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시인의 사랑과 욕망, 질투

2012.05.01

롯데엔터테인먼트

롯데엔터테인먼트

제목 은교

원작 박범신 장편소설 <은교>

감독 정지우

출연 박해일, 김무열, 김고은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

등급 18세 관람가

러닝타임 129분

개봉일 2012년 4월 26일

10년도 넘은 일이지만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영화 <해피엔드>(1999)에서 유부녀 전도연은 대학시절 연인을 만나기 위해 자신의 아이에게 수면제를 탄 분유를 먹인다. 젖병 안에는 분유 안에서 마침 포식하고 있던 개미까지 딸려 들어간다. 그때였다. 앞좌석의 아주머니들이 분노의 소리를 질렀다. “저런 미친!” 한 아주머니가 소리를 쳤고, 다른 아주머니들이 “천벌을 받아도 마땅한…”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궁금했다. 왜 그 아주머니들은 자신들의 분노를, 뒷좌석에 앉은 다른 관객에게까지 들리도록 소리쳤을까.

영화 <은교>는 <해피엔드>를 만든 정지우 감독의 신작이다. 은교는 극중 여주인공의 이름이다. ‘국민시인’의 반열에 오른 노시인 이적요(박해일 분)는 산속 2층 양옥에서 은둔생활을 한다. 노총각 제자 서지우(이무열 분)가 시인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 단조롭기 그지없는 생활이다. 어느날, 이 두 남자가 외출해서 돌아와 보니 앞마당 흔들의자에서 난데없이 웬 처녀가 잠을 자고 있다. 잠에서 깨어난 그녀, 은교는 “담벼락에 사다리가 있길래…”라고 말한다. 두 남자는 어이없어 한다. 하지만 이내 상황에 적응한다. 은교는 그날부터 시인의 집에 드나든다. 은교의 존재는 이적요의 생활에서 활력소가 된다. 어느 비오는 날, 비를 맞고 찾아온 은교를 하룻밤 재운 노시인은 은교의 풋풋한 가슴을 훔쳐보며 자신의 가슴이 뛰는 것을 깨닫는다. 나이 70을 넘어 찾아온 사랑. 게다가 상대방은 여고생이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다. 속된 말로 주책바가지다. 시인은 소녀에 대한 ‘욕망’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승화시킨다. 은교라는 제목의 그 단편소설은, 세상에 발표되지 않고 묻힐 예정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그 글을 읽은 제자 서지우가 그 작품을 자기 이름으로 문학계간지에 내면서 이야기는 꼬여간다.

영화는 소설가 박범신의 동명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긴 것이다. 만약 홍상수 감독이 이 영화를 연출했다면 어땠을까. 이 영화는 욕망을 감추려 허둥대는 지식인 군상의 위선을 다룬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주의 깊게 ‘노인의 사랑과 욕망, 질투’에 대해 면죄부를 준다. 이적요는 민주화운동으로 투옥의 경험이 있다. 지지고 볶고 사랑을 나눌 청춘을 감옥에서 보낸 인물이다. 한 번뿐인 삶에서 그건 어떤 걸로도 보상할 수 없는 경험이다. 적어도 영화상에서 이적요가 그 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는지, 정상적인 가정을 꾸릴 수 있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자신에게 은교를 뺏어간 제자에 대한 복수 부분도 마찬가지다. 감옥에서 차량정비 기술을 공부한 그는 제자가 몰고온 차 바퀴를 펑크내놓고, 자신의 사륜 구동차의 시건장치를 일부러 고장내놓는다. 살인의 의도가 있지만, 그렇다고 그의 행동이 ‘결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다.

영화의 도입부, 아침에 일어나 옷을 갈아입던 이적요는 자신의 움츠러든 성기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박해일의 성기노출 장면은 ‘아주 자연스럽게’ 영화 속 한 장면으로 처리된다. 젊은 까까머리 이적요가 은교와 성애를 나누는 장면도 아주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다.

1980년대 에로장면이 등장할 때 극장의 분위기가 떠오른다. ‘이제부터 정사장면입니다’라는 식으로 배경음악이 깔리면 극장 안은 갑자기 이상야릇한 진지한 공기에 사로잡혔다. 모두들 숨을 죽이며 ‘장면의 도래’를 기다렸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의 에로영화 속 성애장면은 확실히 과장되어 있었다.

<은교>의 성애장면은 보다 사실적이면서도 아름답다. 욕망에는 대가가 따른다. ‘존경하고 고귀한 분’인 이적요를 망쳐서는 안 된다는 제자 서지우는 또다른 분신이자 이적요의 거울이다. 영화 제작진이 우연히 섭외했다고 하지만 이적요의 집 역시 그의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은유다. 이적요는 자신이 작성한 단편소설 ‘은교’를 ‘지하 서재’ 반짓고리에 담아둔다. 집의 유리창·유리문은 세상과 그를 격리시키면서 동시에 내면에 침잠하게 하는 상징이다. 이적요가 욕망에 눈을 뜰 때 은교가 유리창을 닦고 있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다시 은교와 제자의 정사장면을 보면서 질투를 느끼는 게 밤의 유리창 너머라는 것도 짚어볼 만하다. 무엇보다도 이야기를 끌고가는 영화의 힘은 감독의 연출력에서 나온다. 꽤 괜찮은 수작(秀作)이다. 박해일이 청년시절 이적요와 70대 노인 이적요 역을 동시에 맡았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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