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정치민주연합(이하 새정련)의 새 원내대표로 우윤근 의원이 당선됐다. 우 대표는 “나는 계파가 없으며 품위 있는 야당을 만들겠다”고 말했지만 야당의 상황은 품위 운운할 만큼 여유롭지가 않다. 오히려 계파 갈등이 첨예화하면서 새정련의 분당이 임박했다는 전망이 나오는 등 곳곳이 지뢰밭이다.
새정련 비상대책위원장에 내정됐다가 강경파 반발에 밀려 무산됐던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는 “박영선 의원이 탈당하면 세력을 결집해 신당을 만들 준비가 다 되어 있다”고 말해 신당 창당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했다. 21일에는 ‘민주당’을 당명으로 하는 신당이 창당식을 가질 예정이다. 또 새정련의 비노(非盧)·중도 전·현직 의원 20여명은 친노 패권주의를 막겠다며 지난달 22일 ‘구당구국(救黨救國) 모임’을 결성했다. 구당구국 모임은 새정련의 혁신을 넘어 중도 성향을 강화한 신당을 만들 수도 있다고 밝혀 분당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구당구국 모임의 좌장격인 정대철 새정련 고문을 만났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조조가 부활해도 해법이 안 보인다는 새정련의 앞날은 어찌될 것인지, 제1 야당을 쪼개 진짜 신당을 창당할 계획인지를 물었다.
구당구국 모임의 정체(?)는 무엇인지요.
“구당구국이란 모임 이름도 확정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세월호 특별법 정국에서 당의 미래를 걱정하는 원내·외 인사들이 모여 매주 한 차례 모임을 갖다가 ‘구당을 해서 ‘구국’을 하자며 나온 말입니다. 특정 계파의 사당화를 막고 당의 몰락을 막자는 뜻입니다. 정동영, 천정배, 이부영 전 의원 등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김한길·안철수 전 대표에게도 참여를 권했는데 아직 본격적으로 참여는 하지 않고 있고요. 사실 저는 정계를 은퇴한 셈인데 당 안팎에서 갈등이 많으니 저라도 힘을 보태고 싶어서 나섰습니다.”
지난 대선 직후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평가위원장을 맡은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도 “새정련은 이미 정상적인 항해를 하기 힘들 만큼 30~45도 기울어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세월호 같은 신세가 되지나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해 야당의 헤쳐 모여, 즉 새정련의 해체와 신당 창당을 암시했습니다. 구당구국 모임도 신당을 준비 중인지요.
“새정련이 스스로 개혁해서 새로운 모습을 찾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과거 야권의 신당들도 그렇게 탄생했지요. 그런데 현재 지도부는 물론 비대위도 국민들이 공감할 개혁의 모습을 안 보이고 소극적이어서 지속적으로 압박할 예정입니다. 그럼에도 변화의 의지가 없다고 판단되면 외부에서 깃발을 들 수도 있죠. 현재의 새정련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정당으로 거듭나야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버님인 정일형 박사부터 시작해 아드님(정호준 의원)에 이르기까지 정통 야당의 순혈가문인데 정 고문이 생각하는 참 야당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국민적 지지를 받아 정권교체가 가능한 대체정당이 정통 야당의 모습이죠. 그렇기 하기 위해서는 개혁이 필요합니다. 첫째 중도와 중도우파까지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이념적 스펙트럼이 넓어져야 합니다. 세대별로는 장년층, 노년층, 청년층 모두의 지지를 받아낼 수 있는 정당이 되어야 하죠. 지난 총선과 대선, 그리고 다음 대선을 예측하면 50~60대의 인구 비율이 23·42·45%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반면 20~30대는 58·38·35%로 줄고 있습니다. 청년층만의 지지를 받아서는 정권교체가 어렵습니다. 또 야당이야말로 시대적 소명을 잘 수행하는 정당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개혁을 통해서 좀 더 정의로운 사회를 지향해야 하고, 경제민주화·보편적 복지를 통해 양극화를 극복하고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남북이 공존하고 궁극적으로 평화통일을 이루는 것도 야당이 나아갈 길이자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새누리의 이념에 공감했다기보다 새정련이 싫어서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가장 크게 지적하는 것이 패거리정치, 곧 계파문제입니다. 과거에도 유진산파, 이철승파 등 계파들이 존재했는데 과거와 현재의 계파나 패거리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지요.
“계파는 정당이 살아 있는 한 크고 작고의 문제이긴 하지만 어디나 다 있습니다. 초기 민주당에서 장면·정일형을 중심으로 한 신파와 신익희 등을 중심으로 한 구파가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그래도 부패한 정권을 심판한다는 공동목표가 있었죠. 그런데 요즘 계파는 뜻이 맞는 사람들이 당과 나라를 위해 뭉치는 것이 아니라 당권을 잡으려는 이들이 합종연횡을 하며 권력을 분산시키고 결국 당을 망치게 만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실 YS와 DJ는 30년 동안 계파를 유지하지 않았습니까. 1971년에 대통령 후보였던 DJ가 1997년에야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니 김상현, 이기택, 정대철 같은 2인자들은 큰 꿈을 꿔보지도 못하고 말라 비틀어져(?) 은퇴해버렸죠. 그러면서 당에 어른이 없어졌고 위계질서도 없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목소리가 큰 40~50대의 친노 운동권 세력들의 움직임이 자칫 패거리로 보일 수 있겠죠.”
친노파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사실 ‘친노’라는 것이 실체가 없어요. 친노 원조는 김원기 전 의원과 저, 정대철입니다. 가장 먼저 정치인 노무현의 자질을 알아보고 대통령을 만든 이들이 진짜 친노죠.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 사후에 유난히 친노를 강조하는 이들이 많아졌어요. 그게 문제입니다. 정치인이 아닌 이들도 친노에 대해 미숙한 정권과 정치의 이미지를 답습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번 문희상 위원장이 이끄는 비상대책위원회에 친노 계열이 대부분 참여해서 더욱 그런 이미지가 굳어진 것 같고요. 변명 같지만 언론도 큰 문제입니다. 지금 새정련 등 야당은 최악의 언론환경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신문은 물론 공중파와 종편에서 새정련을 집중 공격하지 않습니까. 마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기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더욱 새정련이나 이른바 친노파의 이미지가 왜곡될 수밖에 없죠.”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싸가지 없는 진보>란 책을 썼습니다. 왜 진보에 ‘싸가지가 없다’는 딱지가 붙을까요.
“그건 이념보다는 태도의 문제일 겁니다. 운동권 출신의 국회의원들이 도덕적 우월감이 너무 크다 보니 쉽게 강경론에 기울고, 그러면서 국민적 공감대를 얻는 데 실패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쉽게 말하면 자신들이 개혁 대상인데도 스스로 개혁은 하지 않고 다른 이들을 비판하거나 세대교체만 주장하는 등의 모습이 싸가지 없는 걸로 비쳐지는 것 아닌가요.”
한 인터뷰에서 새정련이 좀 우클릭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럼 정체성이 달라지는 것은 아닌지요.
“중도, 중도우파까지 끌어들이자는 의미입니다. 새정련은 이념정당이 아니므로 이념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상대적으로 우리가 새누리당에 비해 훨씬 진보적이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습니다. 중산층과 서민을 위하는 정당에 그 정체성이 자리매김되어야 합니다.”
요즘 국회의원이 ‘국개의원’으로 불릴 정도로 신뢰도가 떨어졌습니다. 정치도 야합, 꼼수 등의 의미로 변절했습니다. 3대가 정치를 하는 정 고문이 생각하는 진정한 정치는 무엇입니까.
“정치란 갈등을 풀어가는 과정인데 요즘 정치를 보면 갈등을 푸는 게 아니라 증폭시키는 것 같습니다. 25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이 아직도 교과서로 읽히는 것을 보면 사람간의 관계인 정치가 획기적인 발전을 못한 모양입니다. 저도 그랬지만 정치는 자신이 흥미를 느껴야 하고, 타고난 자질과 능력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정치를 잘하면 개인의 보람은 물론 국민들이 행복해지고 나라가 발전한다고 믿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과 정동영 후보의 대선 선대본부장을 맡아 킹메이커로도 불립니다. 권노갑 전 의원도 회고록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유일하게 대통령으로 키우고자 했던 후계자”라고 밝혔습니다. 정 고문이 생각하는 ‘대통령의 자질’은 무엇입니까.
“시대적 소명을 잘 알고 그걸 수행할 의지와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대통령 자리만 탐내는 의지는 권력욕일 뿐이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은 소통, 즉 국민과의 소통, 야당과의 소통 능력입니다. 최근 ‘대학생 100명이 뽑은 대통령의 자격’이란 글이 SNS 상에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대통령은 을이다’(최고권력자 슈퍼갑이 아니다. 5년간 피고용자로 여기고 약자 소리를 들어야 한다), ‘쉼표를 찍어야 한다’(달려오기만 한 대한민국 사회에서 지금 어디까지 왔고 앞으로 어딜 가야 할지 고민하는 쉼표도 찍어야 한다), ‘전국노래자랑이다’(지역·이념·세대·소득으로 분리된 한국 사회에서 한 목소리를 담아내야 한다) ‘욕쟁이할머니 식당의 단골이다’(비판에도 겸허한 자세로 나서 국민의 다양한 욕구를 인정, 수용해야 한다), ‘얼굴의 주름이다’(국민과 나라를 향한 진정성의 고뇌를 갖춘 자) 등 정말 촌철살인의 말로 대통령의 자질을 분석했더군요. 정치원로라는 저도 감탄할 정도입니다. 정치인이라면, 또 지도자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음미할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까.
“소통이죠. 국민 의견도 SNS 등을 통해 얼마든지 파악할 수 있고, 야당 의견도 잘 들어보면 국정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국익에 도움되는 의견이 많은데 소통은커녕 잘 만나주지도 않습니다. 친박 핵심들도 오랜 시간 만났다는 이가 드물어요. 청와대에서 일주일에 3일 이상 대통령 혼자 저녁을 먹는다는 말도 들리던데 그게 말이 됩니까. 더 많은 이들을 만나 의견을 들어야죠. 대통령이 불러주면 저라도 찾아가서 세상 돌아가는 정보도 들려주고 조언도 하면서 밥값을 하고 나올 텐데….”
최근 교회에서 간증활동도 많이 하고 베드로에 관한 책도 쓰셨던데, 유독 베드로에 천착하는 이유는 뭔지요.
“베드로를 보면 꼭 저 같아요.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실수와 실패를 가장 많이 한 제자입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을 때도 따라 걷겠다고 하다 물에 빠지고, 세족식 때는 손과 얼굴까지 닦아달라고 하는 등 철없는 행동을 일삼았지요. 무엇보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즉 배신한 것이지요. 저 역시 정치를 하면서 실수와 실패가 많았습니다. 술을 먹다 실수를 하기도 했고, 감옥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 더 정이 가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실수도 많이 했지만 그에게는 남을 배려하고 자신을 버릴 줄 아는 겸손함이 있었어요. 그는 예수님을 깊이 만났고, 회개했고, 순교했습니다. 무엇보다 베드로에게 배울 점은 용서입니다. 용서의 덕목은 자유와 평화, 희망을 얻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용서를 하면 자기 통제력이 생기고 인간관계가 회복됩니다. 또 분노, 불안, 우울, 저주, 강박 등은 심신의 독소인데 그게 빠져나가야 건강해집니다. 용서는 그런 독소를 없애줍니다.”
어머님이신 이태영 박사는 최초의 서울대 법대 여학생, 최초의 여성 변호사 등 업적과 성취가 높은 분인데, 가장 후회스러운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일하느라 바빠 못 놀아봤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정 고문도 후회스러운 일이 있나요.
“저는 평생 받기만 했습니다. 그게 부끄럽고 후회스러워 이제 돌려주려고 합니다. 쫓아다니면서라도 남들을 돕고 싶습니다. 요즘은 교정위원으로 한 달에 너댓 번 교도소를 찾아 사형수와 상담도 하고 교도소에 책보내기 운동도 합니다. 갇힌 자들에게 열린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서입니다. 주례도 그동안 7000번은 선 것 같습니다. 올 10월에만 10건의 결혼 주례를 맡습니다. 그것도 돌려주는 일입니다. 정치 후배들이 바른 길로 가도록 충고와 조언을 해주는 것 역시 제 정치생활의 후회스러움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일본의 마쓰시다 정경숙 같은 기관을 만들어 정치 인재를 육성하고 싶지만 돈이 없어서 고민 중입니다. 이번에 구당 모임을 만든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이제 제 나이 만으로 70세인데 정말 제대로 된 야당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정대철 고문은 스스로 고백하듯 베드로처럼 정치인생에 실수와 실패도 많았다. 하지만 결국 그것이 자산이자 교훈인데 젊은 정치인들은 그런 지혜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를 비롯한 구당구국 모임이 과연 새정련이란 기울어가는 배를 다시 일으킬 수 있을까. 정작 배에 탄 이들은 배가 어떤 상태인지 잘 모르는 것 같다.
<글·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