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천안함 침몰… 무능 정권이 만든 안보교재·안보프레임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 이상훈 선임기자
2015.12.08

초계함이란 배수량 1000톤 내외의 군함으로 정(500톤급)보다 크고, 구축함(3500톤 이상)보다 작다. 초계함은 연안에서 경비 임무를 맡지만 기관포와 함포, 대함 미사일까지 탑재해 공격 능력도 뛰어난 전함이다. 음파탐지기가 있어 대잠수함 능력도 갖추고 있다. 1998년부터 3000톤이 넘는 한국형 구축함이 배치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초계함은 우리나라 해군의 주력 전함이다.

그런데 해군 초계함 PCC-772함은 서해 작전해역을 떠나 육지에 올라와 있다. 바로 천안함이다. 천안함은 평택 2함대 사령부 ‘서해수호관’에 참혹한 모습으로 전시돼 있다. 배 가운데가 절단돼 두 동강이 났고, 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마스터와 가스터빈실은 따로 널브러져 있다. 배의 척추에 해당하는 굵은 강철 용골은 끊어졌거나 엿가락처럼 휘어 있고, 철판은 종잇장처럼 찢어져 있다. 절단된 배의 단면에는 전선 케이블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아마 찾지 못한 해군 장병의 피와 살은 비틀어져 있는 이 철골과 튕겨나온 가스터빈 어디엔가 묻어 있을 것이다.

경기 평택 2함대 사령부 ‘서해수호관’에 전시된 천안함.

경기 평택 2함대 사령부 ‘서해수호관’에 전시된 천안함.

서해수호관 천안함의 처참한 몰골
천안함은 이런 처참한 몰골로 우리 해군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수호한 안보교재로 활용되고 있다. 평택 해군 2함대 사령부 안에 있는 서해수호관은 그동안 서해에서 벌어진 제1, 제2 연평해전과 대청해전, 연평도 포격도발 등을 설명하는 안보교육 시설이다. 이곳 서해수호관에는 개인 및 단체 방문객이 이어지고 있다.

11월 말 처참한 모습의 천안함을 둘러보는 70대 중·후반의 노인들은 혀를 차며 “저런데도 아직 내부 폭발이니, 좌침이니 하는 X들이 있단 말이야”라고 말했다. 그 노인은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라는 모자를 쓰고 웃옷에는 훈장 탄 것을 입증하는 약장이 즐비하게 달려 있었다. 이들은 충남에서 전세버스를 타고 안보견학을 왔다고 했다. 안내 사병은 1·2차 연평해전, 대청해전 등 우리 해군의 대응은 완벽했으나 단지 ‘햇볕정책’으로 대응이 좀 늦었다고 말했다.

백령도는 인천에서 북서쪽으로 191㎞ 떨어져 있으나, 북한 장산곶에서 15㎞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섬이다. 백령도를 비롯한 서해 5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우도) 일대는 휴전협정에 분명히 명시되지 않았지만 조용한 바다였다. 남한에 적용된 NLL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민감하지 않았다. 우리 군은 “북방한계선은 1953년 7월 설정된 이후 우리 군이 피로써 지켜온 실질적인 해상경계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천안함 피격사건 백서>·대한민국 정부·2011) 하지만 “1996년 이전에 NLL의 확고한 수호를 촉구하는 국방장관이나 합참의장, 해군참모총장의 성명이나 지휘서신, 훈시 내용이 단 한 건도 발견되지 않는다”고 반박하는 주장도 있다. (<서해전쟁>·김종대·2013)

실제 NLL은 남북 어민이 적당히 넘나들며 조업하던 곳이다. 1996년 국회에서 매년 수백 척의 북한 배가 NLL을 넘어 조업하는 문제에 대해 당시 이양호 국방부 장관은 “NLL 월선은 정전협정 위반이 아니기 때문에 넘어와도 괜찮다”고 답변할 정도였다.(1996년 7월 16일·국회본회의 회의록) 그런데 1999년 6월 15일 이른바 제1 연평해전, 2002년 6월 29일 제2 연평해전이 일어나면서 위기감이 감도는 ‘긴장의 바다’로 돌변한 것이다.

절단된 천안함 중심부의 참혹한 모습.

절단된 천안함 중심부의 참혹한 모습.

2010년 3월 26일 밤. 천안함은 백령도 서남쪽 해역에서 시속 2노트의 속도로 천천히 움직였다. 승조원들은 휴식과 운동을 하던 중이었다. 밤 9시22분 두 차례 폭발음과 함께 배가 크게 흔들리면서 기울어졌다. 9시28분 포술장은 평택 2함대 상황반장에게 “천안인데 침몰됐다. 좌초다”라고 처음으로 보고했다. 9시30분 함장과 포술장이 갑판으로 나왔을 때 천안함은 오른쪽으로 거의 90도 기울어 있었다. 그런데 배의 중간 이후 부분이 사라지고 없었다. 사라진 배 후미와 함께 장병 46명도 사라졌다.

정부는 미국, 스웨덴, 영국 등 5개국 전문가 24명으로 민간·군인 합동조사단(합조단)을 구성해 침몰 원인을 조사했다. 합조단은 5월 20일 북한의 130톤 연어급 잠수정이 발사한 1.7톤급 중어뢰가 천안함 밑에서 터지면서 강력한 충격파와 버블제트로 천안함이 두 동강 났다고 발표했다. 합조단은 그 증거로 해역에서 발견된 어뢰 프로펠러와 추진모터 등을 공개했다. 특히 이 어뢰추진부 뒤 안쪽에 있는 ‘1번’이라는 표기가 결정적 증거라고 합조단은 강조했다.

제 역할 못한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하지만 합조단의 발표는 갖가지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6월 2일 전국 지방선거를 앞두고 천안함 침몰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야당과 시민단체의 주장이 제기되면서 천안함 참사는 ‘진실공방’으로 이어졌다. 연어급 잠수정에 중어뢰를 탑재할 수 없다는 주장에서부터 폭발에도 형광등이 멀쩡한 이유, 희생자들이 고막 파열이나 중상자가 없고 모두 익사한 이유도 의문으로 제기됐다.

무엇보다 사고 당일 불과 120㎞ 떨어진 곳에서 잠수함 탐지능력이 뛰어난 대함초계기(P3C)와 링스 헬기, 주한미군의 최첨단 U-2 정찰기가 대잠수함 훈련을 하고 있었다. 합조단 발표대로라면 낡고 작은 북한 잠수정이 무거운 중어뢰를 싣고 한·미 최첨단 경계망을 피해 침투, 한 방의 어뢰로 천안함을 침몰시키고 북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 버지니아대학 물리학과 이승헌 교수와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서재정 교수,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박선원 연구원 등이 “250㎏의 화약이 폭발할 때 섭씨 300도에서 1000도에 가까운 열을 발생한다”면서 “끓는 점이 150도 정도인 잉크로 쓴 ‘1번’ 표기는 당연히 탔을 것”이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또 어뢰 파편과 선체의 알루미늄 흡착물질의 성분을 놓고 치열하게 전문적인 논쟁을 벌였다.

천안함 침몰에 대한 의혹이 꼬리를 물고 계속되자 국회는 5월 24일 ‘천안함 침몰사건 진상조사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하지만 특위 구성부터 여야의 정략적 싸움으로 진상규명은커녕 조사다운 조사 한 번 못하고 끝났다. 정부는 빗발치는 천안함 침몰 의혹을 모두 오보이며 왜곡보도라고 일축했다. 정부는 “대언론 공보는 초기 상황에서 정보 부재에 따른 언론과의 갈등관계가 지속된 가운데 오·왜곡 보도가 증가되면서 군에 대한 불신을 초래했다”고 기록했다.(천안함 백서)

2010년 4월 24일 백령도 앞바다에서 인양이 시작된 천안함 함수가 크레인에 매달려 바지선이 접근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2010년 4월 24일 백령도 앞바다에서 인양이 시작된 천안함 함수가 크레인에 매달려 바지선이 접근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천안함 침몰은 누구의 소행인가’란 질문
하지만 합조단의 발표도 서툰 점이 많았다. 증거물로 제시한 북한 어뢰 설계도는 실제와 달라 수정 발표하는 촌극을 빚었다. 논란이 계속되자 한국기자협회, 한국프로듀서연합회, 전국언론노동조합 등 3개 언론 유관단체는 ‘천안함 조사 결과 언론보도 검증위원회’를 구성했다. 특정 사건과 관련해 언론 유관기관이 합동 검증위원회를 구성한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국회 특위도 밝히지 못한 진실을 강제력 없는 언론 검증위가 규명할 수는 없었다. 언론 검증위는 6월 4일 △해군전술지휘통제 시스템 기록과 교신기록이 공개되지 않은 점 △증거의 보고인 가스터빈실이 정부 발표에 포함되지 않은 점 △버블제트에 의한 물기둥 발생 시뮬레이션을 미완성 상태로 발표한 점 등을 들어 “정부와 군의 조사 결과 수준은 우리 국민과 국제사회를 설득시키기에 턱없이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민간 중심의 객관적 검증기구와 국회 국정조사를 통해 진실을 재규명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에 대해 사법조치로 대응했다. 김용옥 고려대 명예교수는 한 보수단체로부터,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는 한 해군 대령으로부터 고소당했다. 천안함 민간조사위원으로 ‘좌초설’을 주장한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는 국방부 장관과 해군참모총장이 직접 고소했다. 국방부는 허위사실 유포로 명예가 훼손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렇게 고발된 사람들에 대한 사법 심사는 질질 끌고 있다. 신상철 대표의 재판은 5년간 계속되지만 사법부는 1심 판단조차 유보하고 있다. 이러한 사법부의 판단 유보는 또 다른 의혹을 낳고 있다. 법정에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천안함 침몰이 북한 소행이라 하더라도 경계를 소홀히 해 46명의 부하를 잃은 천안함 함장은 엄중히 처벌해야 한다. 나중에 드러난 것이지만 정부의 대응도 형편없었다. 천안함 침몰 순간, 우리 군 최고 지휘부인 국방부 장관과 합참의장이 무려 49분간 공백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김종대·<서해전쟁>) 그런 점에서 천안함은 우리 군의 나태와 무능을 상징한다.

그러나 천안함은 이런 문제를 숨긴 채 안보교재로 등장했다. 적반하장격이다. 심지어 안보 잣대까지 돼버렸다. ‘천안함 침몰은 누구의 소행인가’라는 질문은 대한민국 국민임을 검증하는 기준이 됐다. 명쾌하게 ‘북한 소행이다’라고 답변하지 않으면 사상을 의심받고 심지어 종북으로 매도된다. 헌법에 규정된 양심의 자유도 무시된다. 2011년 6월 28일 헌법재판관 인사청문회에서 ‘천안함은 북한의 소행인가?’라는 질문에 조용환 후보자는 “우리 정부에서 그렇게 발표했고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조 후보자는 북한의 소행이라고 ‘확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헌재 재판관 인준이 부결됐다.

어설픈 야당이 노련한 여당의 안보 프레임에 갇힌 것이다. 야당 문재인 대표도 ‘다른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정부 발표를 존중하겠다’는 입장에서 ‘북한의 소행’이라고 돌아섰다. 박원순 서울시장도 비슷한 검증과정을 거쳤다. 군의 나태와 정부의 무능함의 증거였던 천안함은 보수의 훌륭한 사상검증 도구로 변신한 것이다.

천안함의 진실은 아직도 명백하지 않다. 영원히 드러나지 않을 수도, 정부 발표대로 북한의 소행일 수 있다. 하지만 천안함의 진실이 무엇이건 간에 과학적으로 명쾌히 밝혀질 문제가 이렇게 진실 논란에 휩싸인 점이 문제다. 합리적 추론과 의심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4대강 사업 등을 통해 토목(과학)을 정략적으로 이용했던 이명박 정부의 업보가 아닐까. 천안함은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잃은 정부가 얼마나 혹독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이다.

처참한 모습의 천안함을 둘러보던 한 노인이 “그런데 왜 잠수함을 못 본 거야? 고기잡이 배도 물속에 있는 고기를 볼 수 있거든”이라고 해군 병사에게 질문했다. 옆에 있던 한 노인이 “이 사람은 어선협회장이라 배에 대해 잘 안다”고 거들었다. 또 다른 사람이 “음파탐지기(소나)도 있잖아, 저 배 밑에 볼록 나온 것”이라고 손짓까지 했다. 설명하던 해군 병사는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음파탐지기가 성능이 나빠서요…”라고 얼버무렸다.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의 70대 노인조차도 이렇게 상식적이며 예리한 질문을 던진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 이상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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