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항쟁은 무엇을 지켜 내려 했는가

글·김호기 연세대 교수, 사진·김석구 기자
2010.05.25

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인간 존엄성에 대한 뜨거운 사랑

「Weekly 경향」의 연중기획 ‘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는 5월 한 달 동안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뤘다. 30년 전 5월에 있었던 광주시민들의 항쟁은 지금도 여전히 한국 현대사의 뜨거운 상처로 남아 있다. ‘5월 광주’는 그 자체로 밀도 높은 분노와 슬픔을 불러일으키며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견인했다. 5월 광주의 기억이 한국 사회 민주화를 위한 비옥한 토양이었다는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4회에 걸친 5·18 연재를 마무리하는 이번 기고에서 김호기 교수는 광주항쟁은 결국 인간 존엄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표출이었다고 평가한다. <편집자주>

광주항쟁 당시 희생된 시민들이 잠들어 있는 광주시 북구 운정동 5.18민주묘지.

광주항쟁 당시 희생된 시민들이 잠들어 있는 광주시 북구 운정동 5.18민주묘지.

올해 광주항쟁 30주년은 여러 가지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역사적인 30주년 기념행사에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은 것도 그렇지만 공식 행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외된 일도 당혹스럽다.

외교 행사 일정이 잡혀져 있어 30주년 기념행사에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기 어려웠다는 것은 다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광주항쟁을 상징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공식 행사에서 제외한 것은 아무리 보수 성향의 정부라 해도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그동안 광주항쟁 관련 행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린 이유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 노래에 담긴 상징성에 있다.

인간과 역사에 대한 예의
무릇 예술 작품은 그 자신의 독자적인 미적 성취 이외에 나름대로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지니고 있게 마련이다. 이 땅에 사는 적지 않은 이들이 최인훈의 <광장>과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를 높이 평가하고 여전히 사랑하는 이유는 예술성 못지않게 이 작품에 담긴 ‘광장’의 민주주의 또는 ‘한라에서 백두까지’의 민족주의라는 상징성에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도 마찬가지다.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는 후렴은 1980년대 우리 사회와 사회운동을 집약한 복합적 울림을 담고 있다.

현실 사회가 서로 다른 정치 세력들이 경쟁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한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대한 평가도 물론 세력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내심 불편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현실의 이분법을 넘어선 곳에 위치한 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옹호이며, 역사에 대한 예의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광주항쟁을 추모하는 것은 민주화운동에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던진 시민들의 희생정신을 기리는 데 있으며, 바로 그 자랑스러운 행위에 대해 같은 인간과 국민으로서의 예의를 표하는 데 있다.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 사소한 사건일지 몰라도 이번 사건은 1980년대를 살아온 이들에게는 황당함을 넘어선 깊은 쓸쓸함을 안기는 사건인 셈이다.

더욱이 지난 4월 29일 5.18국립묘지에서 예기찮게 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에 대한 선명한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어떤 비애감마저 느꼈다. 광주항쟁은 이념적 입장에 따라 해석을 달리할 수 있는 ‘정치적 의제’가 아니다. 그것은 목숨을 걸고 우리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한 사회운동이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랑스러운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돼야 하는 것이다.

국립묘지를 둘러본 다음 우리는 곧바로 금남로로 향했다. 가장 최근에 금남로를 찾은 것은 2008년 봄이었다. 촛불집회가 한창 진행되던 그때 광주 YMCA에서 촛불집회의 의의에 대한 발표를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나는 사회학 연구자로서 촛불집회에 관한 강연과 발표를 이곳저곳에서 하고 있었다.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광주시민들이 보여 준 관심이었다. 발표 후 예정된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시민들과의 토론은 계속 이어졌다. 그때 나는 왜 광주가 ‘민주화의 도시’로 불리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었고, 이 도시에 연연히 흐르는 광주항쟁의 정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동안 시간이 흐르면서 광주항쟁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관심은 조금씩 변화돼 온 것으로 보인다. 항쟁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이 시민적 관심으로부터 멀어지는, 다시 말해 다소 형식화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과정에서 항쟁이 잊혀져 가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일상으로 복귀하면서 항쟁에 대한 기억은 심층의식으로 이동하며, 이 심층의식이 촛불집회와 같은 국면에서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우게 했다고 이해하고 싶었다.

김호기 교수가 1980년 당시 계엄군이 시민들을 구금했던 상무대 영창 앞에 서 있다.

김호기 교수가 1980년 당시 계엄군이 시민들을 구금했던 상무대 영창 앞에 서 있다.

널리 알려졌듯이 금남로는 광주의 중심지다. 2004년 시청이 상무지구로 이전하면서 상권이 그쪽으로 적잖이 이동했지만 옛 도청에서 시작해 길게 뻗어 나간 금남로는 여전히 광주의 경제적·문화적 거점을 이룬다.

광주 밖에 사는 이들에게 금남로는 무엇보다 광주항쟁의 현장으로 기억된다. 1980년대에 해마다 5월이 되면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로 시작하는 ‘오월의 노래 2’를 부르게 되면서 적지 않은 대학생들에게 금남로라는 지명은 마음 깊이 각인됐다. 금남로의 끝에 위치한 옛 도청 건물은 항쟁의 본부였으며, 당시 앞에 있는 분수대를 중심으로 각종 집회가 열렸다고 한다. 1996년부터 5.18민주광장으로 불리고 있는 이 광장에 박태균 교수와 함께 서니 여러 생각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우리 현대사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두고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뜨거운 논쟁이 진행돼 왔다. 역사·사회학적으로 과거는 지나간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과거는 끊임없이 새롭게 발견되고 재해석되며, 무엇보다 현재의 의미를 구성한다. 바로 이 점에서 과거에 대한 올바른 인식, 즉 ‘역사 바로 세우기’는 우리가 놓여 있는 현재에 대한 탐구라 할 수 있다.

물론 한 사회가 온통 과거사에 얽매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고 과거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외면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가’의 과거에 대한 탐구는 ‘우리는 누구인가’의 현재에 대한 질문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의 미래에 대한 모색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역사 바로 세우기’에 내재된 정치적 편향을 어떻게 할 것인가다. 이에 대해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과거 인식이라 하더라도 정치적 해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과거 없이 현재가 존재할 수 없듯이 현재의 정치 세력 또한 과거의 정치 세력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손익계산이 과거사에 대한 논란을 증폭시키는 이유이자 ‘과거의 정치’가 바로 ‘현재의 정치’인 이유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 현대사를 정리하고 평가하는데 과도한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정치적 의도가 과잉화될 때 과거사에 대한 평가는 정략적 싸움으로 변질되며, 이는 결국 과도한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게 한다. 정치적 해석에 앞서 중요한 것은 객관적 사실의 복원이며, 이 복원 과정에서의 역사와 인간에 대한 존중이다.

지나간 과거에 대해 반성할 것을 겸허히 반성할 때 과거는 비로소 정리될 수 있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관련 학계의 전문적인 연구에 귀를 기울이고, 시민사회의 여론 또한 존중해야 한다. 과거에 대한 역사 해석은 정부나 정당 어느 하나에 의해 독점돼서는 안되며, 정치권·학계·시민사회의 생산적 분업과 토론을 통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진정한 사랑 일깨우는 ‘묘비 없는 죽음’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5.18자유공원이었다. 자유공원은 항쟁 이후 법정 및 영창 등을 원래 자리에서 100m 떨어진 현재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고 항쟁에 관한 자료와 영상물을 전시하는 기념관이 있는 곳이다. 공원 바로 옆에 있는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발표한 적도 있지만 이 공원에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광주 금남로에서 시민들이 공수부대와 대치한 가운데 집회를 갖고 ‘전두환 퇴진’을 외치고 있다. | 5·18기념재단 제공

광주 금남로에서 시민들이 공수부대와 대치한 가운데 집회를 갖고 ‘전두환 퇴진’을 외치고 있다. | 5·18기념재단 제공

제법 넓은 곳에 위치한 공원 안에는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이 군사재판을 받던 법정, 6개 감방으로 이뤄진 영창, 고문과 조사를 받던 헌병대 중대 내무반, 고문수사 및 재판을 지휘한 계엄사합동수사본부 특별수사반이 임시본부로 사용한 헌병대 본부사무실 등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공원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마음은 다시 한 번 처연해졌다. 항쟁이 지니는 역사적·사회적 의미에 앞서 인간적 의미에서 항쟁에 희생된 이들의 삶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나라든 민주주의의 발전은 적지 않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에 의해 성취된 것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광주항쟁으로 희생된 이들이 지니는 의미는 항쟁의 참혹하고 비극적인 상황을 돌아볼 때 더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임을 위한 행진곡’과 함께 광주항쟁을 상징하는 대표적 민중가요가 ‘오월의 노래’다. ‘오월의 노래 2’가 항쟁 당시의 현실을 보여 준다면 ‘오월의 노래 1’은 광주 항쟁을 추모하는 곡이다. 1980년대 운동 현장에서 수없이 불린 이 노래는 노래를찾는사람들이 발표한 음반에 실리기도 했다.

“봄볕 내리는 날 뜨거운 바람 부는 날 / 붉은 꽃잎 져 흩어지고 꽃향기 머무는 날 / 묘비 없는 죽음에 커다란 이름 드리오 / 여기 죽지 않은 목숨에 이 노래 드리오 /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이렇듯 봄이 가고 꽃피고 지도록 / 멀리 오월의 하늘 끝에 꽃바람 다하도록 / 해 기우는 분숫가에 스몄던 넋이 살아 / 앙천의 눈매 되뜨는 이 짙은 오월이여 /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역사는 과연 무엇인가. 광주항쟁이란 역사는 과연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안기고 있는가. 광주항쟁에서 그들은 죽음으로써 과연 무엇을 지켜내려 했는가. 그 한가운데 놓인 것은 바로 사랑이지 않은가. 인간에 대한, 민주주의에 대한, 민족에 대한 사랑이 그들로 하여금 ‘묘비 없는 죽음’에 이르게 하고 ‘죽지 않은 목숨’으로써 살아 있는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을 일깨우게 한 것이 아니었는가.

자유공원을 둘러본 우리는 서울로 돌아오는 차에 몸을 실었다. 초록에서 녹음으로 가는 산하는 더없이 아름다웠지만 머릿속에 내내 떠오른 것은 지금 내가 보고 온 모습과 풍경들이었다. 짧은 하루의 시간을 통해 내가 다시 발견한 것은 바로 인간의 존엄성과 그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었다.

진정한 사랑은 그것에 모든 것을 걸고 지키려 할 때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에 광주항쟁은 우리 마음속에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주를 지나고 논산을 지나고 천안을 지나서야 창밖 풍경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시대인과 동시대 민주주의에 대한 사랑의 자각을 안고 나는 서울로 돌아오고 있었다.

<글·김호기 연세대 교수,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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