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집배원 노조 ‘정치 표현의 자유’

2008.01.01

힐러리 클린턴 미 상원의원(왼쪽)이 집배원노조 글씨가 씌어 있는 티셔츠를 선물받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 미 상원의원(왼쪽)이 집배원노조 글씨가 씌어 있는 티셔츠를 선물받고 있다.

'사상 초유의 실험, 과연 어떻게 될까.’
길고 지루한 대선은 끝났지만, 노동계의 실험은 이제부터다. 한국노총이 선거 막바지 ‘정책연대’라는 형식으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지지를 선언한 게 어떤 모습이 되어 돌아올지 관심이 쏠리는 것이다.

한국노총은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노동단체다. 3429개 노조에 조합원 75만5000여 명이 가입해 있다. 집배원 중심의 한국체신노조(조합원 1만7000명)도 이곳 소속이다.

하지만 체신노조는 ‘이명박 지지’ 선언에 동참하지 않았다. 한국노총이 정책연대를 앞두고 연 전국노동자대회에는 체신노조 이원희 위원장도 참석했으나, ‘어느 후보를 지지하느냐’는 내용의 ARS 설문조사에는 조직 차원에서 응하지 않았다. 체신노조 기원근 홍보국장은 “한국노총의 협조 요청을 받긴 했으나, 우리는 공무원 신분이어서 설문에 참가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고 말했다. 현행 국가공무원법과 지방공무원법, 공무원노조법 등은 공무원의 정당 가입이나 후원, 선거 때 정책지지 등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체신노조가 대선국면 속에서 정치적 의사 표시를 하고 싶었다 해도 현행법상 방법은 없다. 이런 법의 제약 때문인지 집배원들의 정보교환 사이트인 집배원닷컴(www.hipost.com)에도 선거기간 내내 정치적 언급은 한마디도 올라오지 않았다. 그래도 집배원 개개인의 생각마저 없을 수는 없다. 소속 상급단체가 외국처럼 특정 후보를 밀었고, 그 후보가 당선되었으니 나름대로 평가와 기대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미국에선 공무원 노조라 해도 정치활동이 열려 있다. 일반 기업의 노조단체는 선거 때마다 후보별 정책을 받아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활동을 한다. 노조의 정치활동 자체를 마뜩찮은 시각으로 보는 우리와는 사회적 풍토가 다른 것이다. 한국노총이 조직 차원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한 것도 따지고보면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의 집배원들은 모두 연방 공무원이다. 도시집배원의 경우 집배원노조(NALC)에 가입해 있다. 조합원 수는 30만 명. 미국이 아무리 큰 나라라고 해도 30만 명이라면 어느 정치인도 무시할 수 없는 거대 노조다.

NALC는 지난 9월 민주당 내 경선후보 가운데 힐리리 클린턴 상원의원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선언하기까지 절차는 한국노총이 밟은 것과 거의 같다. 모든 후보에게 정책질의를 보내고 그 회신내용을 조합원에 제시한 뒤 투표를 실시한 것이다. 한국노총은 이명박 후보가 41.5%, 정동영 후보가 31%의 지지를 얻었다고 투표 결과를 공개했지만, 미 집배원노조는 ‘관례’를 이유로 후보별 득표율을 공개하지 않았다. 공화당 후보는 NALC의 질의에 응답하지 않아 애초부터 배제됐고, 민주당 후보 중에서 선택하는 방식이었다.

윌리엄 영 NALC 위원장은 “클린턴 후보가 집배 업무 외주화 금지법안을 포함해 우리 노조가 중요시하는 정책에 대해 가장 강력히 지지했다”고 말했다.

이 노조의 클린턴 지지선언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집배원 노조를 비롯해 미국의 노동자단체는 전통적으로 민주당 후보를 지지해왔다. 올해 다른 점이 있다면 민주당 내 후보가 정해지기 전에, 당내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도중에 지지 후보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민주당 경선에서 이긴 사람이 대통령으로 유력하다는 미국 내 정치 환경을 반영하는 셈이다.

한국노총이 보수당 후보를 선택한 것처럼 미국에서도 노조가 공화당을 지지한 적이 아주 드물지만 있다. 1980년 대선 때 항공관제사 노조가 민주당의 지미 카터 대신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후보를 지지한 것이다. 그 뒤 어떻게 됐을까. 레이건이 집권하고 몇 달 뒤 이 노조가 임금문제로 파업하자 레이건은 “정부 노동자의 파업은 불법”이라며 수천 명을 해고하는 강경조치를 내렸다.

〈이종탁 경향신문 논설위원〉 jt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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