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광복 70주년이자 미국 하원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된 지 8주년이 되는 해다. 고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자 박근혜 대통령의 여동생인 박근령씨가 일본 방송에 출연해 “우리가 위안부 여사님들을 더 잘 챙기지 않고 자꾸 일본만 타박하는 뉴스만 나간 것에 대해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언급해 화제가 됐지만, 그보다 더 진심으로 위안부 어르신을 챙긴 사람이 있다.
현재 미국 컬럼비아대학 교수이며, 워싱턴 정신대대책위원회 고문인 서옥자 교수는 레인 에반스 전 하원의원과 더불어 2007년 미국 의회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되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최근 <그대의 목소리가 되어>라는 책을 펴내 에반스 전 의원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이야기를 전한 서 교수는 경기 광주 나눔의 집에서 이 책의 출판기념회를 열고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책을 전해드리기도 했다. “에반스 의원도 세상을 떠났고 위안부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데, 할머니들이 한 분 한 분 세상을 떠나 안타깝다”고 말하는 서 교수를 만났다.
상담심리학 교수가 위안부 문제의 해결사가 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전 매사에 열정적이고 세상 일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한 후 캐세이퍼시픽 승무원, 하얏트 서울 홍보담당 등의 일을 하다 1987년에 미국으로 와서 뒤늦게 심리학과 상담학을 공부했습니다. 1992년 어느 날 아침에 신문을 보다 버지니아주 매클린에 있는 워싱턴연합감리교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회의가 열린다는 기사를 보고 홀린 듯 제 발로 그곳으로 가서 지켜봤습니다. 그날은 보기만 하고 돌아왔지만 그 모임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워싱턴 정신대대책위원회의 씨앗이었던 셈입니다. 그 무렵 김윤심 할머니가 미 의회에서 증언을 하기 위해 워싱턴에 오셨는데, 당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고 학교 아파트에서 넘어져 발목뼈를 다친 상황이었지만 제가 꼭 해야 할 일이라는 소명감에 양쪽에 목발을 짚고도 행사 기금 마련을 하느라 부지런히 돌아다녔습니다. 곧 사무총장을 맡게 됐고 2대 회장도 역임했습니다.”
2007년 7월 30일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된 데에는 레인 에반스 의원(1951∼2014·민주·일리노이주)의 역할이 컸죠. 1999년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미 의회 의사록에 처음으로 기록을 남긴 의원이기도 한데, 에반스 의원과는 어떻게 만났나요.
“그는 일본 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군대에 의해 강제로 납치돼 성노예로 희생된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이에 합당한 배상을 하라는 내용의 발언을 해서 미 의회 회의록에 기록을 남겼습니다. 또 이런 말도 했죠. ‘우리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을 위해 소리를 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정의롭고 올바른 일들을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힘을 그들에게 빌려줍시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행동에 옮기고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결국 사람들은 적의 말보다 친구의 침묵을 기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침묵을 지켜서는 안 됩니다….’ 그 발언을 한 날 정신대 대책위 행사에 그가 참석했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뒷정리를 하다 날씨가 추워 코트를 찾으러 소지품 보관소에 갔는데, 그 역시 코트를 찾고 있었습니다. 제가 먼저 가서 ‘의원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저희 일본군 위안부 일을 많이 도와달라’고 인사를 건넸죠. 그것이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그전까지는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 없는 미국 정치인 에반스 의원이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그는 국적을 초월한 휴머니스트였습니다. 조지타운 법대를 졸업한 인권 변호사 출신으로, 항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해 왔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복지나 권리 증진에 힘썼고, 베트남전 참전 미군들을 위한 고엽제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했습니다. 자기가 가진 돈도 항상 지인이나 이웃들에게 나눠줬고, 그런 것에서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성향이기에 국적을 초월해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것은 당연합니다.”
개인적 이념도 중요하지만 미 의회에서의 법안 통과는 또 다른 문제일 텐데요.
“에반스 의원과 친한 윌리엄 루핀스키 하원의원은 1998년 위안부 문제에 대해선 언급을 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이 2차 대전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보상해야 한다는 내용의 미 하원 126호 결의안을 발의한 적이 있습니다. 에반스 의원은 루핀스키 의원의 보좌관인 중국계 제이슨 타이와 친했는데, 그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영감을 불어넣어 준 것 같아요. 에반스 의원은 이들과 어울리면서 한국의 역사에 대해 알게 됐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는 의원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총 다섯 번 결의안을 냈습니다. 다섯 번째 결의안을 낸 2006년 헨리 하이드 하원 외교위원장에게 특별전화를 했는데, 그 덕분에 위안부 결의안이 하원 외교위를 통과할 수 있었죠. 그러나 본회의가 열리지 못한 채 회기가 끝나면서 아깝게도 폐기됐고요. 에반스 의원은 민주당, 하이드 외교위원장은 공화당 소속으로 당이 달랐지만, 두 사람은 일리노이주 출신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고 정의로운 분들이이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공감대가 컸던 것 같았습니다. 제가 처음 만났을 때 이미 파킨슨병을 앓고 있던 에반스 의원은 하이드 위원장에게 ‘나는 지병 때문에 얼마 안 있으면 의회를 떠날 사람이고, 당신도 얼마 안 있으면 역시 의회를 떠나야 하는 처지다. 내 마지막 간청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외교위에서 통과시켜주면 고맙겠다’라고 전했습니다. 그 간절함에 하이드 위원장은 위안부 결의안 지지로 돌아섰고, 결의안은 하원 외교위를 통과했죠. 하지만 2006년 말 공화당 주도의 하원에서 존 베이너 당시 공화당 원내총무(현 하원의장)는 위안부 결의안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 이 결의안을 본회의에 상정하지 않았어요. 위안부 결의안은 다시 2007년 하원에 상정돼 마침내 7월 30일 하원 전체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에반스 의원의 간절함과 열정이 아니었다면 통과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서 교수는 어떤 역할을 했나요.
“저는 당시 워싱턴 정신대대책위원회 회장을 맡아 미 의회 법안이 통과되도록 각종 자료를 모았으며, 그 무렵 미국을 방문했던 이용수 할머니를 우리 집에 모시고 있으면서 한국은 물론 각국에서 요구하는 인터뷰 요청을 다 받아들이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습니다. 또 미국의 각 대학을 돌면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실상을 알리는 강연과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일본 정부의 제대로 된 사과는 힘들 것 같았어요. 그래서 숨어 있는 역사, 감춰진 진실을 미국과 국제사회에 계속 알리면 그것이 진실이 될 거라는 소신이 있었습니다. 재미교포나 한국 유학생만이 아니라 미국 대학생들도 관심을 가졌는데, 한 학생은 하버드대학에서 강의를 들었다며 우리 위원회에 자원봉사를 하러 오기도 했습니다. 제가 좋아서 한 일이었지만 너무 정신적·육체적으로 무리를 해서 법안이 통과된 후 병원에 가니 고혈압, 고지혈증 등의 증세를 보였어요. 의사는 스트레스 탓이라며 당장 활동을 줄이라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정작 에반스 의원은 그 법안이 통과될 때 의회를 지키지 못했죠.
“예. 에반스 의원은 1996년 발병한 파킨슨병이 악화돼 2007년 1월 의정생활을 접었고, 위안부 결의안 추진 임무는 같은 민주당이고 일본계인 혼다 의원이 맡았습니다. 그래도 의원들은 에반스 의원에게 영예를 돌리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레인 에반스라는 이름이 의사당에 퍼질 때마다 솟구치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이 책에서도 밝혔듯 서 교수와 에반스 의원은 첫 만남 이후 연인 사이로 발전했습니다. ‘워싱턴 정계의 신데렐라’로 불릴 만큼 에반스 의원과 더불어 많은 활동을 했던데요.
“우리는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며 결혼하지 않은 채 살아온 전문직 독신, 또 위안부 피해자를 위해 함께 싸운다는 공통점으로 하나가 됐습니다. 미 하원 중진인 에반스 의원은 연말 백악관의 송년파티에 참석할 때도 여자친구 자격으로 저를 동행해 빌 클린턴 대통령 부부, 조지 W 부시 대통령 부부와 만날 수 있게 해줬습니다. 워낙 정의롭고 진실한 사람이라 당을 초월해 다른 의원들과도 교류가 많았는데, 각종 모임에도 같이 갔죠. 그의 파킨슨병이 깊어지면서 불편한 그의 몸을 씻기고 옷을 입히는 역할에서 운전기사 노릇까지도 했습니다. 그런데 2007년 에번스 의원이 은퇴 후 고향인 일리노이주로 내려간 뒤로는 그의 형제들과 간병인들 때문에 때때로 접근이 저지되는 상황을 겪으며 어려운 시기를 보냈죠. 파킨슨병으로 거동을 못했던 그는 정신이 맑아질 때 지인의 도움으로 제게 전화를 걸어왔지만 그의 형제들이 저와의 만남을 억지로 막았습니다.”
그토록 헌신적으로 도움을 주었는데 왜 그랬을까요.
“평생 독신을 고수했던 그가 제게 청혼을 했습니다. 당시엔 사랑하면 그뿐이라는 생각에 그의 청혼에 망설였어요. 그러다 병이 깊어져 의원직을 물러나 고향에 갔고, 가족에게 둘러싸여 있었죠. 가족은 미국 사람도 아닌 한국 여자가 혹시라도 그의 재산을 노리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에반스는 평소에도 동생들에게 자기 집을 주는 등 도움을 많이 줬거든요. 고향으로 돌아간 초기에는 그나마 통화를 했는데, 병이 깊어지면서 그의 형제들과 간병인 등이 법정후견인의 자격을 내세우며 내가 접근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어쩌다 정신이 맑아지면 전화를 걸어 보고 싶다, 와 달라고 했는데…. 작년 11월에 에반스 의원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의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이라 에반스같이 착한 사람은 하나님이 살려줄 거라고 믿었어요. 그를 만나지 못하는 8년 동안 그저 기도만 했답니다. 기도만 할 게 아니라 직접 달려가 그를 도왔어야 했고, 가족에게도 제 진정성을 알려줬다면 그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을 텐데요. 지금도 너무 후회되고 그를 떠올릴 때마다 눈물이 납니다.”
<그대의 목소리가 되어>란 책을 낸 이유는 뭔지요.
“에반스 의원과의 사랑을 기록한 책만은 아닙니다. 에반스 의원이 그토록 열정적으로 기여했던 위안부 문제가 이제는 미국 의회 안에서도 기류가 바뀌는 것 같아요. 올해 아베 일본 총리의 워싱턴 의회 연설 이후 미·일관계가 밀월기로 접어들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워싱턴 정신대대책위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구술기록집인 <들리나요> (Can You Hear Me) 영문판을 의회 각 사무실에 돌렸더니 미 의원들이 의외로 받지 않겠다고 해 깜짝 놀랐습니다. 이제 에반스 의원은 세상을 떠났지만 저라도 그의 목소리가 돼 위안부 문제는 물론 이 세상의 낮은 자들을 위해 그가 못다한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가 미국 의회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던 일을 이 책에 소개했고, 그 뜻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썼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나요.
“너무 의롭게 살다 외롭게 떠난 에반스 의원을 위한 추모재단을 만들고 싶습니다. 11월이 1주기인데, 그날을 계기로 구체적인 내용을 고민해봐야죠. 또 아직도 가슴에 한을 품은 채 살고 계신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일도 계속할 예정입니다.”
스튜어디스, 모델, 호텔 홍보직원, 교수, 정신대 대책위원회 회장 등 다양한 직업을 거친 서옥자 교수의 이력만큼이나 에반스 의원과의 첫 만남에서 작별까지가 너무 드라마틱하다. ‘영화 같은 이야기’라고 하자 서 교수는 ‘좋은 영화를 만들어주면 영화 속에서라도 그와의 아름다운 사랑을 추억하고 싶다’고 했다.
<글·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