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우리 소설의 거장 이청준에게 바치는 경의

2008.01.22

작가 이청준

작가 이청준

소설이 죽었다는 말은 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의 입에서나 나올 수 있는 농담이다. 나는 그런 사람에게 이청준의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를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 과연 이청준이다,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소설이 가 닿은 높은 경지를 보여준다. 이청준의 소설들은 화려한 기교나 능수능란한 입담, 이야기의 신기성을 쫓지 않는다. 이번 소설집에서도 그저 심심할 정도로 담담하게 뿌리가 뽑혀 ‘바깥’으로 내쳐져 헤매는 삶의 고단함에 천착할 뿐이다.

우리 소설의 거장(巨匠)이라는 명칭이 잘 어울리는 드문 소설가 이청준은 소설의 원형이라고 할 이야기에 주목한다. 그 이야기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주로 비극이지만, 이청준의 소설들은 비극을 넘어서서 더 높은 경지에 가 닿는다. 그것은 바로 일체의 아름다움을 넘어선 자리에서 더 아프고 찬연한 빛을 뿌리는 숭고의 미학이다. 그 숭고의 미는 “베일과 그 베일에 가려진 것이 미(美) 안에서 하나를 이뤄 벌거벗음과 가림 사이의 이원성이 존재하지 않는 지점”(벤야민)에서 나온다. 혹은 “‘베일로 가리지 않는 것’인 진실이 존재하고 나타나는 방식”(하이데거)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한 사람이 겪는 기가 막힌 헤맴과 그 속에 소용돌이치는 비극을 바라보고 알아내는 통찰의 눈, 적확한 언어구사와 유장한 리듬을 타고 흘러가는 문장들, 원숙의 경지에 다다른 작중인물들에 대한 완벽한 장악력, 그리고 소설 전체에 깃든 따뜻한 기품과 진정성이 이청준의 소설들을 명품으로, 숭고의 미학으로 견인한다. 이청준은 개별자의 구체적 체험의 세목들을 세세하게 살피면서도 그것을 개별자의 체험에 가두는 게 아니라 한반도인이 겪은 비극적 운명의 보편으로 이끌어낸다.

표제작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를 읽는 내내 마음이 뜨거워진다. 한 사람의 고단한 헤맴의 장정(長征)을 담담하게 적은 이 소설을 다 읽은 뒤엔 눈가에 이슬이 맺히고, 한동안 가슴이 먹먹하다. 이청준에 따르면 소설이란 기껏해야 한 사람이 감당해내는 ‘헤맴’을 적는 일이다. 그 ‘헤맴’은 어둡고 무섭고 끔찍한 일이다. 우리가 그 ‘헤맴’의 어두운 항로에서 선뜻 비켜서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삶이며,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인 까닭이다. 작가의 고백은 이렇다. “내가 아직도 제 소설질 길에선 헤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니. 그것은 아직도 자신을 씻기지 못했음일 것이다. 자신의 삶과 문학을 제대로 씻길 바르고 화창한 길을 찾지 못했음일 것이다. 그 삶과 문학에 그렇듯 단단한 신념과 밝은 빛을 얻지 못했음일 것이다.”(‘귀항지 없는 항로’)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br>이청준 지음·열림원·2007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이청준 지음·열림원·2007

이청준의 소설은 태어난 고향과 나라에서 살지 못하고 제 힘과 의지로는 어쩔 수 없이 ‘바깥’으로 내몰려 헤맴의 삶을 감당해야 했던 이들의 아픔과 비극을 위로하고 씻어내는 씻김굿이다. 강제로 내몰려 유랑하던 디아스포라의 귀환이 꼭 즐겁거나 행복한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라는 작품에서 여실하게 드러난다. 전쟁 중에 가족이 모두 학살당하고 구사일생으로 혼자 살아난 외종형이 그 비극을 극복하지 못하고, 젖 염소 한 쌍만 끌고 산골짜기로 홀연 종적을 감췄다가 맞은 이른 죽음이나, 여덟 살 때 한반도 서남단의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 소련령 연해주 지역으로 갔다가 다시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황무지 벌판에 버려져야 했던 그 신산스런 헤맴의 삶을 묵묵하게 감당한 형 일승을 통해 20세기를 살아온 한반도인의 비극이 파열하듯이 드러난다. 이청준의 소설들은 그 비극이 개별자의 그것이면서 동시에 한반도인의 살아냄 보편에 잇대인 것임을 말해준다.

60대 중늙은이 유재승씨는 맏형 일승씨가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된다. 재승씨는 고희 길에 들어선 맏형 일승씨의 고국 방문 초청 절차를 서두른다. 그 결과 일승씨는 여덟 살 때 고향 강진을 떠난 지 근 70년 만에 20여 명의 교민 일행과 함께 고국 땅을 밟는다. 재승씨는 핏줄을 함께 한 맏형의 방문에 설레고 기뻐하며, 그 격동의 세월을 견디고 살아서 돌아온 맏형에 대한 존경과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마침 한·일 월드컵 경기가 벌어지는 때라 거리에는 붉은 셔츠의 인파가 넘쳐났다. 재승씨는 맏형과 함께 한국의 축구팀을 응원하며 고국의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고 한국인으로 사는 일의 긍지와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그러나 맏형의 반응은 심드렁 그 자체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사람들과 풍경을 바라보거나 더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음소리를 내뱉는다. 재승씨는 그런 맏형의 속내를 도통 알 수 없어 애를 태운다. 일승씨는 “고향 땅은 한 번 밟고 돌아가야 도리가 아니겠는가” 하며 고향을 찾아 일가친척들의 융숭한 환대를 받고도 좀처럼 침체된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고향 방문을 의례를 치르듯 마친 일승씨는 서울로 돌아와서는 서둘러 짐을 싸고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고 그 뒤로는 연락마저 뚝 끊기고 만다.

무엇이었을까, 70년 저쪽의 세월과는 견줄 수도 없게 부자나라가 되어버린 이땅에서 일승씨가 흔쾌하게 고국의 발전과 풍요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한 것은. 그것은 ‘불편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이름만 빼고 고국의 말과 기억들을 모두 깡그리 잊어야 했던 그가 다시 잊은 것을 되살려내는 일은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삶의 불편한 진실과 맞대면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일승씨는 그 사실을 이렇게 되뇌인다. “그렇게 한사코 내 모든 걸 잊고 소련 사람이 되려고 마음속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운 게야.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그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게 이나마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게야.” 오늘의 삶을 버텨내기 위해서 잊어야 했던 고향과 고향 말, 그리고 기억들은 일승씨에게 무섭고 외롭고 끔찍한 진실이다. 망각하기는 저 무지막지하고 불가항력적인 운명의 폭력에 대한 소극적 항거였던 것이다. 동생 재승씨가 알 수 없었던, 결국에 어렴풋이나마 공감하게 된 진실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제 뿌리를 부정하는 일이 실존의 찢김을 감당하는 고통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이청준이 평생의 화두로 안고 살았던 ‘소설질’이란 무엇이었을까 ? 그것은 귀항지 없는 항로를 찾아가는 일이다.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은 “끝없는 장애와 의구심을 앞에 한 깜깜한 어둠 속의 외로운 행로”이며, “혼자 가는 길, 앞을 알 수 없는 길, 믿음이 없는 길”에 한줄기 전짓불을 밝혀주는 일이다(‘귀항지 없는 행로’). 씌어 있지 않은 인물들의 종주먹질로 시작되는 이청준의 소설쓰기는 깜깜한 어둠 속에 주저앉기가 아니라 그 어둠 속을 헤치고 나아가는 일이고, “우리가 짐짓 눈감아온 인성(人性)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한 암중모색이며, 부조리한 현실과 제도들이 가리고 있는 삶과 세계의 진정성을 찾고 드러내는 노릇이다.

아울러 영문도 모른 채 비극의 덤터기를 쓰고 외롭고 끔찍한 행로를 나아가며 영혼이 으깨어져버린 이들의 영혼을 위령하는 일이며, 그 영혼의 억울함과 노여움을 씻겨주는 씻김굿이다. 이청준은 남의 말이라는 형식을 빌려 제 소설쓰기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네 소설은 그 깨진 영혼들의 존재, 그 밤 산길의 보이지 않는 독행자들의 존재를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다. 자신만이 그 어려운 어둠 속 길을 가지 않고 다른 수많은 사람도 각기 자신의 어둠 속 산길을 외롭고 힘들게 가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은 우리 삶의 길에 대한 근본적 이해뿐 아니라, 그 각각의 독행자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일이냐. 네 소설은 적어도 그것을 할 수 있다.”(‘귀항지 없는 항로’)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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