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철학적인 사유가 필요한 이유

2012.12.04

이번에 소개할 책은 <철학이 끝난 시대의 투쟁과 유토피아>(Struggle and Utopia at the End Times of Philosophy)이다. 이 예쁜 책을 손에 받아들고, 한 장 한 장을 조심스럽게 읽었다. 프랑수아 라루엘은 한국에 생소하지만, 비철학(non-philosophy)이라는 화두를 들고 다양한 사유를 선보이고 있는 프랑스 철학자다.

‘Struggle and Utopia at the End Times of Philosophy’(국내 미출간) 프랑수아 라루엘 지음·Univocal

‘Struggle and Utopia at the End Times of Philosophy’(국내 미출간) 프랑수아 라루엘 지음·Univocal

이 책은 철학과 정치의 문제에 대한 라루엘 특유의 제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영역판은 유니보컬(Univocal)이라는 신생출판사에서 나왔는데, 미네소타대학이 있는 미니애폴리스에 있다. 깔끔하고 수려한 타이포그래픽 디자인을 선보여서 책 자체의 예술성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비철학은 일반적으로 운위되는 반철학(anti-philosophy)과 다른 개념이다. 반철학이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한 이론가는 자크 라캉이었고, 그 개념을 알랭 바디우가 받아서 발전시켰다.

라루엘이 말하는 비철학은 반철학과 다른 것이다. 반철학이 철학 자체에 내재한 체계화에 반대하는 것이라면, 비철학은 그것 자체도 일종의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라루엘에 따르면, 모든 철학의 형식들은 선행하는 전제를 따를 수밖에 없고, 이런 까닭에 이 전제를 옹호하기 위한 논리로 일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선행하는 전제 자체에 대한 의심을 할 수가 없는 구조가 철학의 담론에 내재해 있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선행하는 전제를 라루엘은 “변증법적으로 분할된 세계”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세계의 운동과 관계없이 철학의 논리는 자율적으로 자체의 변증법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철학의 바깥, 말하자면 비철학적인 사유를 하지 않는 한, 이런 철학의 구조 자체를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라루엘의 주장이다. 비철학의 범주가 필요한 이유다. 그러나 비철학의 범주는 단순하게 메타철학을 의미하지 않는다. 레이 브라시에가 말하는 것처럼 “모든 철학은 메타철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메타철학의 차원도 벗어나야 철학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는 논리다.

물론 이 작업이 쉬울 수는 없다. 선험적 공리를 통해 선행하는 이론적 작업이 어떻게 가능하며, 철학적으로 해석불가능한 이론소(theorem)를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을지 힘든 일이다. 따라서 비철학은 수행성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라루엘은 이런 문제의식에 대해 화답이라도 하듯 이 책을 썼다. 그는 책에서 비철학의 두 가지 문제를 제시하는데, 존재와 타자의 관계에서 극단적 자율성을 주장할 수도, 그 기원과 필연성을 알아내기도 어려운 일자(One)의 한계가 그것이고, 자기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는 철학의 이론적 사태이다.

여기에서 일자의 한계라는 것은 생물학적인 차원이고, 철학의 사태는 자기 논리만을 반복생산하는 이론의 정태성을 의미한다. 이 둘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이른바 비철학의 의의인 셈인데, 이를 통해서 라루엘이 재구성하고자 하는 것은 현재의 국면을 타개하기 위한 실천이다. 철학에 대한 과학이라는 라루엘의 기획은 이런 맥락에서 ‘낯선 이들-주체’를 중심에 놓는 학문으로 나아간다. 철학으로 이해할 수도 없고 이론화할 수도 없는 영역은 일자의 한계와 자기인식을 결여한 철학 사이에서 발생한다. 라루엘이 천명하는 비철학은 이 영역에 대한 천착을 통해 사유의 구조를 전면적으로 점검하겠다는 야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이 책은 라루엘의 입을 통해 직접적으로 비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값진 것이다. 데리다 이후에 철학의 근본문제에 대해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의 철학에 대한 조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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