

노동은 현실에 없다 그래서 머물 곳이 없다
현실의 노동자는 인간이 아니다
노동은 언제나 미래에 있으며
미래의 노동자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그가 보여준 것이다

보라! 그가 미래다
그가 올라간 곳은 크레인이 아니라 미래의 한 지점이다
절망의 늪에서 미래를 끌어올리는 크레인이다

그에게 가야 한다
그에게 가는 길은 인간의 미래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임태훈 인문학협동조합 미디어기획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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