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7일 오후, 늦가을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은 많았다. 관광버스도 몇 대 들어왔다. 사람들은 뒷짐을 지고 말 없이 묘역을 이리저리 걸었다. 1960년대 베스트셀러였던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라는 책이 생각났다. <민족일보> 사건으로 구속된 양수정 편집국장은 서대문형무소 사형집행장으로 가는 조용수 사장을 비롯한 사형수의 마지막 모습을 관찰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앞둔 인간의 참담한 심경, 뭐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순간에 인간은 하늘과 땅을 번갈아 쳐다보는 행태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 모습이었다. 간혹 ‘쯧~쯧~쯧’ 하고 혀를 차는 사람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멍하니 하늘 혹은 뒷산 바위를 쳐다보다 천천히 땅에 박힌 박돌에 쓰인 글을 읽었다. 땅에 박힌 박돌에는 ‘당신이 그립습니다’ ‘당신을 알게 돼 행복했습니다’ 혹은 그냥 ‘고맙습니다’ 등 이런저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대통령 퇴임 후 불과 1년 3개월 만에
야트막한 뒷산 봉화산 언저리 바위까지 오르는 데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흐린 날씨 탓에 시야는 좋지 않았지만 생가 자리, 친환경 농법을 위해 오리를 풀어놓던 논도 보였다. 쓰레기를 치우러 자주 갔던 화포천에는 여전히 개울물이 흘렀다. 지금 시야는 아마 2009년 5월 23일 오전 6시40분 새벽안개가 끼었을 때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곳 경남 진영 봉하마을 봉화산 언저리에 있는 부엉이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대통령직에서 퇴임한 후 불과 1년 3개월 만이다. 물론 파란의 우리 현대사에서 ‘전직 대통령’의 운명은 순탄치 않았다. 우리의 전직 대통령은 쫓기듯 해외 망명 길에 오르거나, 최측근의 총격에 의해 죽거나, 깊은 산사에 유폐되고 교도소에 수감됐다. 한 나라의 정치 발전 수준을 다양하게 평가하지만 ‘전직 대통령의 정상적인 활동’ 역시 중요한 척도이다. 나름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전직 대통령을 가진 것도 문민정부 이후다.
하지만 전직 대통령이 투신 자살한 사례는 처음이다. 그는 밝게 웃는 모습으로 청와대를 나왔다. 그리고 낙향해 봉하마을의 ‘촌부’로 아름다운 전직 대통령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줬다. 자전거 뒤에 손녀를 태우고 달리는 모습, 친환경 오리 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모습, 찾아온 사람들에게 웃으며 얘기하는 모습 등등 이따금 봉하마을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얼마 안 돼 그는 “자신을 잊어 달라”는 처절한 절규를 하다 끝내 뒷산 부엉이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를 자살로 내몬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지금 반성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의 자살은 옳았는가.
2008년 2월 노무현이 청와대를 나온 지 6개월도 안 돼 그의 ‘정치 후원자’였던 박연차의 정·관계 로비 의혹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검찰이 그의 주변을 털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12월 4일 친형 노건평이 세종증권 매각과정에서 인수 청탁과 함께 29억여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언론은 노무현의 사과를 요구했으나 그는 “사과하면 형님의 죄를 인정하는 것”이라며 대국민 사과를 거부했다.
검찰의 노무현 털기는 더욱 노골화됐다. 2009년 3월 26일 한 신문은 이호철 전 민정수석과 정윤재 전 비서관이 금품을 수수했다며 ‘노무현 게이트’라고 명명했다. 이호철과 정윤재는 해당 신문을 고소했고, 결국 이 보도는 오보로 드러났다. 그러나 검찰의 노무현 털기는 전방위적으로 집요했다. 검찰은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이 박연차로부터 돈을 받았고, 이 가운데 일부가 부인 권양숙 여사에게 들어간 정황을 포착했다. 돈은 ‘빌린 것’이라는 주장과 ‘받은 것’이라는 주장이 맞섰다. 또 이 돈의 일부가 딸에게 송금됐는데 이 과정에서 불법 혐의가 드러났다.
결국 4월 7일 노무현은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사과했다. 그는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더욱이 지금껏 저를 신뢰하고 지지를 표해주신 분들께는 더욱 면목이 없습니다”라고 솔직히 사과했다. 그다운 솔직한 사과였다.(하지만 정 전 총무비서관이 해운회사 세무조사 무마와 관련해 돈을 받은 혐의는 재판에서 무죄로 드러났다.)
마침내 피의자의 신분으로 검찰 출두
4월 12일 부인 권 여사와 아들 노건호가 검찰에 소환됐다. 검찰과 언론은 노 전 대통령에게 ‘포괄적 뇌물수수죄의 공범’ 혐의를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자식을 위해 부인 권 여사가 오랜 후원자로부터 돈을 ‘빌리고’ ‘받고’ 하는 과정에서 일부 법을 어기고 송금된 것이었다.
언론은 더 집요했다. 언론은 봉하마을 그의 집 주변에 고성능 카메라를 설치하고 거의 24시간 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했다. 노무현은 4월 21일 “저의 집 안뜰을 돌려주세요”라며 언론에 ‘사정’했다. 그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간곡히 호소한다”면서 “먼 산이라도 바라볼 수 있는 자유, 최소한의 사생활이라도 돌려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언론은 그의 애절한 호소를 외면했다. 4월 22일 그는 ‘사람세상’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마지막 글을 올렸다.
“처음 형님 이야기가 나올 때에는 ‘설마’ 했습니다. …그러나 500만불, 100만불,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됐습니다.… ‘아내가 한 일이다, 나는 몰랐다’ 이 말은 저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 뿐입니다. 이상 더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자격을 상실한 것입니다. 저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수렁에 함께 빠져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
이것이 국민들에게 한 그의 마지막 말이다. 4월 30일 노 전 대통령은 ‘포괄적 뇌물수수죄’ 피의자로 검찰청으로 향했다. 언론은 그가 봉하마을에서 검찰까지 가는 길을 헬기까지 동원해 생중계했다. 그리고 그는 검찰청사 앞에서 사진기자들의 포토라인에 서는 ‘수모’를 당했다. 검찰 소환 후 잠시 잠잠하던 노무현은 5월 23일 오전 6시40분쯤 수행 경호원과 함께 사저 뒷산인 봉화산을 올랐다. 늘 가던 산책길이었다. 노무현은 봉화산 중턱에 있는 부엉이바위에 이르러 경호원을 바로 옆에 있는 정토사에 심부름 보냈다. 그리고 부엉이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부엉이바위는 그리 높지 않은 산 중턱에 있는 나지막한 바위이다. 그래서 뛰어내려 자살하기에 너무 낮다는 지적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부엉이바위는 날카롭고 아래쪽까지 이어져 있다. 아마 노무현은 이곳에서 몸을 허공에 날린 것이 아니라, 바위를 향해 자신의 몸을 던졌을 것이다. 그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내던지는 ‘처절한 시도’였을 것이다.
경호원이 그를 찾아 병원에 옮겼지만 이미 숨진 상태였다. 그러니까 그의 최후 모습을 본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는 투신 1시간19분 전인 5시21분 유서를 남긴 것으로 드러났다. 그의 유서는 간명하면서도 솔직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너무 슬퍼하지 마라./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미안해하지 마라./누구도 원망하지 마라./운명이다./화장해라./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오래된 생각이다.”
그의 죽음은 국민에게 충격을 줬다. 500만(장례위원회 추산)이 넘는 인파가 전국에 마련된 분향소에 조문했다. 집요하게 그를 추적하던 방송도 오락 프로그램을 방영하지 않았다. 5월 29일 시청앞에서 열린 노제에는 서울광장과 대한문 앞, 남대문까지 인파로 가득찼다. 하지만 이 모두 덧없는 일이었다. 그는 수원의 한 화장장에서 화장돼 봉화산 정토원에 머물렀다가 그 아래 조성된 묘역에 안장됐다.
500만의 인파가 전국 분양소에 조문
누가 노무현을 죽였는가. 법무부 장관을 지낸 천정배 의원은 “권력기관의 사유화와 보수언론의 탐욕이 만들어낸 재앙이다”라고 규정했다. 한 언론은 여론조사에서 그의 자살 책임으로 “56.3%는 검찰, 49.1%는 언론을 꼽았다”고 보도했다. 수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검찰 수뇌부가 사퇴했지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검찰도 스스로만의 판단에서 전직 대통령 털기에 나섰을까.
그를 죽음으로 내몬 언론도 서로 책임 미루기로 바빴다. 진보신문은 “비판 대신 증오, 죽은 권력 물어뜯기”라며 보수언론에 책임을 돌렸다. 보수언론은 “진보언론 역시 노무현을 희화화했고, 사망 후 다른 보도행태를 보였다”고 주장했다. 그랬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보수언론이나 진보언론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드러났지만 그가 회갑선물로 받은 시계 처리도 국가정보원이 왜곡해 언론에 흘린 것으로 드러났다. 게다가 경찰청장이라는 사람은 ‘자살한 이유는 전날 거액의 차명계좌가 발견됐기 때문’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렇게 허위발언한 전 경찰청장은 징역 10월을 선고 받고 법정구속됐다. 이런 정황은 노무현 털기에 검찰과 경찰, 국정원 등 사정기관이 총동원됐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6년이 넘었다. 그래도 묘소에는 꾸준히 사람들이 찾는다. 주말에 60명 예약을 받았다는 인근 식당 주인은 “찾아온 그들은 ‘가슴이 허(虛)해서 왔다’고 한다”고 전했다. 이곳을 경비하는 한 전경은 “묘 앞에서 엉엉 우는 사람도 꽤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무엇이 ‘허’ 하길래 여기를 찾고, 무엇이 억울하길래 묘 앞에서 통곡을 하는가.
이날 전남 고흥에서 묘소를 찾은 박채주씨(77)는 ‘평소 노무현을 좋아했느냐’는 질문에 “그러죠,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우리에게 권위를 버린 진정한 민주주의 모습을 보여준 분이지요”라고 말했다. 박씨 자신은 4·19 학생혁명에 가담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박씨는 묘역을 나서며 “여기에 안 오는 것이 나았다”면서 “안 왔으면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침통해 했다.
노무현은 대통령은 가진 절대 권위를 스스로 허물었다. 연줄과 빽으로 자리를 나눠먹던 관행에 익숙한 사람들, 정치자금과 특혜를 나눠 갖던 기업가, 공론을 조성하기보다 특정 이득을 추구하는 언론, 남북 긴장으로 이득을 보던 군인이나 군수업자들에게 그는 분명 ‘별종’이자 위협적 존재였다.
수백·수십 년 우리 정치·경제·사회 체제를 장악했던 이런 구체제가 합세해 노무현을 죽음으로 몰았다. 그는 이 구체제와 싸우다 싸우다 마지막 순간, 그 체제에 남은 몸뚱이를 내던지며 항거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많은 사람을 가슴 아프게 한 그의 마지막 선택은 분명 잘못이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 이상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