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색이 교황입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방탄리무진을 탄다 해도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특별 제작한 의자에 앉는 것도 자연스럽고, 교황 방한을 기념해 준비한 큼직한 방명록에 큼직하게 서명을 하는 것도 이상할 게 하나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렇게 했다고 해도 아무런 흉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전 세계 가톨릭 교회의 최고지도자이고, 교황은 교황다워야 하니까요.
교황이 상식의 허를 찌릅니다. 방탄리무진 대신 1600㏄짜리 작은 차 쏘울을 탑니다. 특별 제작한 의자 대신 낡은 의자에 앉았습니다. 꽃동네 장애아동들의 공연을 관람할 때는 아예 서서 지켜봤습니다. 방명록에는 커다란 마분지를 준비한 사람들이 무안하게도 귀퉁이에 보일까 말까 한 크기로 이름을 써넣었습니다. 교황은 짓궂은 장난꾸러기처럼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하나씩 하나씩 깨뜨렸습니다. 선문답을 보는 듯한 감흥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신기합니다. 그가 교황답지 않은 행보를 이어갈수록 사람들은 더 감동하고, 더 위로받고, 더 사랑하고, 더 환호했습니다.
철저하게 낮은 곳으로 향한 교황의 탈권위 행보는 큰 울림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교황이 아니고 우리나라 사람이 똑같은 행보를 보였어도 저렇게 환호하고, 열광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노 전 대통령도 권위를 벗어던졌습니다. 대통령에게 덧씌워져 있는 전제군주적 이미지를 깨부수려고 했습니다. 군림하고 통치하는 대통령이 아닌, 봉사하는 대통령상을 온전히 국민들에게 돌려주려고 했습니다. 정권의 시녀였던 검찰까지도 풀어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환호와 찬사가 아니라 ‘대통령이 대통령답지 못하다’는 욕이었습니다. 국민들은, 특히 보수언론은 그의 메시지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의 말하는 방식만 트집잡았습니다. 입이 싸다고, 품격이 없다고, 대통령감이 아니라고 욕하고, 손가락질했습니다. 야당인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은 연극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을 ‘노가리’로 비하하고, “육시랄 놈”, “개잡놈” 등의 입에 담기도 힘든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한국에서 탈권위의 운명은 너무 가혹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아직도 국민 위에 군림하는 대통령을 모시고 있습니다. 고정관념이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대통령다워야 하고, 장관은 장관다워야 하고, 국회의원은 국회의원다워야 한다는. 거짓 폼잡기가 권위인 양 사회에 만연합니다. 사실은 그게 벽이었습니다. 정치와 국민을 따로 떼어놓고, 소외시키는. 세월호 특별법 논란에도 그들의 권위의식이 국민과 정치 사이에 벽을 만들고 있습니다. 헌법 제1조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옵니다.’ 국민 위에 법이 있는 게 아니라 법 위에 국민이 있습니다. 국민이 원하면 헌법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세월호 유가족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기는커녕, 세월호 같은 참사가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국민의 뜻을 어떻게 제도권 안에 구현할 것인가를 고민하기는커녕, 법적 안정성 운운하며 소금을 뿌려댑니다. 여당이나 야당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국민 여론과 정치권의 간극이 크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 정치 시스템에 어딘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정치인들이 국민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게 명확해졌습니다.
누군가가 교황에게 세월호 추모 리본을 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고합니다. 정치적 중립을 명분으로 내세웠습니다. 치졸한 권유에 교황의 답이 압권이었습니다.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
갑자기 우리 지도자들이 너무도 작게 느껴집니다. 교황은 아무 거리낌없이 하는데, 왜 우리 대통령은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다가가지 못할까요. 왜 껴안지 못할까요. 왜 죽음의 단식을 하는 유민이 아빠를 말리지 못하는 건가요. 뭐가 그리 따질 게 많은가요. 교황의 탈권위 행보와 우리 사회 리더십의 괴리가 너무도 큽니다. 그 격차를 줄이는 것은 오롯이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입니다.
<류형열 편집장 rh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