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향소에는 촛불만 껌벅거리고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나이 지긋한 여성이 조용히 신발을 벗고 들어와 무릎을 꿇고 십자가 성호를 그었다. 일어서는 그의 얼굴에는 눈물이 맺히다 못해 주르륵 흘렀다. 그는 “세월호 참사가 벌써 없었던 일처럼 된 것이 가슴 아프다, 우리나라 사람은 너무 빨리 잊는 것 같다”고 말하며 흐느꼈다. 나이가 예순 여덟이고 손주가 고등학생이라는 그는 전남 나주에서 등산 왔다가 이곳에 왔다고 한다. 그는 방명록에 ‘벌써 잊혀지고 있다니 서럽습니다’라고 적고 조용히 분향소를 나갔다.
이곳은 진도 팽목항에 있는 세월호 희생자 분향소다. 팽목항 한쪽 주차장에 컨테이너로 만든 분향소에는 희생된 학생들의 영정과 꽃, 그들에게 보내는 각종 편지가 쌓여 있다. 분향소 주변에 세워진 시민·사회단체 컨테이너는 대부분 문이 잠겨 있고, 노란 추모리본은 비바람에 낡았다. 12월 중순임에도 비교적 따뜻한 날씨 덕에 이곳을 찾는 사람이 이어졌다. 관광버스도 2대나 있다. 인근 등산을 마치고 겸사겸사 온 시골 노인들도 있고, 군 입대를 앞둔 아들과 함께 이곳을 찾은 중년 부부도 있었다.
추모 열기는 식어도 잊지 않은 국민들
진도 팽목항이라는 단어는 꺼내기조차 고통스럽다 못해 저주스럽다. 세월호와 청해진해운, 해경 123정, 진도VTS(관제센터), 유민이 아빠 등 연관 단어 역시 그렇다. 그런데 팽목항 방파제 난간에 줄지어 매어놓은 플래카드와 노란 리본에는 ‘기억하겠다’,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 많다. 방파제 끝 빨간색 등대에도 ‘리멤버 14.04.16’이라고 써 놓았다. 다시 들먹이는 것조차 고통스런 단어를 서로 ‘잊지 말자’고 다짐해야 하는 기막힌 역설에 살고 있는 것이다.
실제 우리 국민은 세월호를 잊지 않았다. 비록 추모 열기, 애통함, 공분 등은 사고 직후보다 많이 수그러들었지만 여전히 국민들은 세월호를 기억하고 있다. 한 빅데이터 업체가 올 한 해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소통된 키워드 31억6000만여건을 분석한 결과 1위가 약 489만회 언급된 세월호였다.(2위는 메르스, 3위는 교과서 국정화, 4위는 국정원 휴대폰 해킹, 5위는 이슬람국가(IS)였다)
기억하기 저주스럽지만 잊지 않기 위해 세월호 참사를 간단히 복기해 보자. 세월호 참사는 청해진해운이 폐기를 앞둔 18년 된 배를 일본에서 수입하면서 시작됐다. 마침 정부는 연안여객선 운항시한을 20년에서 30년으로 늘려줬다. 청해진해운은 낡은 배에 화물을 더 싣기 위해 증축했고, 안전을 책임져야 할 기관은 ‘문제 없음’으로 판정했다.
4월 15일 세월호는 인천항에서 안산 단원고등학교 수학여행단 2학년 학생 325명, 교사 14명, 일반인 104명, 선원 33명을 태우고 제주항으로 향했다. 청해진해운은 차량 180대, 화물 1157톤을 싣고도 차량 150대, 화물 675톤밖에 싣지 않았다고 거짓 보고했다. 해운회사가 탈세를 위해 흔히 쓰는 수법이다. 화물을 더 많이 싣기 위해 안전에 필수적인 평형수는 빼버렸다. 화물을 고정시키는 작업도 대충했다.
4월 16일 오전 8시30분, 세월호는 전남 진도군 조도면 맹골도와 서거차도 사이에 들어섰다. 이곳은 조류가 센 곳이다. 그런데도 선장은 배를 초보자에게 맡기고 딴 일을 봤다. 세월호 선장을 포함한 항해사, 조타수 등 선원 대부분은 계약직이었다. 증축한 데다 평형수까지 빼 불안정한 세월호는 이곳에서 지그재그로 운항하다 화물이 한쪽으로 밀리면서 그대로 뒤집어졌다. 세월호는 서서히 침몰했으나 선장과 선원들은 학생들에게 “그대로 있으라”는 방송을 한 후 자기들끼리만 빠져나왔다. 출동한 해경은 배 밖에서 몇몇 선원만 구조했을 뿐이다.
안전불감증과 부패의 총체적 결과물
전국에서 구조단이 달려왔으나 해경은 ‘계약’을 이유로 특정회사를 기다리며 골든타임을 놓쳤다. 이 현장은 TV로 중계됐고, 국민들은 침몰하는 세월호 안에서 죽어가는 아들딸을 멍하니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정부도, 특히 대통령은 그 중요한 7시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결국 304명이 사망하고, 아직 9명의 시신은 찾지 못하고 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는 말을 자주한다. 불과 2년도 안 됐지만 세월호 참사에서 ‘가정이 있다면’(이도 안타까움의 발로지만) 어땠을까. 폐기를 앞둔 낡은 배를 도입하지 않았으면… 과적만 안 했다면… 화물만 제대로 묶었더라면… 대피 방송만 했더라면… 등등의 가정법을 나열하고, 이 가운데 단 한 가지만이라도 ‘제동’이 걸렸다면 이런 대규모 참사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 재난에서 보안(안전)은 인위적인 것은 물론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체크해 안전이 확인돼야 한다. 파란색 신호등이 켜지기 위해선 ‘배의 안전에 문제가 없나, 항로는 제대로 잡혀 있나, 통신은 확보돼 있는가, 선장의 심신 상태는 정상인가’ 등등 모든 가능성에 ‘OK 사인’이 나야 된다. 그러나 우리는 ‘설마’라는 안전불감증에 ‘대충 대충’ 졸속으로 처리했다.
미국은 9·11테러가 나고 국토안보부를 만드는 데 1년 넘게 걸렸다. 재난·테러·건축·행정 전문가들이 충분히 검토해 정부조직을 개편했다. 그러나 우리는 세월호 참사 이후 국민안전처를 만드는 결정을 불과 13일 만에 내렸다. 그것도 사고원인 규명과 전문가의 충분한 토론 없이 대통령의 ‘하명’ 한마디로 만들어졌다. 평상시에도 졸속, 사고 직후 대응도 졸속이었지만, 수습 역시 졸속이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의 솔직한 민낯이다. 탐욕스럽게 이윤만 추구하는 기업, 각종 불법과 탈법을 대충 눈감아준 감독기관, 위험이 닥치면 먼저 달아나는 고위층, 몸 보신에 익숙한 구조기관, 냄비 근성의 언론, 부패 구조에 한통속으로 엮여 있는 행정부처, 여론만 살피다 시간이 지나면 대충 마무리하는 정부 등 우리 사회의 부패와 졸속으로 점철된 총체적 결과물이다.
우리는 이런 민낯의 존재를 몰랐을까. 아니 알았을 것이다. 이미 처절하게 체험했지만 곧 잊어버린 것이다. 연안여객선의 안전불감증은 1993년 292명의 생명을 잃은 서해 훼리호를 그대로 닮았다. 해양구조의 난맥은 사건 발생 불과 3년 전인 2010년 천안함 침몰사건에서 반복된 그대로다. 기업의 탐욕과 행정기관의 야합은 501명이 죽고 6명이 실종된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그대로다. 사고 원인을 과학적으로 검증하지 않은 것은 2003년 192명이 사망한 대구지하철 화재사고를 빼닮았다. 결국 우리는 비슷한 사고를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망각의 대가로 또다시 어린 생명 등 313명을 잃은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졸속과 망각의 산물이다. ‘기억하겠다’ ‘잊지 말자’는 다짐도 그런 맥락이다. 유족들은 ‘기억하라’를 외치며 진도 팽목항에서 서울까지 걷기도 하고, 안산에서 서울까지 시위도 했다. 국회와 광화문광장에서 단식투쟁을 하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안산 단원고 희생 학생 교실을 ‘기억교실’이라고 이름 붙였을까.
그런데 정부는 거꾸로 ‘그만해, 잊으라’를 강요하고 있다. 어렵게 세월호 특위가 만들어 졌지만 정부는 예산·인원 배정을 거부했다. 여당추천 위원은 공공연히 해체를 주장한다. 힘겹게 청문회를 열었지만 공중파 방송은 거의 외면한다. 졸속으로 일관한 정부가 망각을 강요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은 이보다 더 많은 숨겨진 진실이 있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그래서 졸속과 망각의 대형 재난사건에 세월호 참사는 한 가지가 더 추가됐다. 바로 불신이다. 정부의 공식 발표, 청문회의 증언, 형사재판에서 드러난 각종 증거에도 불구하고 유족과 세월호 특위는 여전히 ‘진실’에 목말라 있다.
어렵게 꾸려진 특위, 외면당한 청문회
사고 이후 줄곧 팽목항 컨테이너에서 살고 있는 권모씨는 아직 동생과 조카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다. 아직 배에 시신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단호하게 “회수된 학생 스마트폰과 배의 폐쇄회로(CC)TV를 보니 유리창이 깨지면서 다시 배안으로 쓸려 들어갔다”면서 “잠수사들은 위험한 곳에는 들어가지도 않았다”며 정부 발표를 믿지 않았다. 권씨는 “내년 7월 인양되면 모든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부인, 아들과 함께 팽목항을 찾은 김모씨는 “우리는 바다에서 살아서 안다, 조그만 배라면 모르지만 이렇게 큰 배가 뒤집어질 수는 없다”면서 “정부 발표를 속시원히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바다 밑에서 벌어지는 인양작업도 의심이 간다”며 강하게 의문을 제기했다.
이러한 극도의 불신은 정부가 합리적 추론도 봉쇄하고 사실을 은폐 혹은 조작했기 때문이다. 해경은 통신기록을 조작하고, 청와대는 지금도 대통령 일정을 숨기고 있다. 정부기관의 은폐·조작은 이번만이 아니다.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및 간첩조작 사건, 천안함 침몰 등 일련의 사건에서 정부기관의 은폐와 조작이 일상화돼 왔다. 그래서 여러 가설과 논란과 억측이 난무한다. 암초충돌설, 변침설, 내부폭발설, 잠수함 충돌설…. 세월호 소유자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신뢰를 잃은 정부에 대한 국민의 비판은 가혹하다. 세월호 참사를 잊지 말자며 시민기록위원회가 만들어지고 다큐멘터리 영화까지 만들었다. 그 영화 제목은 <나쁜 나라>다. 나쁜 나라란 단어에는 세월호 참사에 대처한 정부의 태도가 한마디로 집약돼 있다.
그러나 망각과 졸속에 신뢰까지 잃은 정부는 성심으로 신뢰를 회복하기보다 세월호를 정치화했다. 적반하장이다. 세월호 참사의 ‘망각과 졸속’을 지적하는 사람을 ‘반정부’로 몰아버린 것이다. 지금 세월호의 진실을 찾고, 노란 리본을 다는 행위는 ‘반정부’ 표지로 인식된다. 심지어 합리적 의심조차 ‘종북’으로 매도되기도 한다. 극우단체들은 ‘국론분열 조장하는 좌익 정치집단 세월호 특위를 해체하라’고 공공연히 주장한다. 심지어 세월호 유족을 ‘떼 쓰는 사람’에 비유하고, 야당 대표를 ‘공산주의자’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극우 인물을 세월호 특위위원으로 임명했다.
이명박 정부가 ‘과학(토목)을 정략화’했다면 박근혜 정부는 ‘비극’을 정략화한 것이다. 참사로 자식을 잃은 비극까지 정략화한 것은 대단한 정치공학이자 정치기술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진실은 억지로 잊게 하거나 감출수 있는 것이 아니다.
<광복 70주년 역사 르포/‘서대문 형무소에서 진도 팽목항까지’ 시리즈 끝>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