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오키나와 문학의 보편성

2014.11.04

오키나와 작가들은 작품을 쓰는 과정에서 ‘국가의 기억’과 ‘민중의 기억’의 불일치를 경험하며, ‘일본의 기억’과 ‘오키나와의 기억’이 상당 부분 달랐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근현대 역사의 기억을 떠올릴 때도, 불가피하게 중국, 일본, 미국이라는 대국과의 관계 방식의 변화 속에서, 소국 오키나와가 처해 있던 역사적 기억이 고통스럽게, 때로는 분열증적으로 환기될 가능성이 크다.

최근 오키나와의 대표작가인 마타요시 에이키의 대표작을 모은 <긴네무 집>이 출간되었다. 불과 3편의 작품만이 수록되어 있고, 발표연대 또한 현재로부터 무려 30여년 전이기는 하지만, 이 작품집을 통해 오키나와의 현대문학이 가진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마타요시 이전에 한국에 소개된 오키나와 문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역시 오키나와 작가인 메도루마 슌의 <물방울>이 번역되어 있고, 그의 산문집인 <오키나와의 눈물> 역시 번역 출간되어 있다. 적어도 문학에 관한 한 우리는 메도루마라는 ‘창’을 통해서 오키나와 문학을 유추해 왔다.

오키나와 전투에 참가하고 있는 미군 병사들의 모습. 마타요시 에이키와 메도루마 슌의 소설에는 오키나와 전투 등에 대해 미국과 일본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나타난다. | 위키피디아

오키나와 전투에 참가하고 있는 미군 병사들의 모습. 마타요시 에이키와 메도루마 슌의 소설에는 오키나와 전투 등에 대해 미국과 일본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나타난다. | 위키피디아

지방문학으로 간주, 체계적 조명 미흡
그렇다고는 하지만, 한국에서의 오키나와 문학에 대한 이해는 매우 미약하다. 한국의 독서계에서 오키나와에 대해 갖고 있는 관심은 극히 최근에 형성된 것이다. 역시 발표시점으로부터 무려 40여년이 지나서야 오에 겐자부로의 <오키나와 노트>가 한국어로 번역된 사실에서도 그것은 확인되는 바다.
오에 겐자부로의 <오키나와 노트>는 일본으로의 복귀운동이 절정이던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의 오키나와인들의 육성과 현실을 조명하고 있지만, 그 자체가 ‘오키나와의 목소리’라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오키나와라는 역사적 특수성과 비극에 대한 한 일본 지식인의 공감과 고통의 기억을 강렬하게 뿜어내지만, 바로 그러한 사실 자체에서 확인되는 것은 이전에도 말했듯 “일본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자의식이다.

반면 “오키나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우리가 내밀하게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들 자신의 육성을 들어야 한다. 요컨대 우리는 ‘오키나와라는 거울’을 통해서 일본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것과 동시에 ‘일본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오키나와를 음미하는 과정 모두를 복합적으로 전개시켜야 한다.

그래야 ‘일본 속의 오키나와’뿐만 아니라 ‘오키나와 속의 오키나와’도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 탐구의 과정이 심화되면 ‘아시아 속의 오키나와’ 문제라는 한국인과도 무관치 않은 공동의 기억이 언젠가는 복원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도 마타요시 소설의 번역 출간은 중요한 계기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마타요시 에이키와 메도루마 슌은 공히 아쿠타카와상 수상작가이다. 마타요시는 1995년에 <돼지의 보은>으로, 메도루마는 1997년에 <물방울>로 이 상을 수상했다. 오키나와 출신 작가가 일본 본도에서 시행하는 주요 문학상을 연이어 수상했다는 것은 오키나와 문학의 탁월성을 보여주는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키나와 문학이 제대로 평가되고 분석된 것은 아니다. 일본이나 한국에서 오키나와 문학은 지방문학의 일종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체계적이면서 본격적으로 오키나와 문학이 조명되고 있지는 않다.

일본 본도에서 활동하지 않고 오키나와에서 문학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작가 역시 작가 특유의 곤란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 오키나와적 특수성을 반영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럴 경우 가장 중요한 고려 대상이 되는 것은 일본어와는 이질적으로 보이는 ‘오키나와어’를 작품 속에 얼마만큼 반영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일본의 언어학자들은 오키나와어를 고대 일본어의 한 지류라고 논의하고 있지만, 일본어와 오키나와어는 자연스럽게 호환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다. 가령 한국의 전라도 방언과 경상도 방언 사용자의 의사소통과 같은 형태는 일본어와 오키나와어의 관계에서는 나타날 수 없다. 냉정하게 말하면, 독일어와 프랑스어가 그렇듯 외국어와 같은 감각으로 일본인은 오키나와어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오키나와 작가 입장에서는 어디까지 오키나와 방언을 작품 속에 반영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될 수밖에 없다. 오키나와의 근대문학이 일본에 비해 더디게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거의 외국어라고 해도 좋을 일본어로 완숙한 작품을 써야 한다는 언어상의 곤란 때문이었다.

다음으로 오키나와 작가가 처하게 되는 곤란은 오키나와인들 자신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일본 본토의 독자들 역시 동일한 감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마타요시와 메도루마 소설에는 1945년 당시의 오키나와 전쟁이나 1970년대의 베트남 전쟁, 미군통치기의 여러 형태의 모순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천황제’ 비판과 같은 반(反)야마토주의가 간접적으로, 때로는 풍자적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일본문학의 사소설적 경향이나 일본 독자들의 민족감정을 건드릴 수도 있는 주제일 것이다.

외국어 같은 일본어로 써야 하는 한계
거꾸로 오키나와적 특수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견지하지 못한 본도 독자 입장에서는, 오키나와 문학이 지나치게 무겁고 덜 현대적인 문학이라는 식의 피상적 이해에 그쳐, 다만 소설 속에서 전개되는 ‘풍물지적 소재’만을 엑조티즘의 관점에서 소비할 가능성도 있다. 본격문학 말고도 이른바 ‘오키나와 붐’을 불러일으켰던 오키나와 이미지는 대체로 오키나와 특유의 샤머니즘과 민속문화 또는 그것과 정반대의 남국의 리조트 문화와 같은 것이었다.

오키나와 작가들은 작품을 쓰는 과정에서 ‘국가의 기억’과 ‘민중의 기억’의 불일치를 경험하며, ‘일본의 기억’과 ‘오키나와의 기억’이 상당 부분 달랐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근현대 역사의 기억을 떠올릴 때도 불가피하게 중국, 일본, 미국이라는 대국과의 관계방식의 변화 속에서, 소국 오키나와가 처해 있던 역사적 기억이 고통스럽게, 때로는 분열증적으로 환기될 가능성이 크다.

‘자기결정권의 회복’이야말로 정치적 주체성의 요구이다. 마타요시와 메도루마는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역사적 조건과 상황을 주된 소설적 탐구의 대상으로 재현한다. 상대적으로 마타요시의 소설은 리얼리즘적 재현을 선호하고, 메도루마는 실험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 속에는 공히 일본을 ‘외부’로 배제할 수도, 또 ‘내부’로 완전히 환원할 수도 없는 오키나와인들 특유의 기억과 역사, 아이덴티티의 문제가 용해되어 있다.

소설을 통해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오키나와인들의 내적 풍경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 이것은 오키나와와 한국의 각기 다른 특수성이 근대 동아시아 안에서 어떤 공통된 경험과 인식의 구조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통성이야말로 우리가 몰랐던 오키나와 문학의 보편성일 것이다.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racan@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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