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 5월에 정작 가장 힘든 것은 여성이다. 특히 요즘 여성들은 일과 가정을 병행하느라 속병이 든다.
국내 금융보험업계 최초의 이사회 의장 겸 회장인 손병옥 한국 푸르덴셜생명 회장은 여성 직장인들의 멘토로 불린다. WIN(Women in Innovation)이라는 단체를 이끌며 여직원들의 직장생활을 응원해주고, 사회공헌프로그램인 ‘Make a Wish’를 통해 난치병이나 장애 어린이들의 소원을 이뤄주는 일을 하는 등 공헌프로그램에 앞장서고 있다.
일 잘하는 여성, 똑똑한 여성은 많지만 지혜로운 여성은 참 드물고, 알파걸의 시대라고 해도 알파레이디로 성장하기는 더욱 어려운데, 직장에서도 ‘엄마’로 불리면서, 창업자나 낙하산도 아닌데 최고위직에 오른 비결이 궁금해 손 회장을 만났다.
2011년 국내 최초 금융회사 여성 경영자(CEO)로 2011년부터 푸르덴셜생명을 이끌다가 지난해 말 회장 겸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습니다. 금융보험업계에서는 항상 ‘최초로~’라는 수식어가 붙는 행보를 보였지만, 그래도 ‘이사회 의장’이라는 역할을 맡으면 각오나 소회가 남다를 텐데요.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대학을 졸업하던 1974년에 첫 직장생활을 시작해 네 번 정도의 경력단절을 겪으며 37년 만에 올라온 자리여서 더욱 그렇습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CEO도 경험했고, 나름 최선을 다해 일해서 이제는 좀 다르게 살고 싶어 그 자리를 내려놓고 물러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회사에서 전에 없던 회장 자리를 만들어 또 일을 하라고 하네요. 이사회 의장이 하는 일은 이사회를 이끌며 경영진에 조언하고, 사회공헌재단인 ‘Make a Wish’의 공헌프로그램 등 대외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확실히 사장 자리보다는 정신적 여유가 있습니다.”
요즘 여성들은 결혼은 선택, 직장이 필수일 정도로 사회생활을 우선으로 하고 남성들처럼 ‘출세’도 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정작 승진이나 출세는커녕 취업조차 어렵습니다. 요즘 기업에서 선호하는 인재상은 어떤 유형입니까.
“저는 전공이 HR, 인력관리라서 여성만이 아니라 직원들의 선발부터 훈련, 승진과 인사고과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과거에 제가 후배 신입사원들을 선발할 때는 남자사원은 ‘내 사윗감으로는 어떤가’ 또 여자사원은 ‘며느리감으로 알맞은가’ 등의 기준으로 뽑았습니다. 학벌 등 스펙과 인성과 태도 등을 주력해서 봤죠. 지금은 직장만이 아니라 세상이 너무 급속도로 변화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해결능력, 소통능력과 창의력을 우선으로 봅니다. 쉽게 말하면 ‘전사(warrior)’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맑고 투명한 도덕성도 중요하고 책임감도 중요하죠. 하지만 워낙 변수가 많고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는 전반적인 상황을 잘 분석하고 그 위기에 맞게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필수입니다.
그런데 여성의 경우 평생 일할 생각은 있으면서도 이런 문제해결능력은 별로 갖추려 하지 않습니다. 천편일률적이고 상식적인 해결방법만으로는 안 되고 기업이나 상사가 뭔가 묻거나 제안할 때 즉시 응답할 능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의사소통능력, 창의력도 필요하죠. 문제해결능력은 공부만 잘한다고 얻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일과 직장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잘 파악하고 있을 때 갖춰집니다.”
WIN이라는 조직을 이끌며 푸르덴셜생명만이 아니라 한국 여성 직장인들의 멘토 역할을 하십니다. 직장여성들이 피부로 절감하는 가장 큰 애로사항은 무엇이던가요.
“개인마다 어려움이 다를 겁니다. 회사에서 어떤 지위에 있나, 결혼과 육아 등 가정환경은 어떤가에 따라 각각 고충이 다르겠죠. 그런데 여전히 직장여성들에게는 출산과 양육의 갈등이 가장 큰 애로사항입니다. 우리는 그걸 네버엔딩스토리라고 부릅니다. 저도 딸만 둘인데 어떻게 제가 처음에 직장생활을 하며 겪었던 이 문제가 30여년이 흘렀는데 해결은커녕 더 어려워질까 가슴이 아픕니다. 제 또래의 여성들은 그래도 친정어머니, 시어머니, 혹은 언니 등 다른 여성들이 도와줘서 육아문제를 그럭저럭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머니들 세대도 각자 자신의 취미활동이나 건강문제 등으로 딸이나 며느리를 위해 손주들을 봐주려 하지 않습니다. 외동딸이 대부분이라 도와줄 착한 친정언니도 드물고요. 또 사회적으로는 어린이집 등 보육시설이 엄청나게 늘어났죠. 2000년에 비해 2013년은 2배 정도이니 수적으로는 늘어났지만 국·공립 어린이집은 5~10%밖에 안 됩니다. 매스컴에서는 연일 어린이집에서 학대받는 아이들의 모습이 소개됩니다.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아이를 맡긴 어머니들에게는 너무 가슴 아픈 일이죠. 직장 내 보육시설 등도 너무 소수여서 여전히 작장맘들의 고민과 갈등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또 다른 애로사항은 양성평등사회라고 해도 여성들은 승진에서 공평하게 평가받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요즘 신입사원들의 40% 정도가 여성입니다. 관리나 중간관리직 여성은 6%, 여성 임원은 2%, 여성 CEO는 1% 정도입니다. 물론 현재 여성 임원들은 여성 직원이 10%도 안 되던 시절에 들어와 버틴 이들이니 앞으로는 여성 임원이 크게 늘 것으로 기대합니다만, 여전히 유리천장을 느낄 겁니다. 의사나 법조인 등 전문직 여성들도 엄청나게 늘었지만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가 너무 힘들다고 합니다.
권은희 새누리당 의원이 대표발의를 해서 대기업에서 30%의 여성 임원을 요구하는 법안을 내놓기도 했고, 어떤 조직에서도 30% 정도는 여성 임원으로 구성해야 한다는 여성 쿼터제도 논의되고 있습니다만 아직은 요원합니다. 여성 중견직원 등 여성인재풀도 드문 상황에서 무조건 ‘여성이니 임원을 시켜라’ 하는 것도 성차별이거든요.”
그렇다고 직장여성들이 ‘네버엔딩스토리’ 노래만 부르거나 ‘세상이 이렇다’고 한숨만 쉴 수는 없을 텐데요. 해결방안은 없을까요. .
“여성-기업-국가가 3각 편대처럼 같이 해결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우선 여성 스스로의 인식과 태도 변화가 우선입니다. 조금 더 전문적인 실력을 갖춰야 하고, 쉽게 포기하지 말고, 조직 전체를 아우르는 넓은 안목을 갖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여성들은 늘 일과 가정의 균형만 신경쓰고 자신의 일에만 함몰돼서 정작 회사나 조직의 문제에는 소홀합니다. 회사가 적자나 나거나 다른 위기가 닥쳤을 때 남자 직원들은 ‘우리 회사 어떻게 되는 거야’ ‘지금 어떤 방법을 써야 할까’ 등의 고민을 하고 술자리에서도 걱정하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여직원들은 ‘뭐 나는 내 일만 잘하면 그만이야’ ‘회사가 망하면 퇴직금 챙겨 나가지 뭐’라는 안일한 의식을 가진 이들이 많더군요. 임원이나 사장이 보기엔 온도 차이가 매우 크게 느껴집니다.”
한국형 직장에서 여성이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위기사태인지 아닌지 잘 알기가 어렵습니다. 여전히 중요한 정보는 술자리나 골프모임, 혹은 흡연실에서 남성들끼리 나누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증권가 찌라시나 뉴스에서 자기 조직의 흐름이나 문제를 아는 경우도 있으니 그저 맡은 일에 충실하자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여전히 한국 회사에서는 방과후 교실처럼 퇴근 후 술자리 모임이나 회식에서 고급정보가 오가고 남자들끼리 사우나에서 흉금을 털어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 말은 사내 정치를 하라거나 자기 업무보다 전체 조직만 생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이고, 그 일이 우리 조직에서 어떤 부분을 차지하고 영향력을 미치는가, 우리 회사가 좀 더 발전하는 데 나는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으며, 문제점에는 어떤 개선점이 있는가를 생각하고 파악해 보라는 것입니다. 제가 활동하는 WIN은 처음에 기업의 여성 임원들을 위한 모임으로 시작했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기업의 별’이라는 임원에 오른 WIN 회원들은 여성 후배들이 직장에서 더 큰 역할을 맡아 차세대 리더가 될 수 있도록 콘퍼런스도 열고 소규모 모임도 열면서 선후배들끼리 직장생활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고 객관적 평가와 조언을 얻는 자리를 마련해 왔습니다. 이 자리에서도 항상 더 넓게, 더 크게 보라고 강조합니다.”
결국 육아나 승진 문제로 고민하다 좌절한 여성들은 직장을 그만둡니다. 그리고 아이가 커서 시간적 여유가 생기거나 경제적 자립이 필요할 경우 다시 재취업을 하려고 합니다. 여성인재 활용의 걸림돌도 경력단절이고요. 손 회장도 경력단절을 네 번이나 경험했다는데, 정부에서 시행하는 경단녀(경력단절 여성)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별로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같지 않습니다. 기업들의 인식 전환이나 적극적 구인 등은 힘들까요.
“한국에서 15~59세 여성 중 기혼여성인 970만명 가운데 195만명이 경력단절 여성입니다. 다시 재취업을 해도 M자형으로 전 직장보다 열악한 환경이거나 일용계약직 등으로 지위도 낮아집니다. 지난해 숙명여대와 전성철씨가 이끄는 IGM 세계경영연구원과 더불어 경력단절 여성들을 위한 교육과 직장찾기 프로그램을 운영했습니다. 6개월간 교육을 받아 취업도 시켰는데 중간에 스스로 포기하는 이들이 많았어요. 그만큼 여성들은 남성보다 직장 찾기가 간절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더군요. 아무도 우리에게 직장을 찾아주거나 좋은 곳으로 데려다주지 않습니다. 자신이 자격증을 따는 등 일할 준비와 자세를 갖추고 있어야 하고 지인들에게 문의를 하건, 구직센터를 찾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여성들은 고비마다 ‘직장 그만둘까?’란 말을 너무 자주합니다. 후배들을 만나면 항상 저는 견디고 버티라고 강조하고 ‘포기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를 세 번 외치자고 합니다. 손 내밀고 도와줄 멘토들을 찾아보는 것도 중요하죠.”
그렇게 잘 버텨 부장까지는 올라가도 임원은 꿈꾸기조차 어렵습니다. 여성들이 임원이 되려면 어떤 준비가 필요한가요.
“우선은 자기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죠. 자기 분야의 일을 잘하면서 내것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아까도 강조했듯 전체를 볼 수 있는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회사나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는 곳이지 친목단체가 아닙니다. 요즘처럼 저금리시대에 보험사가 어려운데 회의석상이 아니라 티타임에서도 자신이나 자기팀의 애로점만 말하는 것보다 ‘저금리시대에 알맞은 새로운 상품을 개발해야 하겠죠?’ 등의 이야기를 해주는 직원을 임원으로 선택하지 않을까요. 또 다른 보직, 지방 발령 등도 회사에서 주는 불이익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승진, 성공, 출세를 하려면 자신도 기꺼이 헌신하고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저는 항상 후배들에게 ‘사장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노력하라’는 말을 해줍니다. 내가 사장이라면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할까, 내가 사장이라면 어떤 태도를 보일까를 생각하고 늘 몸과 마음에 익히면 남들이 보기에도 ‘준비된 사장’으로 보여 임원감으로 여깁니다.”
인터뷰 기사마다 치열하게 살았다를 강조하셨는데, 직업적으로는 큰 성과를 거두셨지만 자신을 혹사(?)시켰다는 후회는 없으신지요.
“늘 열심히 살았죠. 최선을 다해 몸은 힘들었어도 성취감과 희열이 더 커서 충분히 보람있었습니다. 하지만 2007년에 남편(이석영 전 중소기업청장)이 세상을 떠난 후 한 번뿐인 삶이 매우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매순간 낭비하지 않고 더 아름답게 살려고 합니다. 제가 사장이 된 후 2014년에 그만두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사장이 될 때 여자한테 사장을 시켜줬더니 회사 망쳤다는 소리는 듣지 말자며 죽기살기로 일해서 실적이 좋았습니다. 마무리가 아름다우니 후회가 없어요. 회장까지 시켜주니 감사하죠. 요즘은 여유롭게 모닝커피도 즐기고, 점심 일찍 먹고 갤러리도 가보고, 야구경기도 관람하고 제2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마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지금처럼 살 것 같습니다. 정말 미친 듯 신나서 일했고 원한 것을 이뤘기에 후회는 없습니다.”
손병옥 회장을 인터뷰하며 ‘가장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란 괴테의 말이 떠올랐다. 부드럽고 우아한 태도, 소녀 같은 미소, 그리고 어머니처럼 주변 사람을 아우르는 넉넉함…. 그런 모습을 갖기까지 피눈물도 흘리고 가슴에 비수도 많이 꽂혔겠지만 명예남성이 아니라 진성한 여성으로도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에 더 멋져 보였다. 직장이나 세상을 원망하기 전에 나부터 열심히 일하자고 스스로 옷깃을 여미게 했다.
<글·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