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제 알티플라노 - 얇은 시계 명가의 부활 신호탄

2013.10.22

손목시계 제조 역사에서 시계의 사이즈와 두께는 하나의 본질적인 화두와 같다. 특히 회중시계에서 손목시계로 넘어가는 20세기 초·중반에는 셔츠 소매 안에 쏙 들어가는 작고 얇은 두께의 시계들이 마치 신기한 발명품이라도 되는 듯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전자식이 아닌 기계식 시계에서 얇은 두께를 구현하기란 만만치 않은 난제들이 산재해 있다. 수백 개의 작은 부품들을 한치의 어긋남 없이 정확히 맞물려 작동하게 하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닌데, 이 부품들을 더 작고 정밀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튼튼하게 제작하기란 고도의 기술력과 노하우가 없으면 시도조차 하기 힘들다. 더구나 20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이렇게 고도의 정밀성을 기하는 작업을 사람이 손으로 일일이 해야 했다.

1874년 스위스 라코토페의 작은 시계 공방에서 출발한 피아제(Piaget)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미 얇은 두께의 무브먼트 제조사로서 명성이 높았다. 피아제라는 이름만 듣고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여성용 주얼리부터 떠올리는 이가 많겠지만, 사실 피아제는 창립 초창기부터 내실 있는 워치메이커였다. 

세계에서 가장 얇은 자동시계 알티플라노 43㎜.

세계에서 가장 얇은 자동시계 알티플라노 43㎜.

특히 이들은 일찍이 얇은 시계 만들기에 주력했다. 그 결과 1957년 두께가 2.3㎜에 불과한 기계식 수동 무브먼트인 9P를 발표한다. 그리고 3년 후인 1960년에는 한 발 더 나아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얇은 두께의 기계식 자동 무브먼트인 12P를 공개한다.

반세기 넘는 얇은 시계 제작 집념
자동(셀프 와인딩) 무브먼트는 그 구조상 수동(핸드 와인딩) 무브먼트에 비해 두께가 두꺼울 수밖에 없는데, 피아제의 탁월함은 콩알만한 작은 로터(마이크로 로터)를 밸런스와 평행선상에 위치시킴으로써 두께를 혁신적으로 줄인 데 있었다. 

자동 무브먼트의 두께를 줄이기 위한 한 해법으로 마이크로 로터를 사용하는 브랜드는 파텍 필립, 쇼파드, 파르미지아니 등 현재는 제법 여러 브랜드들이 있지만, 60년대 초반에는 피아제 외엔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피아제의 자동 무브먼트 12P의 두께가 수동 무브먼트인 9P와 같은 2.3㎜였다는 건 당시 업계에서는 센세이션에 가까울 만큼 놀라운 성취였다.

알티플라노 스켈레톤 측면.

알티플라노 스켈레톤 측면.

무브먼트의 두께가 시계 두께에 미치는 영향은 가히 절대적이다. 두께가 얇은 무브먼트를 제작할 수 있는 충분한 기술력을 가진 제조사가 과거에나 지금에나 손에 꼽을 정도로 적기 때문에 기계식 손목시계 역사에서 얇은 시계, 또는 이를 가리켜 통칭하는 용어인 ‘울트라-씬’(Ultra-Thin) 시계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피아제는 울트라-씬 시계 제조분야의 선구자로서 탁월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1960년대 말부터 80년대 후반까지 본업인 워치메이커로서보다는 주얼리 브랜드로 더 유명세를 떨치던 피아제는 현 리치몬트 그룹에 합류한 이후인 1990년대 들어 새로운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특히 1998년에 첫선을 보인 알티플라노(Altiplano·남미 아르헨티나의 한 고원 이름)는 과거 울트라-씬 명가였던 피아제의 완벽한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알티플라노 43㎜ 정면.

알티플라노 43㎜ 정면.

당시 두께가 2.1㎜밖에 되지 않는 또 하나의 얇은 수동 무브먼트 430P를 선보였는데, 이는 500원짜리 동전의 두께에 비견할 만했다. 시계 케이스 전체 두께 역시 5㎜가 조금 넘는 수준으로 손목 착용 시 피부와의 밀착력이 뛰어났다. 알티플라노는 과거 피아제의 울트라-씬 시계들이 그러했듯 그 태생부터 현대의 신사들을 위해 탄생한 시계였다. 

또한 세계 최고급 주얼리를 제작하는 브랜드답게 고급스럽게 마감된 18K 골드 케이스에 바우하우스 디자인을 연상시키는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다이얼, 그리고 한 명의 워치메이커가 수작업으로 정성스럽게 조립하고 다듬은 얇고 아름다운 무브먼트가 탑재된 알티플라노 시계는 등장과 동시에 피아제 시계를 대표하는 컬렉션으로 자리매김한다.

500원짜리 동전 두께의 자동 무브먼트
지난 2010년은 피아제에겐 또 한 차례 기념비적인 해였다. 세계에서 가장 얇은 기계식 자동 무브먼트로 기록된 피아제의 12P 탄생 5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해 발표한 1208P가 그것이다. 무브먼트 두께 2.35㎜, 이를 탑재한 알티플라노 시계 케이스 두께도 5.25㎜에 불과한 그야말로 초박형 시계였다. 이 시계는 세계에서 가장 얇은 자동 무브먼트 부문과 가장 얇은 자동시계 부문에서 기네스북에 등재된다. 

그해 알티플라노의 지면인쇄 광고 중에는 유독 시계의 옆면이나 무브먼트의 두께를 보여주는 형식이 많았는데, 이는 그만큼 얇은 기계식 시계 전문 제조사로서의 피아제의 강한 자신감과 오랜 노하우에서 비롯된 긍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500원짜리 동전 보다 약간 두꺼운 2.35㎜ 두께로 세계에서 가장 얇은 자동 무브먼트 신기록을 갖고 있는 피아제의 1208P.

500원짜리 동전 보다 약간 두꺼운 2.35㎜ 두께로 세계에서 가장 얇은 자동 무브먼트 신기록을 갖고 있는 피아제의 1208P.

피아제가 워치메이커로서 높은 평가를 받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들 무브먼트와 시계를 창립 초창기부터 전부 자체 매뉴팩처에서만 제작한다는 사실에 있다. 시계 제조의 전 과정을 외부의 도움 없이 오로지 자사의 기술과 시설, 인력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업체는 시계의 메카인 스위스 안에서조차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다.

하지만 피아제 시계 하면 국내에선 여전히 보석시계 이미지가 강한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주얼러로서 비약적으로 성공한 60년대에서 80년대 후반까지 피아제는 자사의 시계에 여러 귀금속을 화려하게 세팅하는 것을 즐겼다. 지금처럼 시계로서의 미적·기계적 가치를 논하기 이전에는 특권층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시절도 분명 있었다. 정경유착의 폐단인 불법 로비사건에 등장해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피아제는 고급시계와 무브먼트 제조사로서 잔뼈가 굵은 이 시대에 흔치 않은 진정한 매뉴팩처 중 하나이다. 이 브랜드를 알면 알수록 더욱 경의를 표하게 되는 데는 울트라-씬 시계 제작에 한결같이 투신해온 피아제의 진정성 있는 행보와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피아제는 투르비용과 미닛리피터, 크로노그래프, 퍼페추얼 캘린더에 이르기까지 세계에서 울트라-씬 무브먼트를 가장 다양하게 보유하고 있는 제조사이다.

특히 알티플라노는 피아제의 울트라-씬 개척 역사와 기술력을 망라한 브랜드의 핵심으로, 세월이 흐를수록 그윽함이 배어나오는 명품이다.

장세훈 <시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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