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민주 비대위 대표 김종인…전매특허 하나로 5선 신기록에 도전

원희복 선임기자
2016.04.05

흔히 뻔한 3대 거짓말로 노처녀가 ‘시집 가기 싫다’는 말, 노인이 ‘늙으면 죽어야지’ 하는 말, 장사꾼이 ‘밑지고 파는 것’이라는 말을 든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면, 정치인이 ‘금배지 싫다’는 말일 것이다. 인간의 권력욕은 원초적이다. 더구나 한 번 ‘권력의 맛’을 봤던 사람이 그것을 포기하기란 더욱 어렵다.

흔히 국회의원이 좋은 점을 한마디로 ‘책임은 없고 권한만 많아서’라고 말한다. 대학교 총장을 하다가, 검찰총장을 하다가, 대기업체 사장을 하다가, 심지어 국정원장, 대법관을 하다가 국회의원을 준다면 만사 제치고 달려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과문하지만 기자는 주는 금배지를 거절하거나 포기하는 정치인을 한 번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있다. 자중지란에 빠진 제1야당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삼고초려해 모신 인물이다. 그는 처음 수차례 “비례대표에 관심 없다”고 말했지만 스스로 남자 1번에 ‘셀프 공천’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금배지에 관심이 없다는 정치인의 말은 ‘새빨간 거짓’이라는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시킨 것이다. 그의 셀프 공천도 논란이지만, 이번에 당선되면 비례(전국구)로만 5선을 하는 헌정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다. 파란만장한 우리 정치판에서 ‘낙점’으로만 5선을 한다는 것은 거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일이다. 그래서 그는 연구대상이다.

/ 서성일 기자

/ 서성일 기자

할아버지 김병로의 비서로 정치계 입문
김종인은 해방 후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街人) 김병로의 손자다. 그는 1940년 가인의 둘째아들인 김재열의 2녀1남 중 외아들이다. 그의 부친은 보성전문을 나와 일본 규슈(九州)대를 졸업하고 일본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뒤 변호사 개업을 준비하다 31세로 요절했다. 그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할아버지인 가인 집에서 성장했다. 중앙고와 한국외국어대 독어과를 나와 당시 정치에 뛰어든 할아버지 비서를 지냈다. 대법원장까지 마친 가인은 74세인 1960년 7·29 총선에서 고향 전북 순창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5·16 쿠데타가 나고 민정이양 시기인 1963년 가인은 야당 민정당(民政黨) 창당 발기 취지문을 쓰는 등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가인의 비서였던 그도 적극 참여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정치물을 먹은 것은 50년이 훨씬 넘었다.

그러나 1964년 1월 ‘실제적 지주’인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뮌스터대학에서 ‘개발도상국에 있어서 분배 및 재분배 정책의 기능성과 한계’라는 논문으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종인은 1973년 당시 서강대 상경대 이승윤 학장(이후 경제부총리 역임)의 천거로 서강대 재정학 교수가 됐다. 당시 서강대 상경대는 남덕우 전 총리, 이승윤 경제부총리, 김만재 한국개발연구원(KDI) 초대원장 등이 이른바 ‘서강학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서강학파는 학문적 학파가 아니라 ‘선 성장 후 분배, 재벌 육성을 중심으로 한 압축성장’으로 상징되는 박정희 정부의 경제정책을 주도하는 세력이었다.

김종인 역시 서강학파의 일원답게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정부는 1970년대 중반 경제개발계획을 지원하기 위해 부가가치세 도입을 검토했다. 이를 실무적으로 추진한 사람이 당시 경제기획원 김재익 기획국장이다. 그는 재무부 조세제도 심의의원으로 김재익의 자문역을 하면서 가까워졌다. 그보다 두 살 위인 김재익은 당시 금융계 집안의 큰딸을 중매할 정도로 가까웠다. 부가가치세는 1976년 입법되고 1977년부터 시행됐다.

10·26 이후 등장한 신군부는 초법적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만들었다. 이 국보위 경제과학위원장에 바로 김재익이 임명됐다. 김종인도 이 국보위 경과위 재무분과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는 국보위 참여에 대해 “부가가치세를 폐지한다고 협조해달라고 요청이 와서, 이것만큼은 막아야겠다는 생각에서 국보위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보위 경과위원장이 부가세 도입 실무책임자인 김재익이라는 점에서 앞뒤가 맞질 않는다. 또 ‘마지못해 갔다’는 그의 주장은 당시 증언과 정황으로 보면 사실과 다르다.

원래 국보위 경과위원장은 서울대 조순 교수를 염두에 뒀다. 조 교수는 육사 교관시절 전두환·노태우 등 육사 11기를 가르친 인연이 있다. 전두환·노태우는 스승인 조순을 국보위 경과위원장으로 초빙했다. 그러나 조순은 국보위 참여를 거부했다. 신군부의 ‘삼고초려’에도 거부하다 보니 국장급인 김재익이 일약 위원장으로 발탁된 것이다.(<동아일보> 1993년 5월 2일)

이는 새누리당 김용갑 상임고문의 주장과도 상통한다. 김용갑은 “당시 국보위 참여를 사양한 사람이 특별히 없었다고 한다”면서 “경제부총리를 지낸 조순 당시 서울대 교수의 경우는 사양을 했다고 나중에 들었다”라고 주장했다. 김용갑은 또 “국보위는 부가가치세 폐지를 추진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연합뉴스> 2016년 1월 31일)

국보위 참여 “마지못해 갔다” 사실일까
김재익은 전두환 정권에서 경제수석으로 승승장구했고(그러나 1983년 아웅산 폭발 사건 때 순직했다), 김종인도 덩달아 전국구 금배지를 달았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김종인이 신군부의 민정당 창당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사실이다. 남재희 증언에 따르면 그는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이 주도하는 창당작업에 가담해 정강정책을 만들었다. 언론인 출신으로 민정당 정책위의장을 지낸 남재희는 “독일에서 유학했던 김종인씨에 의해 주로 만들어진 정강정책은 추상적·이론적 내용이 담긴 서독 정당 스타일이었다. ‘정당의 정강정책은 형식적 구호 나열이 아니라 정치철학서가 돼야 한다’는 게 김씨의 주장이었다. 김씨 등이 모처럼 뜻을 펴겠다고 만든 작품이었지만 보안사 장교인 권씨의 눈에는 학자들의 공리공론에 불과했다. … 권정달씨에 의해 일언지하 휴지가 됐다”고 증언했다.(<남산의 부장들>, 동아일보 1993년 10월 3일)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3월 21일 당무를 거부하고 서울 구기동 자택으로 들어서고 있다. /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3월 21일 당무를 거부하고 서울 구기동 자택으로 들어서고 있다. / 연합뉴스

얄궂은 운명이라면 운명인 것은 1963년 할아버지가 민정당(民政黨) 발기 취지문을 썼고, 자신은 17년 후 이름이 같은(한자만 다른) 민정당(民正黨) 정강정책을 처음 기초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민정당은 군부정권에 맞서는 야당인 반면, 손자가 참여한 민정당은 광주의 피를 통해 만들어지는 군부정권을 합리화하는 여당이라는 점이다. 신군부가 만드는 비밀 창당작업에 참여해 의욕적으로 정강정책을 기초하던 사람이 ‘마지못해 참여했다’고 한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가 창당된 민정당 전국구(비례대표) 금배지를 단 것도 이 덕분일 것이다.

그의 정치운과 관운 대부분은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의해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태우는 “당에서 크고 작은 일이 생길 때마다 자연스럽게 모이는 팀이 있었다. 이른바 ‘기획팀’이었다. 최병렬, 현홍주, 김학준, 김종인, 강용식, 임인규 등이 중심이 되고 상황에 따라 당직자들이 합류했다. 이들은 갖가지 사항들에 대해 내게 조언해 주었다”고 기록했다.(<노태우 회고록>, 2011)

전국구로 두 번 국회의원을 지낸 그는 1988년 13대 총선에서 지역구 서울 관악을 지역에 출마했다. 교수 출신의 전국구 의원은 원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보통인데 그는 지역구를 택했다. 이는 금배지의 매력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지역구에 현직 대통령이 직접 방문하는 등 ‘전폭적’으로 지원했지만 신예 이해찬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다.(김 대표가 이해찬을 낙천시킨 것은 이런 과거의 악연이 작용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는 곧장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복귀했고, 1992년 경제수석이 됐다.

그는 서강학파의 일원답게 친재벌 압축성장론자다. 그러나 그는 1987년 현재의 헌법 개정작업에 참여하면서 헌법 119조 2항 이른바 ‘경제민주화 조항’을 신설했다. 이는 서강학파 입장에서는 일종의 ‘이단’이다. 하지만 이는 당시 시대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던 측면이 있다. 당시 부동산 광풍이 불고, 집값 폭등에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재벌의 과도한 부동산 투기가 문제가 됐다. 이에 위기감을 가진 정부는 자연히 재벌을 억제하는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그가 30대 재벌 부동산 4800만평을 매각하는 5·8조치를 단행한 것도 그런 배경이다.

햇볕이 있으면 음지도 있다. 그는 1991년 권력형 비리사건인 수서사건으로 검찰 조사를 받고, 1993년 5월 동화은행으로부터 2억1000만원을 받은 혐의(특가법상 뇌물)로 구속됐다. 당시 김종인은 “가문의 명예를 더렵혔다”고 자책한 것으로 알려졌다.(<한겨레신문> 1993년 7월 23일) 그는 1심에서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1994년 1월 28일 2심에서 ‘자수 감경’돼 징역 2년6개월, 집행유예 4년으로 풀려났다. 이후 1995년 10월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다시 기소돼 징역 5년을 구형받았다.

이후 김종인은 사실상 정계를 떠났고,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러나 10년 후인 2004년 그는 제17대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으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네 번째 비례대표 금배지를 단 것이다. 이후 그의 정치적 행보는 극과 극을 넘나드는 광폭의 연속이었다. 2011년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박근혜 대동령 당선에 기여했다. 그러나 2016년 1월에는 다시 180도 전환, 제1야당 더불어민주당 선대위원장으로 변신했다.

뇌물혐의로 실형, DJ정부에서 부활
그의 정치적 이력이나 평소 지론, 신념이나 의식은 야당인 더민주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네 번의 국회의원을 모두 여당에서 했다. 경제민주화를 제외한 다른 정책에서는 더민주 당론보다 훨씬 보수적이다. 단지 더민주는 경제민주화라는 일종의 ‘전매특허’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를 영입했을 것이다. 사실 정당은 ‘이념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정권을 잡기 위한 모임’이라는 기본적 개념에 비추어 극과 극을 넘나드는 그에게 명확한 정치적 이념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특히 줄곧 여당만 한 그는 야당이 아스팔트 위에서 최루탄을 마시며, 보안사 지하실에서 알몸으로 고문을 당하며 만든 정당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당무를 거부하고 자신의 사무실에서 ‘고민이 많겠다’는 기자들의 질문에 “내가 고민이 많아? 내가 왜 고민을 해? 나는 고민 절대로 안 해. 고민을 안 하고 오히려 맘이 편해”라고 말했다. 이 말은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우선 선공후사 정신의 부재다. 비대위원장의 당무 거부가 가져올 파장, 특히 선거를 불과 20여일 남긴 시점에서 득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감안하지 않았다. 이는 공천 탈락에도 불구하고 선거지원에 나선 나이 어린 정청래 의원과 크게 대비된다.

그는 자신의 공천안이 당원들과 여론의 반대에 부딪히자 설득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는 교수시절부터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이 셌다. 이는 바닥인 유권자들로부터 선택받지 않고 위로부터 선택된 사람이 가지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좀처럼 자신의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는 것, 당무를 거부하는 ‘노여움’에서 전형적인 우리 ‘노인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보통 노여움과 고집은 나이가 들수록 더 세진다.

그의 실제적 지주인 가인 김병로의 비문에는 “무릇, 시대의 탁류 앞에서는 세 종류의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니, 하나는 거기에 굴종하는 사람이요, 또 하나는 피하며 숨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그 탁류와 더불어 마주 싸우며 끝까지 지조를 급히지 않는 사람으로…”라며 가인이 마지막 세 번째 인물이라고 추모하고 있다.(김진배, <가인 김병로> 1983) 김종인은 과연 탁류의 정치에서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고 싸웠을까.

이제 말 많던 공천도 마무리됐고, 각 당은 공식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이번 4·13 총선에서 국민들은 김종인의 더민주에 어떤 평가를 내릴까.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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