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명의 여고 동창생 ‘오후의 수다’

2014.03.25

포스터 = 인디스토리

포스터 = 인디스토리

제목 씨, 베토벤

각본/감독 민복기, 박진순

출연 김소진, 공상아, 오유진, 김중기

상영시간 90분

개봉 2014년 3월 27일

관람등급 15세 관람가

“무더운 여름날 대학가의 어느 카페, 세 명의 여고 동창생이 만난다. 일, 사랑, 친구…. 그녀들의 수다는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그 누구도 깊은 속내를 드러내지 못한다.” 

영화의 시놉시스를 읽는 순간 ‘어, 이런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언제 봤더라?’ 했다. 생각났다. 얼마 전 리뷰 했던 일본영화 <꽃잎, 춤>이다. 

한때 진한 우정을 나눴지만, 지금은 각자의 삶을 사는 친구들의 재회. 한국과 일본은 어떻게 다를까 생각하고 극장에 들어갔다. 전혀 다르다.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앞서 봤던 일본영화와 굳이 비교해보면 여전히 한국영화는 에너지가 넘친다.

영화의 원작은 연극이다. 연극을 안 봐서 모르겠지만, 영화사 측이 배포한 홍보자료에 따르면 연극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영화 스토리는 한 공간 안, 아마도 신촌에 있는 모 여대 앞 작은 카페에서 벌어지는 어느 찌는 여름날 오후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생각해보니 현재 20대나 30대 여자들이 수다를 떠는 것을 본 적은 없다. 아마도 그런 식일 것이다. 애드립이 아니라 실제 대사라면 정말 잘 뽑아냈다.

역시 연극적인 구성이지만, 세 여성의 수다 막간에 남자들이 한 명씩 출연한다. 남자들은 사랑을 구걸한다. 정상적인 사랑이 아니다. 앞서 출연한 남성은 안 만나 주면 ‘속초에서 사랑을 나눈 동영상’을 인터넷에 유포해버리겠다고 협박하고, 뒤에 출연한 남성은 이제는 주부가 된 옛 연인을 잊지 못해 과거 그녀와 사랑의 추억을 나눴던 카페에 와 전화를 한다.

사실 개인적으로 제일 주목했던 것은 카페 주인이다. 딱히 보도자료에도 그에 대한 언급이 자세히 나오지 않았지만, 김중기다. 목에 태극기를 두르고 눈물을 흘리는 한 장의 사진으로 기억되는 남자. 

1988년의 일이다. 그 전에 서울대 총학생회장에 낙선한 그는 전대협 조국통일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활동하다 감옥에 갔다. 그 역사적 ‘사실’이 그가 맡은 배역에 오버랩된다. 

영화 속 카페 사장은 1987년 신촌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한다. 이한열 열사의 호흡이 멈추고, 신촌로타리에서 시청역까지 노제를 지내던 일. 문익환 목사의 조사…. 여성들의 반응은 아, 예 그러시군요다. 

한 여성은 문익환 목사 이름 대신 문익점을 말하고, 그나마 어느 정도 ‘역사’를 알고 있는 주인공 여성도 박종철과 이한열을 헷갈려 한다. 생뚱맞은 독백이다. 일방적이다. 영화에선 우연히 그 화석화된 역사가 카페의 개업일과 맞아떨어져 다시 호명된다.

카페의 주인인 그는 여성 손님들의 수다에선 다시 관객이다. 그런데 관음증 환자의 그것은 아니다. 여성들의 수다는 때때로 그의 존재를 의식해 중단된다. 카페 주인의 모습에서 주목한 것은 이것이다. 결국 수다가 자가발전되어 드러나는 아픔까지 썰렁한 농담으로 넘어가는 달관.

앞서 언급한 찌질한 남자들과 카페에 들어와서 ‘버드(와이저)’를 시켜먹고 해남까지 가는 여비까지 시주받는 땡중, 빚보증 이자를 받으러 온 건달뿐 아니라 수다를 떨고 떠난 여자 손님들까지도 다 그에게는 짐 같은 존재들이다. 

얼핏 보기엔 그렇지만, 그에겐 치유였나보다. 어쩌면 그게 살아오면서 얻은 깨달음이 아니었을까. 캐릭터와 실제 배우가 자꾸 오버랩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영화의 제목 중 베토벤은 과거 베토벤 머리를 하고 한여름에도 레인코트를 입고 거리를 배회한 한 남자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그에 얽힌 다양한 버전의 소문은 이들의 수다를 이어가는 매개다. ‘씨’는 아마 베토벤을 봤다(see)는 뜻 아닐까 싶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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