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북항쟁’ 노동자 인권을 외치다

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공권력 투입으로 유혈사태 불러…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아직 미완성

역을 나서니 사방이 산이다. 앞으로는 모텔이 즐비하다. 역전 시계탑에는 ‘가정의 행복까지 배팅하지는 마십시오’라고 쓰여 있다. 이곳 강원랜드 카지노를 찾는 이들에게 보내는 소박한 경고다. 읍내는 ‘노래마당’ ‘가든’ ‘한의원’ ‘안과’ ‘갈비’ ‘리프트 할인’ 간판으로 가득하다. 30년 전에 광원들이 기업과 어용노조, 경찰력을 상대로 전쟁 같은 투쟁을 벌인 사북의 오늘이다.

1980년 4월 동원탄좌 광원들이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이고 있다. |경향신문

1980년 4월 동원탄좌 광원들이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이고 있다. |경향신문

서울의 봄을 맞아 서울에서 정치적 해빙의 기대와 신군부에 대한 우려가 교차하던 1980년 4월, 사북에서는 동원탄좌 노동자들이 노동조건 개선을 내걸고 시위를 벌이다 공권력과 충돌했다. 지난 4월 22일 당시 지도부였던 이원갑 사북항쟁명예회복 추진위원장(70)과 함께 동원탄좌 노조 사무실을 찾았다. 형체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쓰는 이도 없고 찾는 이도 없는 건물은 버려져 있었다. 건물 앞 공터에는 온갖 잡동사니와 쓰레기 더미가 쌓여 있었다.

시위대 늘어나자 무장경찰 200명 진입
1980년 4월 21일 오후 동원탄좌 광원 100여 명은 노조 사무실에서 농성 중이었다. ‘노조지부장 직선제’와 ‘암행독찰’(사측의 노조원 감시) 폐지를 요구했다. 사무실 건물은 경찰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다. 오후 5시쯤 사달이 났다. 경찰은 “집회 허가가 나지 않았으니 해산하라”고 종용했다. 광원들은 하루 전인 20일에 경찰로부터 집회 허가를 받아 둔 상태였다. 그런데 하루만에 경찰의 태도가 바뀐 것이다. 광원들의 분위기가 격앙되자 광원을 가장해 노조 사무실에 들어와 있던 형사 한 명이 겁에 질려 밖으로 뛰쳐나가 지프에 시동을 걸었다. 광원들이 가로막았지만 차는 그대로 돌진했다. 광원 3명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죽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찰이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이 비등점을 향해 타오르던 광원들의 분노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분노는 삽시간에 사북읍 전체로 퍼졌다. 광업소 사무실, 사북지서, 회사 간부들과 노조 간부들의 집이 부서졌다. 밤새 시위대는 2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22일에는 무장 경찰 200여 명이 사북읍으로 들어왔다. 이때쯤 다시 50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철길을 경계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시위대는 경찰을 완전히 밀어냈지만 이 과정에서 경찰 한 명이 사망했다. 경찰이 철수한 뒤 시위대는 국도와 철로를 폐쇄했다. 이 위원장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4월 23일 밤 12시를 기해 공수부대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알게 됐다. 그래서 우리도 준비를 했다. 사북지서 무기고와 예비군 무기고, 탄광 화약고를 지켰다. 당시 탄광 화약고에는 700톤이 넘는 다이너마이트가 있었다. 공수부대가 들어오면 최악의 경우 화약고를 폭파시킬 생각이었다. 당시 광원들 사이에는 경찰이 섞여 있었다. 그래서 이런 사실이 고한 지서에 있던 경찰 대책본부 쪽으로 새 나갔다. 결국에는 거기 있던 도지사, 강원도 경찰국장 등과 협상해 24일 새벽에 농성을 해산하기로 합의했다. 우리가 무기고를 장악해 강하게 버티지 않았더라면 광주에서처럼 (학살)됐을지도 모른다.” 이로부터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신군부는 광주에서 일어난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했고, 서울의 봄은 끝났다.

이원갑 사북항쟁명예회복추진위 위원장이 1980년 당시 예비군 무기고와 동원탄좌 사무실이 있던 공터에 서 있다.

이원갑 사북항쟁명예회복추진위 위원장이 1980년 당시 예비군 무기고와 동원탄좌 사무실이 있던 공터에 서 있다.

노조 사무실 건물에서 불과 5m 거리에 당시 이 지역 예비군 연대 무기고로 쓰이던 단층 건물이 있다. 지금은 작은 슈퍼마켓이 들어앉아 있다. 예비군 무기고 바로 옆은 동원탄좌 사무실이 있던 공터다. 이곳으로 올라오는 좁은 비포장 도로 바로 아래에는 군사정권이 사북 항쟁 이후 주민 달래기 차원에서 지은 복지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그러나 사람의 흔적은 찾기 어려웠다. 건축 후 30년이 다 돼 가는 아파트 건물에는 폐허의 기운이 완연했다.

노동조건 개선과 어용노조 퇴진 요구로 시작된 광원들의 농성이 왜 공권력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유혈 사태로까지 번졌을까. 당시 동원탄좌는 민영으로는 최대 규모였다. 광원들의 급여는 작업량만큼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회사는 10톤을 캐내면 그 가운데 7톤만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돈을 떼어먹었다. 안전장구나 안전설비는 없었다. 샤워장이 없어 광원들은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로 귀가했다. 광원들의 집도 열악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얼굴만 씻는 게 전부였다. 회사는 ‘암행독찰’이라는 이름으로 광원들의 일상까지 통제하려 했다. 불만을 드러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불만을 토로하는 광원들에게는 일을 배당하지 않았다. 작업량이 없으면 돈도 없다. 사실상 해고였다.

열악한 근로조건에 일상까지 통제
노조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을까. 당시 동원탄좌 노조는 회사와 한 통속이었다. 징계위원회에 불려간 광원들은 회사 간부들이 보는 앞에서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어야 했다. 노조지부장은 그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회사는 노조지부장에게 물질적 혜택과 권한을 몰아줬고, 간접선거로 치러지던 지부장 선거는 향응으로 얼룩졌다. 이 위원장은 “지부장보다는 차라리 회사 과장에게 얘기하는 편이 나았다”고 회고했다. “광원들은 눈과 귀와 입이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중노동을 하면서 말 한마디 속시원하게 할 수 없었으니 얼마나 응어리가 맺혔겠는가.”

이원갑 사북항쟁명예회복추진위 위원장이 노동조합 건물 앞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원갑 사북항쟁명예회복추진위 위원장이 노동조합 건물 앞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1980년 4월에는 지부장 선거를 다시 해야 했다. 그 전해 선거가 부정선거로 무효 처리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지부장은 무자격 상태인 데도 회사의 비호를 받아 지부장 구실을 했다. 심지어 그해 3월 서울 창신동 전국광산노동조합에서 있었던 임금인상 교섭 현장에서 노조원들 모르게 회사 측 안대로 임금 협상을 타결했다. 항의하던 노조원들이 경찰서에 붙잡혀 가는 일까지 벌어지자 당시 노조 대의원이었던 이원갑 위원장은 “이제는 우리가 혁명을 할 때다. 단결해서 투쟁하자는 결심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파업 종료 후 정선경찰서에 설치된 합동수사본부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군사재판을 받고 1년 5개월을 감옥에서 보낸 뒤 보험사 영업사원, 옷장사 등을 하다 2년 전부터 사북항쟁 기념관인 ‘뿌리관’ 운영팀에서 일하고 있다. 이 위원장은 당시 지도부였던 신경씨와 함께 2005년에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 위원회’로부터 민주화 운동자로 인정받았지만 당시 고문을 받은 이들에 대한 명예 회복은 아직 완전히 이뤄지지 않았다.

2000년에 카지노가 들어선 사북에는 이제 광원들이 없다. 이후 급격하게 쇠락하던 광업소는 2004년에 완전히 문을 닫았다. 광원들은 모두 살길을 찾아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사북 지역 경제는 카지노와 인근 스키장을 찾는 방문객들이 쓰는 돈에 의지하고 있다.

이 위원장은 카지노로 올라가는 길목에 들어서 있는 전당포를 가리키며 “전당포가 70~80개 된다. 저 앞에 서 있는 차들은 다 전당포에 잡혀 있는 것이다. 카지노가 들어와서 지역경제가 살아나기는커녕 되레 인심만 흉흉해졌다. 역 앞 모텔도 장사가 안 된다. 스키 시즌에만 잠시 반짝할 뿐”이라고 말했다.

<글·사진·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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