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기업인인가, 더러운 정치인인가

2010.11.02

탁신

파숙 퐁파이칫 크리스 베이커 지음·정호재 옮김·동아시아·1만8000원

파숙 퐁파이칫 크리스 베이커 지음·정호재 옮김·동아시아·1만8000원

지난 3월 14일 태국. 탁신 전 총리를 지지하는 레드셔츠 시위대가 반정부 시위에 돌입했다. 이들은 4월에는 방콕 시내로 진입해 정부군과 충돌했다. 도심 한복판에 피가 뿌려졌다. 해외 망명 중인 탁신은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게릴라전이 벌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겉으로만 보면 정부가 군대를 동원해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진압한 사건이다. 속사정은 단순하지도 명쾌하지도 않다. 탁신은 레드셔츠로 대표되는 민중의 영웅인가, 아니면 반탁신 세력이 주장하듯 부패한 정치인인가. 

태국의 얽히고 꼬인 정치적 상황은 쉬운 해답을 허락하지 않는다. <탁신>은 그 복잡한 실타래를 탁신이라는 문제적 인물의 행적에 대한 꼼꼼한 기록과 세밀한 분석의 힘으로 풀어낸 책이다. 1부는 탁신이 총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2부는 그 이후의 상황을 기록했다. 태국의 대표적인 비판적 지성이자 경제학자인 파숙 퐁파이칫과 그녀의 남편이자 영국 출신 저널리스트인 크리스 베이커가 함께 썼다.

1990년대 초반 단기간에 태국 최고의 재벌이 된 탁신 친나왓은 2001년 2월 태국 총리로 선출됐다. 선거에서 그는 성공한 기업인이자 정치적 개혁가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그는 농민, 노동자, 지식인, 승려에 이르는 광범위한 계층의 지지를 받으며 여당인 민주당을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선거 전 재산 은닉 혐의로 수사를 받았지만 무혐의로 처리됐다.

탁신은 국가 경영을 기업 경영과 동일시했다. “기업은 일종의 국가입니다. 국가는 하나의 기업입니다. 둘은 같습니다.” 탁신 정부가 추진한 ‘탁신노믹스’는 자국 기업에 대한 보호와 지원을 통해 1997년 금융위기의 파고를 넘어서려는 성장지향적 경제정책이었다.

국가를 기업과 동일시한 탁신은 국가주의를 추구했다. 저자들은 “그가 그린 이상적인 정치제도는 국민이 국가에 자유와 권리를 양도하고 국가는 사심 없고 비전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기업과 같이 운영되는 것이었다”고 평가한다. 

탁신은 자신이 무오류의 정치가라고 생각했다. 자신에 대한 공격을 곧 태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했다. 탁신 내각은 시위의 자유를 억압하는 법률을 잇따라 입법했다. 언론의 자유도 위축됐다. 탁신은 총리가 되면서 친나왓 그룹 경영에서 손을 뗐지만, 그룹은 온갖 특혜를 먹고 급성장했다. 개혁성향 지식인들과 시민단체가 등을 돌리자 그는 포퓰리즘에 기댔다. 소외계층을 위한 정책을 공세적으로 쏟아냈고, 농민과 빈민은 환호했다. 탁신 지지세력과 반대세력이 계층적으로 갈리게 된 계기다. 이런 상황에서 군부는 왕실의 비호를 받으면서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주화의 결과로 힘을 얻은 사법부는 법질서의 이름으로 탁신에게 징역형을 선고하고 재산몰수를 명령했다.

저자들은 “그는 위대한 영웅이기도 하지만 혹은 더러운 정치인이기도 하다. …그는 엄청난 규모의 돈을 벌기 위해 정계로 진입한 비즈니스맨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그는 민중의 지도자로 등극했다. …역사란 때로 무척 골치 아픈 것”이라고 말한다.  

책은 군사독재와 경제성장, 민주화와 신자유주의의 공세 등으로 교착돼 있는 한국 상황과 겹쳐지면서, 500여쪽에 이르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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