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생활 50년 남진 “옛날엔 가수 남진의 노래 지금은 인간 김남진의 노래”

글·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2014.12.02

연예인과 인터뷰를 할 때 약속장소에 먼저 나오는 연예인은 많지 않다. 실은 거의 없다. 매니저, 스타일리스트 등에게 둘러싸여 주인공처럼 나타나는 게 연예계의 정석이다. 그는 달랐다. 기자보다도 먼저 약속장소에 나와 있었다. 올해 가요생활 50년을 맞은 칠순의 가수 남진.

1964년 ‘서울 플레이보이’로 데뷔했다. 1965년 ‘울려고 내가 왔나’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대중스타로 단숨에 자리매김한 남진은 이후 50년간 100여장의 앨범을 발매하며 왕성하게 활동했다. 지난 10월 25일에는 트로트 가수로는 최초로 서울 올림픽공원 내 체조경기장에서 당일 2회 연속 콘서트를 열어 아이돌 가수 못지않은 인기와 체력을 자랑했다. 콘서트와 연말 디너쇼 등으로 아이돌 스타만큼 스케줄이 많다는 데도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역시 50년 가수의 품격은 숨길 수 없다. 50년 직장생활은커녕 50세 넘어서까지 직장에 다니면 ‘도둑’으로 불리는 요즘, 그 무한경쟁의 연예계에서 톱스타로 50년을 버틴 저력이 궁금했다.

[유인경이 만난 사람]가요생활 50년 남진 “옛날엔 가수 남진의 노래 지금은 인간 김남진의 노래”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꼭 50주년이 아니더라도 가수들은 이즈음이 가장 바쁠 때입니다. 연말이 가까워 오면 행사도 많고 콘서트도 준비해야 하고… 노래만이 아니라 춤 등을 연습해야 하기 때문에 체력도 다져야 하거든요. 제 경우 한 번 대형 콘서트를 하면 3~4시간은 보통인 데다 이 나이에도 춤추며 하는 노래가 많아 운동도 하고 발성연습도 하느라 바쁩니다.”

50년이 지나도 여전히 ‘스타’인 비결은 뭔지요.
“기본적으로 운이 좋았습니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특히 경쟁이 치열한 연예계에서 가수나 배우 등은 정말 뼈를 깎는 노력을 하지요. 영광도 많았고 파도에 휩쓸린 적도 있었지만 저는 운이 따랐습니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닌데 참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저는 작사·작곡을 하는 능력이 없는데 훌륭한 분들이 멋진 곡을 만들어주셨고, 제작자나 프로듀서 등의 도움도 많이 받았지요. 아직도 초기에 인연을 맺은 분들과 교류하고 있습니다.”

인연을 맺긴 쉽지만 계속 유지하기는 어려운데 인맥은 어떻게 관리합니까.
“기본을 지키면 됩니다. 오늘처럼 저는 약속시간을 절대 어기지 않아요. 대개는 일찍 나가 있어요. 또 어떤 상황이나 어느 무대에서도 제 책임은 다하려 합니다. 독특한 개성이 넘치는 연예계에서도 사회의 기본은 다 똑같습니다. 인사 잘하고, 약속을 잘 지키고, 서로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어야 오래 관계를 지속할 수 있지요.”

그런 ‘기본’은 아마 부모님의 영향이 클 것 같은데요.
“그렇죠. 우리 어머님은 교사 출신이신데 제가 서른 살 때도 버릇없다며 뺨을 때리셨어요. 저를 정말 사랑하셨지만 그만큼 엄격하셨습니다. 아버님은 목포신문 사장이셨죠. 마음껏 자유를 누렸지만 항상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 자라서 사회생활의 기본틀을 배운 것 같습니다.”

나이를 먹으니 예전에 부르고 듣던 노래도 다르게 느껴지고 가사가 한 마디, 한 마디 들립니다. 그동안 1000여곡의 노래를 부르셨는데, 같은 노래도 나이에 따라 느낌이 다르지 않습니까.
“전혀 다릅니다. 전 원래 가수가 아니라 영화배우가 꿈이었습니다. 노래도 팝송과 록을 주로 불렀죠. 친구 따라 간 행사에서 팝송을 불렀는데 재능이 있었는지 가수 데뷔를 제안받아 우연히 가수가 되었습니다.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는 제가 스물두 살에 처음 부른 노래인데 그 노래를 수천 번, 아니 수만 번쯤 불렀을 겁니다. 젊을 때는 ‘마음은 무슨 마음, 여자는 얼굴이 예뻐야지’라고 생각하며 습관적으로 불렀죠. 가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았고 정반대로 해석했습니다. 앵무새처럼, 의미도 모르고 부르니 노래를 부르는 진정한 즐거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맞아, 정말 마음이 중요해’라며 작사·작곡가들이 그 노래를 만든 의미를 깨닫고 온 마음으로 음미하며 부릅니다. 이제야 노래를 부르는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그건 제가 노력한 것이 아니라 세월의 힘입니다. 이제 가수 남진이 아니라 인간 김남진(그의 본명)이 노래를 즐기며 부릅니다.”

배우가 꿈이고 팝과 록을 좋아했는데 뽕짝으로 불리는 트로트 가수가 된 것에 후회는 없습니까.
“처음엔 몸에 안 맞는 옷처럼 싫었죠. 첫 데뷔곡도 ‘서울 플레이보이’라는 발랄한 노래였는데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에 제가 원해서 부른 노래가 ‘연애 0번지’란 곡인데 제목이 퇴폐적이라고 심의에 걸려 히트하지 못했습니다. 너무 충격받고 상처를 받다 ‘울려고 내가 왔나’를 취입했죠. 그런데 유행가란 말 그대로 흘러가는 노래, 그 시대의 아픔과 사랑을 담은 노래라는 자부심을 이제야 느껴요. 초기 히트곡들이 ‘울려고 내가 왔나’ ‘님과 함께’인데 60년대 당시의 산업화 사회를 표현한 노래들입니다. ‘울려고 내가 왔나’는 고향을 떠나 상경해 공장 등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애환을 담았죠. 정작 그 노래를 부른 저는 의미를 몰랐습니다. 야간열차 타고 상경해 고단한 삶에 눈물 흘리는 도시 노동자의 심정을 모르면서도 제가 시대의 애환을 노래한 거죠. ‘님과 함께’도 우리가 정말 고향땅에 멋진 집 짓고 부모님 모시고 잘 살아보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자는 시대적 분위기를 노래한 것입니다. 그때 그 노래가 나와서 지금까지도 모든 국민들에게 힘이 되고, 그래서 정말 소중하고 가장 국민가요라고 할 수 있는 곡이 되었습니다. 유행가 가수라는 제 직업에 후회보다는 자부심을 느낍니다.”

가요계에서는 남진 선생님의 팬들을 최초의 ‘오빠부대’라고 하더군요.
“아직도 저는 1971년 시민회관, 현재 세종문화회관에서 한 제 첫 단독 리사이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해병대에서 3년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데뷔하는 마음으로 마련한 공연이었죠. 공백기간 중 제가 잊혀지지는 않았는지, 팬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불안하고 초조했는데 첫 노래로 군에서 돌아왔다는 의미로 ‘전선야곡’을 부른 후 불이 서서히 켜지는데 무대가 3층까지 꽉 차고 곧이어 ‘오빠’란 함성이 들립디다. 소녀팬들이 저를 기다려줬고, 몇 시간 동안 줄을 서서 공연을 보러 온 겁니다. 가슴이 벅차고 소름이 끼칠 정도의 감동이었고, 대한민국 오빠부대의 첫 출현이었습니다. 그때 ‘오빠!’라고 소리치던 아가씨들이 지금은 60대 아줌마,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팬클럽이 유지되고 있어요.”

[유인경이 만난 사람]가요생활 50년 남진 “옛날엔 가수 남진의 노래 지금은 인간 김남진의 노래”

초년 출세는 불행의 한 요소라는데 너무 일찍 성공한 것이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나요.
“첫 데뷔부터 승승장구한 것은 아닙니다. 처음 레코드판 취입도 혼자 한 것이 아니라 당시 톱스타였던 성재희씨 등이 취입한 판에 마지막 노래로 실렸고, 앨범 재킷에도 손톱 만한 크기로 사진이 나왔어요. 그런데 고난이 축복이라고 당시 부른 ‘영산강’이란 노래가 대중들에게 사랑받으면서 도매상들의 요구로 그걸 타이틀곡으로 바꾼 새 앨범이 나왔습니다. ‘울려고 내가 왔나’도 부산에서 히트해 서울로 상경(?)한 경우고요. 그래도 어린 나이에 사회생활 경험도 없이 인기와 부를 얻었으니 세상을 보는 데 신중함이 부족했죠. 자만심, 교만함도 생기니 자연 실수가 따르게 되고요. 그럴 때 따끔하게 지적하고 야단쳐주는 어른이나 친구가 없었다는 것이 좀 아쉽습니다. 돌이켜보면 노래를 부르는 자세나 연예생활의 태도가 허점투성이였죠. 덕분에 다른 상처와 아픔도 많이 겪으며 성숙했습니다.”

아마 가수 중에 가장 많은 스캔들과 오해를 받은 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데뷔곡의 이름처럼 플레이보이라는 소문, 동료가수 나훈아 피습사건 연루설 등등.
“뭐 플레이보이라는 말은 사실입니다. 여유롭고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라 잘 놀고 운동·친구·음악·여자들을 좋아했으니 플레이보이가 맞죠. 제가 중학교 때부터 여학생과 연애하고 오토바이를 탔으니까요. 그런데 나훈아씨가 세종문화회관 공연 당시에 제가 보낸 자객에 의해 칼로 얼굴에 상처를 입었다는 소문은 정말 사실이 아닙니다. 그 범인은 저와 같은 해병대 출신으로 저를 먼저 찾아와 해치려다 실패하고 나훈아씨에게 그런 짓을 한 겁니다. 게다가 그 가해자는 우리 고향집에 불을 질러 가보와 같은 우리 할아버지 사진까지 다 태워버렸습니다. 교도소에서 출소한 뒤에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언론에서 저와 나훈아씨를 숙명의 라이벌로 규정했지만 제게는 적이 아니라 가장 자극을 주는 훌륭한 동료라고 생각합니다. 숱한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결국 시간이 흐르면 진실이 밝혀지더군요.”

가수생활을 하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결혼하고 미국에서 생활하다 귀국했을 때였습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었죠. KBS PD와 만나 프로그램 출연 약속을 했는데 방송 일주일 전에 ‘프로가 바뀌었다’며 나오지 말라더군요. 제가 마약이나 패륜 등 사회윤리적으로 죄를 지었다면 모를까 대체 방송 출연을 거부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습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알아보니 고위층이 파티 석상에서 제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저 친구는 지금도 많이 나오나?’라고 한 말을 듣고 밑에 사람이 과잉충성을 한 겁니다. 일반인들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갈 거예요. 전두환 대통령 닮은 탤런트 박용식씨가 한때 활동을 못한 것도 그런 맥락이죠. 그런 세상이 싫어져 고향 목포에 내려가 1년 정도 쉬었습니다. 그러다 전라도, 특히 광주 사람들을 달랠 필요가 있어서인지 다시 방송국 간부가 출연해달라고 부탁해서 복귀했습니다.”

초등학교도 서울에서 다녔는데 왜 여전히 전라도 사투리를 ‘징하게’ 씁니까.
“제 고향이 전라도 목포라는 것이 참 자랑스러워서입니다. 과거엔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기꾼, 깡패, 식모 등이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것으로 묘사될 만큼 편견이 많았죠. 그래서 출세한 이후 공식장소에서도 저는 고향말을 씁니다. 제가 어릴 때 김대중 대통령, 김상현 전 의원 등이 우리집에 드나들고 훌륭한 동향인도 많아 저는 전라도 출신임을 절대 숨기지 않습니다.”

정치권에서도 제안을 하지 않던가요.
“평민당 시절에 제안받았지만 거절했습니다. 정치는 제 체질이 아니니까요. 다만 연예협회 이사도 하고 가요계 45년 만에 처음으로 가수협회를 만들어 가수들의 단결과 권익을 위한 일에 앞장섰죠. 노래는 가수가 부르지만 저작권료나 음반판매비는 거의 못 받습니다. 또 방송 출연료도 연기자에 비해 너무 차이가 나서 투쟁이 필요했어요. 그런데 같이 모여 연기하는 배우나 코미디언들과 달리 가수는 혼자 활동하기 때문에 단합이 잘 안 됩니다.”

외모는 중년으로 보이지만 그래도 70세인데 나이를 느끼십니까.
“가끔 세월에게 묻습니다. 왜 그리 혼자 빨리 가냐고, 마음도 같이 가자고. 인생도 노래도 지금이 가장 힘들어요. 연륜과 경험을 헛되이 하지 않고 어른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칠순쯤 되면 참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절대 아닙니다. 딸도 시집보내면 그만이 아니라 사위도 챙겨야 하고 손주도 봐야 하고…. 어느 자리에서나 ‘나잇값’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피로합니다.”

그래도 50주년 기자회견을 하면서 이제부터 10년을 전성기로 보내겠다고 선언했던데요.
“그건 기자나 팬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제게 던지는 말, 저와의 싸움을 선언한 것입니다. 70세부터 진정한 자신과의 승부를 보여주며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살아볼수록 인생은 참 오묘한 것 같아요. 1981년에 취입한 ‘빈잔’이 처음엔 전혀 반응이 없다가 슬슬 바람이 불더니 30년이 지난 지금 임재범, 윤도현 등 후배들에 의해 불려져 다시 히트를 하기도 하고, 50여년 전 ‘님과 함께’가 요즘 방송프로 제목으로도 사용되고…. 과거엔 그저 남이 만들어준 노래에 제 목소리를 담았다면 이제는 제가 온 마음으로 노래를 부릅니다. 그래서 매 순간이 너무 감사하고 너무 애틋합니다.”

느끼한 눈빛에 엘비스 프레슬리 옷차림으로 춤을 추던 청년 남진은 이제 잘 익은 포도주처럼 농후한 삶의 향기를 풍긴다. 웃음과 성공만이 아니라 눈물과 좌절도 섞어 스스로를 잘 빚어낸 그는 그래서 ‘영원한 오빠’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다.

<글·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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