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보는 달력, 상품의 포장, 건물마다 가득한 포스터와 그림들…. 온갖 조형물 속에 살아가면서도 정작 우리는 미술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이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인식하지 못한다. 아이의 천진한 낙서에 감동하면서도 재벌이 소유한 수십억짜리 그림을 욕망한다.
201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한국 커미서너로 활동한 김승덕씨는 국내외 미술계에서 인정받는 큐레이터다. 이불, 최정화 등 한국 작가는 물론 야요이 쿠사마 등 국제적인 작가들과 국제무대에서 활동해온 전시기획자로도 유명하다. 비엔날레 등 여러 국제 행사와 한국 작가를 프랑스에 소개하는 전시회를 준비하느라 한국을 방문한 그를 만나 미술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이고 아름다운 그림이 왜 탐욕의 재앙이 되는지를 물었다.
요즘 파리에서 어떤 활동을 하면서 지내고 계신지요.
“한국 출신의 원로 작가인 한묵, 작고 작가인 이응로의 2인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매우 훌륭한 작가이고 한국 미술의 거목이시지요. 물론 두 분 모두 일찍이 한국을 떠나 오랜 시간 동안 프랑스에서 활동해 오신 분들이라서 현지 화단에서도 친숙한 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두 분의 전시를 하고자 하는 이유는 다른 시각으로 조명해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 전시와 별개로 이미 몇 년 전부터 트랜스모더니즘을 주제로 대규모 그룹전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사실 역사적으로 볼 때 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이 서구권과 비서구권의 경우 그 출발과 전개과정이 매우 다른데, 미술작품에서도 마찬가지거든요. 서구 중심으로 발전해 온 미술의 전통 속에서 비서구권의 미술작품들을 살펴보면 각 지역의 독특한 모더니즘 현상이 드러나곤 합니다. 한 번은 전시 리서치 차원에서 뉴질랜드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골든 월터즈라는 뉴질랜드 추상화가의 작품을 봤어요. 그 작가의 기하학적 패턴에 감탄했는데 알고 보니 그 패턴이 마오리족의 민속 문양에서 모티프를 가져와 변형시킨 것이었더라구요. 만약 그 작품을 다른 나라에서 아무런 정보 없이 봤다면 그 패턴이 작가의 고향인 뉴질랜드의 문양에서 유래된 사실을 몰랐을 겁니다. 이응로와 한묵, 두 작가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보고 싶은 것이죠. 동시대 미술을 가로지르는 조형언어를 표현하지만, 그 이면에는 한국적인 문화적 배경이 자연스레 스며 있습니다.”
한묵 작가는 아주 연로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한묵 작가는 1914년생이니 올해 연세가 101세입니다. 그래도 아직 현역 화가입니다. 50년도 넘는 세월을 파리에서 거주하시며 평생 작품에만 몰두하신 것에 비해 미술사적 연구나 비평적 접근이 다소 부족했다고 봅니다. 지금쯤 미술관의 회고전이 열려야 하는 때가 아닌가 생각하는데요. 저희 전시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1980년대 제작된 대작을 중심으로 구성하고 거기에 더하여 아직 공개되지 않은 1960년대 드로잉도 선보일 예정입니다. 좋은 전시를 하려면 최대한 훌륭한 작품을 끌어모아야 하는데 한국에서 한묵 작가의 작품을 소장한 곳이 꽤 있어서 빌리려고 해요.”
이응로 작가는 이미 오래 전에 타계하셨잖아요.
“이응로 작가는 1989년 세상을 떠나셨지만, 최근 충청도 홍성에 ‘이응로의 집’이란 기념관 성격의 미술관이 개관했어요. 이번에 직접 내려가 봤는데, 정말 매력적이고 훌륭합니다. 조성룡 건축가가 구현한 공간에서 이응로 작가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았어요. 보통 미술관은 화이트 큐브인데, 그곳은 황토로 미술관 흙벽을 만들었어요. 이응로 작가가 태어난 생가를 복원하고, 작가가 자랄 때의 정서를 그대로 살려낸 시골길, 수련이 가득한 연못을 거닐 수 있는 목조다리, 미술관 들어가는 길목에 좁은 냇가를 잇는 녹슨 코텐스틸…. 한 치의 빈틈없이 운치 있고 동시에 시골스러움도 서린 세련된 곳이었습니다. 전시 중인 작품도 좋았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자료실에 보관된 초·중등학생을 위한 미술교과서 초본이었어요. 1958년에 이응로 작가가 직접 손으로 만든 것인데, 당시 이 작가가 우리 학생들에게 미술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할지 고민했던 흔적이 그대로 담겨 있어요. 피카소 같은 화가뿐만 아니라 르 코르뷔지에 같은 건축가까지 폭넓게 소개되어 있더라구요.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데도 미술에 대해 현대적으로 접근하고 있고,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동시에 추구했던 이응로의 시각이 잘 드러납니다.”
두 작가의 전시는 언제 어디서 볼 수 있나요.
“2015년 12월에 제가 공동 디렉터로 소속되어 있는 프랑스 ‘르 콩소르시움’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또한 앞서 말씀드린 트랜스모더니즘 전시는 2016년을 목표로 준비 중인데, 그 전시에서도 이응로와 한묵을 포함시킬 생각입니다. 트랜스모더니즘의 성향을 보여주는 훌륭한 작가들이니까요. 애초에 그룹전 준비를 하다가 이 두 작가는 따로 꼭 프랑스 미술계에 재조명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서 2인전을 만들게 된 것이거든요. 게다가 내년이 한불 수교 130주년을 맞는 해이니까 더욱 의미가 깊죠.”
전시 준비에 어려운 점은 없나요.
“가장 어려운 것은 재정문제입니다. 대부분은 기업의 협찬과 후원을 받아야 하는데 일단은 전시 기획부터 먼저 진행했습니다. 내년 12월 프랑스 디종에서 첫 전시회를 갖는데 재정만 받쳐준다면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순회를 하고 싶을 정도로 의미 있는 작품들이 많아요.”
지난 2일 리움미술관에서 ‘확장하는 예술경험’을 주제로 포럼이 개최되었습니다. 홍라희 관장을 비롯해 국내 미술계를 이끄는 이들이 모여 미술의 사회적 역할과 비전을 고민하는 자리였는데요, 미술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인가요.
“미술은 그 시대의 정치·경제와 같이 움직입니다. 과거에는 예술품은 권력자나 부유층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종교가 지배하던 시절엔 바티칸이나 교회가 미술계를 이끌었고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등 부유층이 미켈란젤로, 다빈치 등을 후원하며 풍요로운 르네상스 시대를 만들었죠. 하지만 청바지가 대중화되면서 재력에 상관없이 평등하게 옷을 입는 패션혁명이 일어났듯, 미술계 역시 최근에는 누구나 향유하는 것, 혹은 자기의 안목을 과시하는 수단이 됐습니다. 미술사의 변화를 보면 사회상의 변화도 알 수 있죠. 과거 캔버스에만 그림을 그리던 고정관념을 마르셀 뒤상이란 작가가 변기를 뒤집어 놓고 ‘분수’라고 명명하면서 현대미술의 혁명을 가져온 것도 시각미술에서 개념미술로 변해가는 대중들의 변화를 보여준 것입니다. 정치인은 정책으로, 작가는 글로 자신을 표현하듯 예술가는 그 시대의 사회상을 시각언어로 표현합니다. 그 작품 속에 자신의 철학만이 아니라 시대상, 세계관을 담아서 대중들에게 그 시대의 문제를 알려주고 같이 고민하는 것이 예술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의 기능은 국적, 종교를 초월한 이슈들을 우리 삶 속에 녹여서 대중들의 정신 세계를 고양시키고 또 다른 창조를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화가이자 가수인 조영남씨가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이란 제목의 책을 쓸 정도로 현대미술은 난해합니다. 무식한 질문이지만 데미안 허스트 같은 작가가 직접 만들지도 않고 그저 기획한 작품이 수십억원에 팔리고, 중국 현대화가 쩡판쯔가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한 그림이 250억원에 팔리는 이유가 뭔지요.
“작품가격은 역시 정치·경제와 깊은 연관이 있죠. 중국이 부강해지면서 중국인들이 자국 현대작가의 작품을 마구 사들이니 가격도 폭등합니다. 물론 거론하신 작가들의 작품에는 저마다 현재의 정치적·사회적 흐름이 담겨 있겠지만 그들을 둘러싼 문화예술의 산업적 측면에서 보면 또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지요. 저 역시 미술이 상품화되어 그 지위가 경제적 가치로만 결정되고 결과적으로 일종의 소모품으로 전락하는 현상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 속에서도, 다시 말해 작품이 잘 팔리거나 아니거나 상관없이 진정한 예술가들이라면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꿋꿋하게 추구해 갈 것이고. 역으로 보자면 그러한 모습에서 예술가의 진가를 식별할 수도 있지요. 이제는 그림을 잘 그리는 것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그림은 무조건 고상하고 순수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사라진 대신 이 시대의 상황을 누가 자기만의 시각언어로 제대로 보여주는가가 더 중요하니까요. 현대작가의 작품이 난해하다고 하는데 모든 작가는 ‘현대’ 작가입니다. 이젠 고전이 된 인상파 화가들도 당시엔 분명 혁신적인 현대작가였죠. 그 시대를 살고 그 시대를 읽고 그 시대를 이야기하는 것이 작가의 역할인데, 대중들 역시 시대를 읽는 눈을 키워야 합니다.”
최근에는 고가의 미술품이 부의 상징만이 아니라 탈세나 증여의 수단으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또 화랑에서 ‘어느 재벌, 어느 기업에서 구입했다’란 말이 마치 대단한 추천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기업들이 자신들의 건물이나 가정에 미술품을 사들이고 전시회를 여는 덕분에 새로운 작품이 탄생하는 순기능도 있습니다. 대중들은 재벌이 만든 화랑이나 대기업이 후원하는 전시회에서 평소 절대 보기 힘든 예술작품들을 접하는 기쁨을 누릴 수도 있으니까요. 여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전시기획자나 예술행정가들입니다. 수없이 쏟아지는 문화 소모품 가운데 보석을 가려 진정한 문화의 가치와 기능을 찾는 것이 저 같은 문화기획자의 역할이고, 정부나 기업과 연계해 작품 전시를 다양하게 해서 대중과 소통의 기회를 마련해주는 것이 예술행정가들의 역할이자 숙제입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까다롭다고 알려졌는데 세계적인 작가들이 왜 김 선생을 신뢰하고 작품이나 전시회를 맡깁니까.
“글쎄요, 저에게 맡긴다기보다는 함께 만들어 간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일 것 같은데요. 일반적으로 예술가는 독특하고 개성이 강하며 까칠하다는 표현까지 나오지만 그들에게 맡겨진 역할이 그럴 수밖에는 없는 것 같아요. 저를 비롯한 큐레이터는 예술가의 특별함을 인정하고 보호하며 그 속에서 풀어낸 작업들을 이해하고 전달하는 일을 작가와 함께 풀어 나간다고 볼 수 있지요. 작가와 소통하고 작업의 실마리를 찾아 전시로 실현시켜내는 일련의 과정은 엄청난 인내심을 필요로 하지만, 그보다 훌륭한 작가들을 발굴할 때의 황홀함은 큐레이터만의 엄청난 특권이지요. 또한 아이디어를 총동원해 전시를 기획하고, 마침내 전시회가 열려서 첫 관객을 맞이할 때의 기쁨도 마찬가지구요.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구조와 각자의 일상 속에서 예술을 통해 그 틀을 깨면서, 세상을 관망하며 새로운 비전을 나름의 언어로 세상에 꺼내놓는다는 행위 자체가 주는 보람이 큽니다. 특히 요즘처럼 신자유주의 환경에서 경쟁과 분업화로 인해 모든 것이 재빨리 돌아가는 상황에서 예술의 필요성은 더욱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때론 예술작품이나 전시장이 도시를 바꾸기도 하더군요. 현재 활동하는 현대미술 지원기관이자 종합예술기획단체인 르 콩소르시움도 프랑스 파리가 아닌 디종에 있는 현대미술관에서 시작됐다면서요.
“겨자 소스(디종 머스터드)로 알려진 이 작은 도시에 3년 전 700만 유로(약 110억원) 규모의 예산이 투자되어 4300㎡(약 1300평) 규모의 새로운 아트센터가 문을 열었을 때 미술계가 깜짝 놀랐습니다. 세계적 건축가 시게루 반이 건축 디자인을 맡아 더욱 화제가 됐죠. 아트디렉터 프랑크 고트로와 자비에 두루를 중심으로 예술적 비전을 공유하는 동료들이 1977년 작은 공간에서 시작해서 지금까지 신나게 일한 덕분입니다. 국가나 기업의 예산지원이 많은 것도 아닌데 작가의 유명도나 국적에 상관없이 실력 있는 작가를 발굴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자연스럽게 국제 무대에 알려지게 됐어요. 이 작은 도시에서 전시회가 열리면 프랑스를 비롯한 각국의 사람들이 모입니다. 이게 문화의 힘이죠.”
우리나라도 지방자치제가 활성화되면서 서울은 물론 곳곳에 미술관도 생기고 전시회도 다양하게 열립니다. 그런데 여전히 미술이 대중들에게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요.
“문화행정가들, 즉 지방자치단체나 큐레이터들의 책임입니다. 무조건 거액의 예산이 들어가는 대규모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방 특색에 맞는 전시공간이나 행사를 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프랑스 블리세이란 시골 마을의 경우를 소개할게요. 주민이 27명뿐인 이 마을의 망가진 빨래터를 근사한 연못으로 만들기 위해 레미 조크란 큐레이터가 공무원들과 더불어 8년 동안 주민들을 설득했어요. ‘우리가 이런 훌륭한 공간을 만들어줄 테니 감사한 줄 알라’는 자세가 아니라 ‘이 우물을 이렇게 바꾸고 싶은데 여러분의 의견은 어떤가요’라며 꾸준히 대화를 나눈 끝에 연못이 만들어지고 관광 명소가 되었습니다. 주민이 직접 참여하는 미술관이나 전시회를 기획하는 데는 ‘소통과 공감의 정성’이 필요합니다.”
2007년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 후보로 추천되었으나 고사해 신정아씨가 그 자리를 맡는 바람에 미술계와 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왜 그런 감투(?)를 마다했나요.
“지난 이야기라 다시 말하긴 그렇습니다만 그땐 이미 외국인 예술감독이 선정되어 있어서 시각이 전혀 다른 제가 함께 작업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해서 물러난 겁니다. 어찌보면 미술계가 가장 정치적인 것 같아요. 예술가들의 협회장 선거도 정말 치열하고, 중요한 보직 역시 실력보다 정치적 입김이 작용합니다. 더 큰 문제는 한국에선 작가들이 일단 유명해지면 작품이 아닌‘자리’에 연연해 한다는 겁니다. 피카소가 평생 명성을 유지했던 것은 그가 죽을 때까지 시대정신을 살린 작품활동을 계속했기 때문이에요. 세상과 만나는 지점에 자신의 예술혼을 전달하는 것이 예술가들의 사명이고 그러려면 항상 시대와 호흡하고 소통해야 하는데, 너무 관료적으로 되니 위대한 작가들을 배출하기 어렵게 됩니다. 100세가 넘어도 꾸준히 활동하는 한묵 선생님을 제가 사랑하고 세계에 소개하려는 것도 그런 이유랍니다.”
세계를 누비는 큐레이터면서도 김승덕씨는 보석이나 명품이 아닌 고동처럼 생긴 저렴한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미술은 정신적 영역’(the painting is a mental thing)이라는 말처럼 오히려 그런 소박함이 그의 우아한 정신세계를 돋보이게 하는 것 같다.
<글·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