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의 한글 표기 왜 이리 어려운 거야

2015.02.17

국립국어원이 제정한 표준 외래어 표기법에 의해 ‘성룡’이 하루아침에 ‘청룽’ 되고, ‘주윤발’이 ‘저우룬파’ 되고, ‘이소룡’이 ‘리샤오룽’ 되는 변고를 맞이한 뒤로 나는 이 표준 표기법으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되었다.

얼마 전 스파이크 존즈의 영화 <그녀>(Her)에 대한 글을 쓸 일이 있었다. 그런데 남녀 주인공의 이름이 자꾸 눈에 걸렸다. 왜냐. 이 영화의 남주인공 이름은 ‘Theodore’, 그의 컴퓨터 오퍼레이팅 시스템인 여주인공의 이름은 ‘Samantha’인데, 눈치채셨겠지만 남녀 주인공 이름 모두에 ‘th’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아시다시피 ‘th’는 ‘f’와 함께 영어의 한글 표기를 상당히 애매하고도 난처하게 만드는 양대 산맥이다.

뭐, 다들 그러는 것처럼 ‘Theodore’를 ‘테오도르’, ‘Samantha’를 ‘사만다’라고 적으면 그만이지, 라고 생각하며 꾸역꾸역 일을 해나가고 있는데 계속해서 뭔가가 뒷덜미를 잡아당긴다. 이 영화에 딸려 온 자막이 그 원인이었다. 이 자막에서는 ‘Theodore’를 ‘시어도어’, 그리고 ‘Samantha’를 ‘서맨더’로 적고 있었는데, 이 표기를 자꾸 보다 보니 ‘테오도르’니 ‘사만다’니 하는 표기가 점점 이상하고 부자연스러워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긴 그렇잖은가. 영미권 사람들 중 그 누가 ‘테오도르’를 듣고 ‘Theodore’를, ‘사만다’를 듣고 ‘Samantha’를 연상해내겠는가.

서울 명동거리에서 볼 수 있는 외국어 간판과 한국어 표기들. | 김창길 기자

서울 명동거리에서 볼 수 있는 외국어 간판과 한국어 표기들. | 김창길 기자

더구나 영화가 진행되면서 남주인공의 친구들이 그를 ‘Theo’라는 애칭으로 부르기 시작하자 상황은 점점 점입가경의 형국으로 흐른다. 자막에서는 이를 ‘시오’라고 적어 놓았는데, 이건 또 아니다 싶었던 것이다. ‘시어도어’를 줄인 애칭이라면 ‘시오’ 아닌 ‘시어’로 하는 게 옳다. 더구나 ‘시오’보다는 ‘씨오’ 또는 ‘씨어’가 본래 발음에 더 가깝지 않나? 그렇게 따지면 애초에 ‘시어도어’라는 표기 역시 함량 미달이 아닐까. 최소한 ‘씨어돌’쯤은 돼야 실제 발음에 근접한 표기 아닐까. 그렇담 ‘Samantha’의 올바른 표기는 뭐지? ‘서맨떠?’ 등등등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표기법 셀프 논란으로 인해 나는 급격히 골룸화되어갔던 바, 아아 이래선 안 돼, 결국 나는 자막을 끈 채 작업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작업을 마친 뒤에도 이 문제는 계속 나의 뒷덜미에 들러붙어 있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국립국어원이 제정한 표준 외래어 표기법이 있잖어!’라고 질타하실 분 계실 줄로 안다. 물론 안다. 그런 게 있긴 하다. 하지만 이 표기법에 의해 ‘성룡’이 하루아침에 ‘청룽’ 되고, ‘주윤발’이 ‘저우룬파’ 되고, ‘이소룡’이 ‘리샤오룽’ 되는 변고를 맞이한 뒤로 나는 이 표준 표기법으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 표기법이 주창한 ‘현지 발음 그대로’라는 고압적이고도 난감한 원칙에 의해 죄 없는 ‘짜장면’까지도 ‘자장면’ 되는 ‘자증’스러운 일까지 벌어지지 않았던가. 그 암울했던 시기, 그 얼마나 많은 아나운서들이 점심시간 방송국 인근 중국집에서 “여기 짜장면 곱빼기요!”를 목 놓아 부르짖었던가!

‘짜장면’은 결국 ‘짜장면’으로 돌아와
결국 ‘짜장면’은 ‘짜장면’으로 돌아왔지만, 각종 추억의 홍콩 스타들은 여전히 제 이름 되찾지 못한 채 점차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는 바, 이들의 노쇠를 내심 반겨 환영할 단체는 전 세계를 통틀어 한국의 국립국어원이 유일하지 않을까 추정해보는 가운데, 가끔씩 피치 못하게 이들을 언급할 때마다 ‘이소룡’(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표기로는 리샤오룽) 등의 번거롭고도 애처로운 표기를 해야만 하는 각급 언론계 및 문필업 종사자 여러분께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위로의 말씀 전한다.

그런데 이 ‘현지 발음에 충실’한 표기법이 그 외국어 실제로 쓰는 외국인들에게는 편리하고도 행복한 것인가 하면 그 또한 아니어서, 예를 들면 나의 지인 중 ‘Robert’라는 이름의 미국인은 ‘로버트’라는 한글 표기를 한국 생활 15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납득하지 못한 채, 자신의 이름을 ‘롸벗’이라고 적고 있는 등등 외국인들 역시 표준 외래어 표기법에 그닥 행복해하는 것 같지 않다.

하여 제안 드린다. 국립국어원은 그 넘치는 에너지를 생활 속에서 정말 필요한 대사들의 표준을 만드는 쪽으로 돌려주었으면 한다. 예컨대 ‘전화 끊을 때의 인사말 표준안’ 같은 것 말이다.

아니, 농담이 아니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사실 지금 이 시각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전화 통화를 마칠 때 깔끔하고도 무난한 마무리 멘트를 찾지 못하여 어물쩍 뭉개고 넘어가기의 어두운 뒷골목을 방황하고 있다. 물론 “들어가세요~” 같은 멘트가 있긴 하다만, 결국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들어가다니 대체 어디로? 전화기 속으로? 아님 광대한 정보통신의 네트워크 속으로?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처럼? 그런데 통화 종료와 동시에 ‘들어간다’면, 통화 시작 때는 어딘가에서 나온다는 것인가? 우리는 대체 어디에서 나와, 어디로 들어가는 것인가?, 라는 존재론적 질문으로까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 “들어가세요~”의 문제를 회피하고자, 우리는 한편으로는 “어~잉”이라든가 “네에~”라든가 등등의 성인용 옹알이를 활용하기도 한다만, 이 또한 친한 사이 또는 편한 사이 아니면 쉽게 사용할 수 없다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더구나 이는 결국 또 다른 어물쩍 넘기기일 뿐이 아닌가.

“이만 끊겠습니다”가 있지 않냐고? 뭐, 흠, 그래, 있긴 하다…. 그 자체로는 지극히 보편타당한 멘트이다만, 그래도 그건 좀….

그럼 대체 어쩌라고!

국립국어원이 정말로 해야 할 일
바로 이런 대목이 국립국어원 같은 기관이 등장해야 할 시점이라고 본다. 국립국어원이 적절한 연구 및 논의를 거쳐 서너 가지의 안을 뽑아주면, 그 중 대다수의 선택을 받는 안이 반드시 하나쯤은 나올 것이고, 그러면 그 안을 표준안으로 최종 채택하여 공포하면 되는 것이다. 취향에 따라 제2안, 제3안을 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인데, 뭐, 그건 그대로 좋겠다. 여기에서 “아냐, 나머지는 모두 오답이야! 1등을 한 인사말만 써야 돼!”라고 하면 정말이지 반칙이다. 하물며 수능문제에도 복수 정답이 존재하는 마당에, 살아 움직이는 문화생명체인 언어에 불변의 정답 따위가 있을 수 있겠는가.

아아, 생각만 해도 좋다. 가능하다면 전화 할 일 많아지는 설날 전에 이런 표준안이 발표된다면 좋겠다만, 아무래도 그건 너무 성급한 처사겠지? 올 추석까지는 해보자. ‘짜장면’의 ‘자장면’화는 결국 실패했지만, 이거라면 해낼 수 있다. 힘내자. 국립국어원.

[그나저나] 유세나 연설 때 문장 마무리로 “여러부운~”을 붙이는 정치인 어법을 최초로 개발한 사람은 누굴까? 이거야말로 한국에서 유일하게 여야좌우보수진보 초월하여 자연발생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진 사안 같은데.

<한동원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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