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게, 클래식 - 전통과 혁신을 아우른 마스터피스

2013.09.24

손목시계 이전 세대인 18~19세기만 하더라도 큰 괘종시계 내지 탁상용 시계, 그리고 휴대할 수 있는 시계로는 회중시계 정도가 전부였다. 그리고 이러한 시계들은 당시 왕가나 귀족, 명망 높은 지식인, 부유한 상인 계층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귀한 물건이었다. 동명의 소설과 오페라로도 친숙한 ‘카르멘’을 보면, 주인공 고고학자가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을 순회하다가 아름다운 집시 아가씨 카르멘을 만난다. 이때 카르멘은 고고학자의 골드 케이스 회중시계를 본 뒤 그것을 훔치려는 흑심을 품고 유혹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만큼 당시 휴대할 수 있는 시계라는 것이 얼마나 귀했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소개할 브레게(Breguet)는 바로 그 시대 18~19세기를 주름잡은 최고의 워치메이커였다. 당시 브레게의 고객 리스트만 보더라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1세, 영국의 조지 4세, 빅토리아 여왕, 윈스턴 처칠, 엘리자베스 2세 등 역사교과서에서나 나올 법한 유명 왕족과 정치가, 귀족들로 즐비하다.

시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가였던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1747~1823)는 고향인 스위스 뇌샤텔에서 시계 수리에 관한 기본기를 익힌 후 일찍이 자신의 재능 하나만을 믿고 혈혈단신 당시 유럽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파리로 진출해 큰 성공을 거둔다. 프랑스 대혁명(1789~1794) 때 다시 스위스로 망명길에 오르는 등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도 당대 최고로 혁신적이고 아름다운 시계를 끊임없이 만들어내 시계의 전설이 되었다.

이렇듯 스위스를 대표하는 하이엔드 워치메이커로 우뚝 선 브레게도 후손들 대에서 가업이 돌연 끊기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1970~80년대 기계식 시계산업 전반의 침체기와 함께 한동안 경영상의 위기를 겪기도 한다. 그러다 1999년 스와치 그룹에 인수된 후 니콜라스 하이에크 회장(1928~2010)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예전의 명성에 버금가는 다양한 종류의 고급 시계들을 선보이며 다시 최정상급 브랜드로 발돋움하게 된다.

브레게 클래식 라 뮤지컬.

브레게 클래식 라 뮤지컬.

시계 역사상 최고의 발명가 루이 브레게
현대 기계식 시계 제조의 기틀이 되는 여러 혁신적인 발명품들은 사실상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 시절에 이미 대부분 완성되었다. 최초의 셀프와인딩(로터의 회전에 의해 자동으로 태엽이 감기는 형태의) 시계였던 퍼페추엘(Perpetuelle·1780년)의 등장을 비롯해, 훗날 브레게의 상징이 된 정교한 패턴의 기요셰 다이얼(1786년)과 파랗게 열처리를 한 브레게 핸즈(1783년), 충격 흡수장치인 파라슈트(1790년), 일명 브레게 스프링으로 불리는 탄성과 내부식성이 탁월한 밸런스 스프링(1795년), 그리고 1801년에는 지지대 역할을 하는 케이지 안에 끊임없이 밸런스휠을 회전시켜 중력을 상쇄시키는 혁신적인 구조의 투르비용(Tourbillon·프랑스어로 회오리바람이란 뜻)을 발명해 컴플리케이션 워치의 지평을 획기적으로 넓혀 놓았다.

이렇듯 시계 역사에 길이 남을 수많은 발명과 명작들을 배출한 브레게이지만 현대적인 손목시계 형태로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1972년부터였다. 당시 뉴 클라시크 라인으로 소개된 시계들은 18~19세기 브레게의 대표적인 회중시계 및 탁상시계 등에서 직접적으로 그 다이얼 디자인을 빌려왔다. 18세기 방식 그대로 엔진터닝을 통해 일일이 섬세하게 패턴을 새긴 브레게 특유의 기요셰 다이얼과 고전미를 풍기는 우아한 형태의 로만 혹은 아라빅 인덱스, 얇고 가는 시·분침의 끝부분을 둥글려 구멍을 낸 독특한 형태의 블루핸즈 같은 디테일은 보다 확실하게 ‘브레게 스타일’로 규정되며 현대의 시계 애호가들에게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로 각인되었다.

전설적인 유산들을 손목시계 형태로 부활시킨 클래식(Classique·클라시크라고 읽어야 맞지만 국내 표기상 클래식으로 통일) 컬렉션은 스와치 그룹에 인수된 이후인 2000년대 초반부터 더욱 화려하게 만개한다. 1794년 단 6개만 제작된 쿼터 리피터 셀프와인딩 회중시계 No.5의 다이얼을 그대로 축소시킨(2시 방향에 문페이즈, 6시 방향에 초침, 10시 방향에 파워리저브 표시) 새 클래식 모델(Ref.3130)은 2001년 브레게가 발표한 가장 격조 있는 시계 중 하나였다.(현재는 이와 유사한 모델로 3137과 7137이 있다.)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 (Abraham Louis Breguet).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 (Abraham Louis Breguet).

오리지널 No.5의 명성은 오래 전부터 컬렉터들 사이에서 전설적이었다.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가 직접 완성한 이 특별한 마스터피스는 개인 소장가와 그들의 가문에 의해 오랜 세월 철저히 숨겨져 있었기에 더욱 미스터리하게 회자될 뿐이었는데, 이 중 한 시계가 경매에 출품되고 이를 니콜라스 하이에크 회장이 구입함으로써 현대의 손목시계로 다시 세상에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적 유산 현대적 손목시계 형태로 부활
현 클래식 컬렉션은 브레게 특유의 우아함과 개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과거에 비해 훨씬 다양한 디자인과 기능의 시계들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특히 브레게를 대표하는 기술 중 하나인 투르비용 모델의 비중이 크게 증가한 점이 눈길을 끈다. 이미 1988년 손목시계 형태의 투르비용 모델을 선보인 바 있고, 2001년 투르비용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해 여러 모델들이 추가됐으며, 2004년에는 업계 최초로 티타늄 브리지를 사용한 셀프와인딩 투르비용 무브먼트로 특허를 받았다. 그리고 2006년에는 2개의 투르비용을 장착한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트윈 투르비용(Ref.5347)을 발표해 투르비용 명가다운 기술력을 과시해 보였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전 스와치 그룹의 수장 니콜라스 하이에크 회장은 생전 한 인터뷰에서 “브레게는 아름다운 예술품과 진보된 테크놀로지 사이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룬 시계다”라고 호언한 적이 있다. 브레게의 엄청난 유산과 시계 업계에 미친 큰 영향력에는 누구도 이견을 달 수 없겠지만, 하이에크 회장의 발언 속엔 브레게만의 확고한 비전과 자신감 또한 함축돼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18세기 말 브레게 포켓워치.

18세기 말 브레게 포켓워치.

특히 가장 브레게다운 그 이름부터 고전적인 ‘클래식’ 컬렉션의 지난 10여년간의 변화를 보고 있노라면 왜 브레게가 진정한 하이엔드 워치메이커인지를 실감케 한다. 고풍스럽고 우아한 디자인에 전통방식 그대로 여전히 시계 제작 거의 대부분을 수작업으로 진행하지만, 반면 일부 부품에는 최첨단 반도체에도 들어가는 신소재를 업계에서 가장 빨리 도입하는 등 브레게의 현행 컬렉션은 전통과 혁신이 한 꼬투리 안에 보기좋게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 세기 전인 예나 지금이나 브레게의 시계를 실제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시계 애호가들 사이에서 브레게라는 이름은 럭셔리를 지칭하는 고유명사에 다름 아니다. 하나의 시계가 비단 사회적 지위와 부를 상징하는 기표 내지 물신에 그치지 않고 한 시대를 대표하는 명품, 나아가 예술품으로까지 격상될 수 있다는 것을 브레게의 시계들은 역사 속에서 충분히 증명해 보였다. 고도로 기계화되고, 대량생산이 판을 치는 현대사회에서 브레게는 수 세기에 걸쳐 농익은 스위스 장인정신을 대변하는 큰 산과 같다. 이 중 클래식 컬렉션은 브레게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단연 정수이다.

장세훈 <시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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