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2일,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와 거세게 부는 바람 속에 경기 평택시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정문 앞의 허름한 천막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찬바람을 막기 위해 천막 주변을 비닐로 둘러치고, 비닐에 날리는 것을 막기 위해 군데군데 모래주머니를 놓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곳에서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김득중 지부장은 42일째 단식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기자와 인터뷰 이틀 후인 14일 단식을 중단했다) 의료진으로부터 간 기능에 이상이 있다는 진단을 받은 그는 이날 탈진해 노조 사무실에 누워 있었다. 그는 기자의 사진촬영 요구에 힘든 몸을 이끌고 공장 정문 앞으로 나왔다. 그는 “단식 40일이 넘으면서 너무 지쳤다”며 “최근 정부가 노동개혁이라고 내놓은 것을 보면 기대할 것이 없다”고 허탈해 했다.
장장 44일간 지속된 지부장의 단식투쟁
단식농성장 주변에는 ‘7년의 해고, 7개월의 교섭, 인내할 만큼 인내했습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무기한 단식에 들어간다’ ‘죽음의 터널을 견뎌왔다, 해고자 복직, 손배 가압류 철회로 답하라’ 등의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단식장 옆 천막에는 조그만 제단이 만들어져 있다. 제단에는 ‘해고로 인한 쌍용차 죽음의 행렬, 얼마나 더 죽어야 합니까’라는 문구와 함께 숨진 26명의 명단이 빼곡히 적혀 있다.(현재 사망자는 2명이 더 늘어 28명이다) 제단에는 ‘해고는 살인이다, 살인을 멈춰라’는 문구와 함께 허름한 약과 몇 개의 촛대가 설치돼 있었다. 하지만 촛불은 꺼진 상태이고, 제단 주변은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 썰렁한 분위기를 보였다.
지금도 시민단체 등에서 응원을 오지만 장장 42일간 계속돼온 김 지부장의 단식에 관심을 기울이는 언론도 별로 없다. 쌍용차 사태는 이렇게 잊혀지는 것인가. 이른바 ‘쌍차사태’로 불리는 쌍용자동차 집단해고·강제진압·복직 투쟁은 우리 노동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단일 직장 사상 최대 해직, 사상 최악의 농성 진압, 사상 최다 해직 노동자의 죽음, 사상 최장기 동조집회 등 쌍차사태의 의미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게다가 비정규직 문제라는 2000년대 노동조건의 상징성도 있다.
쌍차사태는 이미 <자발적 연대와 노동운동에 관한 연구-쌍용자동차 정리해고 투쟁 사례>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사건을 계기로 본 정리해고 제도의 개선방향> 등 학술논문으로 체계적으로 분석되고 있다. 아직 마무리도 되지 않은 노동사건이 이렇게 주목 받은 적은 별로 없다. 이는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분신 이후 가장 의미 있는 노동운동 사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쌍차사태는 2009년 4월 8일 사측이 전체 근로자의 36%인 2646명 인력감축 계획을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쌍용자동차는 원래 대구 출신 김성곤이 세운 회사다. 김성곤은 박정희 대통령의 형 박상희와 가까워 1960년대 공화당 재정부장을 지내면서 쌍용을 국내 10대 재벌로 키웠다.
하지만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겪으며 경영권이 중국 상하이차로 넘어갔다. 상하이차는 쌍차 인수 후 4년간 한 푼의 추가 투자 없이 기술만 중국 본사로 빼돌리다가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그리고 경영상의 이유로 대량 정리해고를 단행한 것이다. 나중에 드러났지만 상하이차는 회계장부를 조작해 경영위기를 과대 포장했다.
무자비한 경찰의 진압작전 생중계
이미 대량해고 방침에 대항해 노동자들은 2009년 5월 22일부터 파업에 돌입했다. 사측은 공장을 폐쇄하고 공권력과 용역을 동원했다. 물과 음식이 끊긴 상태에서 노동자들의 처절한 공장 점거농성이 지속됐다. 물과 음식마저 봉쇄한 정부의 조치에 민주노총을 비롯한 사회단체는 인권침해라며 반발했다. 7월 31일에는 국제엠네스티가 농성 노동자에게 물과 식량을 줄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찰과 용역의 무력진압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은 쇠파이프와 새총, 화염병으로 무장했다. 드디어 8월 4일 새벽, 경고방송과 함께 경찰 헬기에서 최루액이 발사되는 것으로 경찰의 진압이 시작됐다. 무자비한 경찰의 진압작전은 TV화면으로 거의 생중계됐다. 컨테이너에 경찰특공대를 태워 크레인으로 공장 옥상에 올리는, 바로 그해 초 용산참사에서 사용된 진압방식이었다.
일부 공장 옥상을 장악한 경찰은 8월 5일 본격적인 2차 진압작전에 돌입했다. 토끼몰이식 체포와 함께 도망가는 노조원의 목을 방패로 찍고, 손사래를 치는 노조원들에게 곤봉세례가 이어졌다. 노조원들은 볼트 새총과 화염병으로 대항했지만 테이저건으로 무장한 경찰특공대를 막을 순 없었다. 당시 조연오 경기지방경찰청장은 “정당하게 법 집행을 하는 경찰을 폭행하는 사람을 가만히 두느냐”고 강변했다.
쫓긴 노조원들은 인화물질이 많은 도장공장으로 몰렸다. 급기야 대형참사를 우려한 국가인권위원회가 진압 자제를 요청했다. 결국 공장 점거농성 77일 만에 노조는 해직자의 52%에 희망퇴직, 48%에는 무급휴직이라는 사측안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노조집행부 22명도 구속됐다. 사측은 ‘공장이 2교대 생산물량을 확보하는 즉시 무급휴직자, 영업점 전직자, 희망퇴직자 순으로 복직을 실시한다’고 약속했다. 이로써 쌍차사태는 일단락되는가 했다.
쌍차는 2011년 다시 인도 마힌드라 그룹으로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나름 정상화되는 듯했다. 하지만 복직은 이뤄지지 않았다. 해직자들은 약속대로 복직을 요구했다. 김득중 지부장 단식에 이어 김정우 지부장 단식까지 더해졌다. 그러니까 김득중 지부장은 이번이 두 번째 단식투쟁이다.
이후 해직 노동자들의 복직 투쟁은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치열했다. 평택공장 앞 희망텐트(2011년 12월), 서울 대한문 앞 천막농성(2012년 4월 5일~2013년 4월 5일), 평택 30m 송전탑 고공농성(2012년 11월 21일~2013년 5월 9일), 평택공장 70m 굴뚝농성(2014년 12월 13일~2015년 3월 23일), 인도 본사 원정 시위(2015년 10월) 등 갖가지 장기·고공·해외 농성이 이어졌다.
지지 및 성원도 이어졌다. ‘쌍용자동차 희생자 추모와 해고자 복직을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5대 종단 33인의 종교인들은 ‘죽음의 행렬을 멈추라’며 쌍차사태의 조속한 해결을 촉구했다. 특히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2009년 7월 24일 평택공장 앞에서 ‘쌍용차의 평화적 해결을 염원하는 평화미사’를 시작한 이래 대한문 앞에서 쌍용차 희생자 추모미사까지 무려 225일간 미사를 진행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미사는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을 거쳐 236차 굴뚝농성장 앞 미사로 이어지고 있다.
법적 투쟁도 계속했다. 노동자의 해고무효 소송과 사측의 손해배상 소송이 맞붙고 있다. 해고무효 확인 소송은 1심에서 원고 패소했으나 고법에서 ‘회사의 회계조작을 통한 경영위기 과장’을 이유로 해고 노동자가 승소했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13일 대법원은 다시 회사측 손을 들어줬다. 심지어 김득중 지부장이 ‘진보단일 노동자 후보’라는 명함을 들고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정치투쟁까지 시도했다.
결국 쌍차사태는 노동사태에 관한 정신적·신체적·법적·정치적·종교적 등 노동운동의 모든 것이 망라된 노동투쟁의 종합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가운데 해고자 28명이 자살하거나 지병 등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아 있는 해고자들도 심각한 정신적·신체적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올 초 재개된 노사협상 아직 진척 없어
이러한 상황에도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쌍용자동차 국정조사를 약속했다. 하지만 3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오히려 정부는 쌍차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집회에서 해산시키는 경찰관에게 항의하고(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죄) 차량 통행을 막았다(일반교통방해)는 이유로 민변 변호사들을 대거 기소했다. 그나마 법원이 변호사의 구속영장을 기각하고 재판에서도 변호사 손을 들어줬지만 법원도 예전과 달랐다. 현재 쌍차 노동자들에게는 수십억원의 손해배상 책임이 지워지고 가압류를 한 상태이다. 해고무효 소송을 진행하고 본인이 직접 기소됐던 권영국 변호사(민변 노동위원장)는 “사법부가 정말 국민의 기본권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믿을 만한 존재인가에 대해서 대단히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굴뚝농성을 계기로 올 1월 29일부터 회사측과 협상이 시작된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수십 차례 실무교섭이 있었지만 아직 합의된 것은 없다. 단식 중이던 김 지부장은 “논의는 조금씩 좁혀져가고 있다, 타결을 염두에 두고 있다”며 일말의 희망을 걸어보는 눈치다.
김정운 수석부지부장은 “1월 21일, 65개월 만에 공식으로 만나 해고자 복직, 희생자 유족 지원, 쌍차 정상화 방안 마련, 손배 가압류 철회 등 4대 의제에 합의했다”면서 “쌍차 문제가 정리해고, 갈등, 죽음 이미지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수석부지부장은 또 “그것은 해고자들이 복직함으로써 해결된다”면서 “조합원만 3400여명, 사무직까지 합해 5000명 규모의 회사로서 187명 복직은 많은 인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쌍용차 범국민대책위원회는 지난 10월 3일 민주노총과 시민·사회단체, 야당, 종교계, 세월호 참사 유족 등 1000여명이 참여한 ‘쌍용차 투쟁 승리를 위한 범국민대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하지만 정부는 오히려 일반해고 도입 등 해고를 쉽게 하고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노동개악안’을 내놓았다. 이는 노조가 요구하는 쌍차사태의 해결방안과 한참 거리가 멀다.
쌍용차 평택공장 정문은 건장한 체격의 경비원이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다. 공장 안 구호가 적힌 게시판에는 ‘원칙이 통하고 사람이 우선인 살아있는 현장!!’이라고 큼지막하게 써 있다. 단식 42일째 김득중 지부장은 인터뷰가 힘들다며 부축을 받으면서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썰렁한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정문 앞에는 찬바람이 불었다. 그 찬바람에 쌍용차동차 노조 깃발만 펄럭였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