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언어

2016.04.19

[주간여적]정치의 언어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몰각합니다. 그러나 충군애국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길은 관민(官民)이 합심한 연후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1898년 관민공동회의 첫 번째 연사 백정 박성춘은 이렇게 연설을 시작했다. 신분제의 해체를 알리는 이 상징적 장면에서 박성춘은 백정으로 살아가는 서러움을 말하지 않는다. ‘대한의 미래’를 말함으로써 차별 없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도록 한다. 대한제국 시기 정치집회가 한 역할이었다.

총선을 엿새 앞둔 7일, 정의당은 중식이밴드의 노래를 활용한 당의 총선 광고 논란에 대한 공식입장을 발표했다. “여기 사람이 있어. 무너진 건물 당신 발 밑에. 그 아래 난 살아있죠. 부서져 좁은 텅 빈 공간에 날 살려줘요. 제발 살려줘요.”(‘여기 사람 있어요’), “집안도 가난하지 머리도 멍청하지 모아둔 재산도 없지 아기를 낳고 결혼도 하잔 말이지? 학교도 보내잔 말이지? 나는 고졸이고 너는 지방대야”(‘아기를 낳고 싶다니’) 정의당은 “중식이밴드의 노래가 청년의 현실을 호소력 있게 표현하고 있다고 판단했다”며 “청년 문제를 해결하려는 당의 의지를 강조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이 밴드의 노래에는 이런 것도 있다. “잠시 눈을 의심했었어. 내 앞에 니가 나타나니까. (중략) 카메라를 보지 마. 니가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모습 보여주지 마.”(‘야동을 보다가’) 타인의 성관계 영상에서 헤어진 여자친구의 모습을 본 청년의 슬픔과 배신감만 있을 뿐 불법 포르노와 여성의 인권에 대한 문제의식은 보이지 않는다. 정의당은 “성인지적 관점(성 평등 문제를 사회의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는 관점)에서 예기치 않은 문제와 논란을 일으켰다”고 사과했다. 하지만 정의당이 여태 모르는 문제가 있다.

사회적 약자의 아픔이라고 무조건적으로 감싸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흙수저’라는 말에는 불평등에 대한 분노뿐 아니라 ‘출세욕’이나 ‘부러움’도 담겨 있다. 명문대에 진학했지만 좌절한 흙수저 청년들이 세상사가 학벌 순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심리도 담겨 있다. 남성 ‘N포세대’들은 ‘돈 많은 남자만 찾아다니는 여성’을 증오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흙수저’, ‘N포세대’, ‘가난한 청년’이란 말에 담긴 구구절절한 한과 서러움을 중계하는 것에서 그치면 위험하다.

말에 담긴 분노와 슬픔은 읽되 ‘평등’, ‘존엄’, ‘인권’과 같은 가치를 담은 언어가 전면에 나와야 한다. 미국민 99%의 대표자를 자임하는 버니 샌더스도 흑인들에게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을 받고, 미국 최초 여성 대통령을 꿈꾸는 힐러리 클린턴 역시 젊은 여성들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는다. 하물며 ‘비참한 현실’과 ‘한’을 그저 드러내는 것은 정치의 역할이 아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진보정치의 언어가 더 풍성해지기를 바란다. 120년 전 박성춘에게라도 배워야 할 일이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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