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고르와 도린, 사랑을 통해 하나로 거듭나다

2008.01.01

[독서일기](44)고르와 도린, 사랑을 통해 하나로 거듭나다

앙드레 고르는 1923년에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난 철학자이자 이론가다. 노동시장에서 최저임금제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생태주의 이론을 정립한 이 분야의 초기 이론가의 한 사람이다. 사르트르는 신좌파의 이론가로 ‘68혁명’에 큰 영향을 끼친 그를 가리켜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라고 말했다. 사회 개조와 생태주의의 이념을 추구해야 할 가치로 삼고 살았던 고르는 2007년 9월 22일 “세상은 텅 비었고, 나는 더 살지 않으려네”라는 말을 남기고 살던 집에서 죽음을 앞둔 아내와 동반자살한다. 이 사랑! 죽음마저도 한날 한시에 맞고자 하는 이것이 바로 사랑의 숭고한 힘이다. 아내가 없는 세상을 단 하루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고르에게 동반자살은 삶과 사랑의 완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나는 지킬 약속들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가야 할 길이 있다”고 노래한다. 망각에 저당잡힌 채 살고 있지만, 우리 모두는 시시각각으로 죽어가고 있는 존재들이다. 삶의 부조리함은 죽음과 상실의 현존이라는 피할 수 없는 조건에서 생겨난다. 사람은 태어나는 시각부터 죽음을 향해 나가는 존재다. 우리는 날마다 조금씩 죽어간다. 죽음이 우리에게서 존재를 박탈하기 전에 우리에겐 지킬 약속들과 가야 할 길들이 있고, 그것이 공허와 무로 기우는 우리를 바로 세운다. 살아 있는 시간들은 죽음의 집행에서 유예된 시간들이다. 어쨌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이 일으키는 공포감은 삶을 가난하고 누추하게 만든다. 그러나 죽음이 가난하고 누추하게 만든 삶을 풍요한 것으로 바꾸는 마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절대의 사랑이다. 그 사랑이야말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약속들, 그리고 가야 할 길의 전부다.

D에게 보낸 편지 | 앙드레 고르·임희근 옮김·학고재·2007

D에게 보낸 편지 | 앙드레 고르·임희근 옮김·학고재·2007

스물네 살의 남자와 스물세 살의 여자는 2차세계대전 직후의 파리에서 처음 만난다. 두 젊은이들을 감싸고 있는 것은 존재의 불확실성, 불안한 정체성이다. 그것은 특히 자기 분석에 따르면 불쌍하고 나약하며 의존적인 앙드레 고르에게 더 심하다. 도린은 그런 고르를 사랑하고, 평생에 걸쳐 헌신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도린의 사랑과 헌신이 자기 배반의 삶을 살던 고르의 삶에 실존적 전환을 가져온다. 한 남자가 평생을 함께 한 여자에게 보내는 편지의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사랑의 현재성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대목들이다. 사랑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는 더더구나 아니다. “올바른 시간은 오직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뿐이다. 그 시간은 바로 지금이다.”(헨리 제임스) 누가 먼 훗날 사랑을 약속한다면 그 유예된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거짓과 위선으로 얼룩진 허언이다. 여기 있음으로써 우리는 다른 아무 곳에서 있을 수 없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지금 여기의 사랑이 진실이 아니라면 저기 다른 곳의 사랑도 없다. 사랑은 언제나 현재를 거점으로 하고 생명을 거름삼아 활짝 꽃을 피운다. 사랑은 마음에서 몸으로 이어지고 몸은 다시 마음으로 이어진다.

‘D에게 보낸 편지’는 앙드레 고르가 죽음을 앞둔 사랑하는 이에게 보내는 편지인 동시에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통찰이고, “내가 존재하고 기능하는 방식에 대한 임상적 초상(肖像)”이다. 고르의 편지는 “당신은 곧 여든 두 살이 됩니다. 키는 예전보다 6㎝ 줄었고, 몸무게는 겨우 45㎏입니다”라고 담담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당신은 고르의 아내이자 연인인 도린을 가리킨다. 그들은 1947년에 처음 만나 이태 뒤에 결혼하고, 58년 동안을 함께 살아왔다.

그런데 도린은 허리디스크 수술 때 엑스레이 촬영을 위해 투여한 혈관 조영제의 부작용으로 거미막염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린다. 고르는 도린을 간호하기 위해 생업을 손에서 놓고 시골로 내려가 스무 해 동안이나 거기서 보낸다. 고르는 파리에서 150㎞ 떨어진 시골마을 보농에서 도린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유기농산물을 사러 다니고, 대체요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두 사람은 생태주의에 따른 삶의 방식, 자연에 온전히 순응하는 생활, 즉 낭비가 없는 살림, 씨를 뿌리고 나무를 가꾸는 생활, 진솔한 대화와 글쓰기로 채워진 느림과 비움의 삶을 산다. 그 대척적인 자리에는 그들이 혐오한 “낭비, 스모그, 케첩 바른 감자튀김과 코카콜라, 거칠고 지옥 같은 리듬의 도시생활로 대표되는 미국 문명”의 삶이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실존주의적인 자기 고백서이기도 하고, 생태주의적인 삶의 보고서이기도 하다.

이 책은 아주 얇다. 그러나 읽는 내내 마음이 시리다. “나는 내 인생을 직접 산 게 아니라 멀리서 관찰해온 것 같았습니다. 자신의 한쪽 면만 발달시켰고 인간으로서 무척 빈곤한 존재인 것 같았지요. 당신은 늘 나보다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모든 차원에서 활짝 피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삶을 정면돌파했지요. 반면에 나는 우리 진짜 인생이 시작되려면 멀었다는 듯 언제나 다음 일로 넘어가기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다른 두 사람은 사랑을 통해 하나로 거듭난다. 고르와 도린은 한날 한시의 죽음에 자신들의 삶과 사랑을 겹쳐놓는다. 사랑은 추상도 관념도 아니다. 사랑은 인간적 감수성 안에서, 그리고 심장과 심장을 맞대고 끌어안는 포옹 속에서 인격과 취향이 다른 두 사람을 하나로 통합한다.

“나쁜 포옹이라는 것은 없다―/오직 좋고 위대한 포옹들만 있다./포옹들은 살을 찌우지도 않고,/포옹들은 암 또는 충치들을 일으키지 않는다./포옹들은 모두 자연적이다―/방부제, 인공적인 합성물들 또는 살충제의 잔재를 가지지 않는다./포옹들은 콜레스테롤도 없고, 천연적으로 달콤하고,/백퍼센트 건강에 좋다./그리고 포옹들은 완전하게 재생할 수 있는/천연의 자원이다.”(작자미상, ‘죽음학의 이해’, 케네스 J. 도카/존 D. 모건 엮음) 죽음마저도 그 포옹을 갈라놓을 수 없었다. 죽음마저도 능히 넘어서는 이 사랑의 현존은 기적이다. 철저히 버림받은 쓸모없는 존재를 숭고한 사랑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만드는 게 사랑이다. 이 기적 앞에서 내 마음의 금(琴)은 한없이 떨며 여린 소리를 낸다. 내 속눈썹은 나도 모르게 몇 방울의 물기로 젖어든다.

앙드레 고르에게 도린의 죽음은 곧 살아야 할 모든 의미의 상실을 뜻한다. 도린은 그에게 살아야 할 가치이자 의미의 전부였던 것이다. 고르는 도린이 투병생활을 하며 겪는 끔찍한 두통과 전신 통증을, 그리고 생명의 에너지가 서서히 소진되어가는 걸 조용히 지켜본다. 그리고 고르는 마지막 결심을 한다. “당신은 내게 당신의 삶 전부와 당신의 전부를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 동안 나도 당신에게 내 전부를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앙드레 고르는 도린이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도린을 화장하고 그 재가 든 납골함을 받아들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 결심의 결과가 동반자살이다. 생명의 시작은 함께 하지 못했으나 그 마지막은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편지의 끝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하자고.” 사랑이 너무 깊어 죽음까지도 공유하고자 한 고르와 도린 부부의 이야기는 감동 그 자체이며, 감동 속에서 마음의 찌꺼기들, 불필요한 의심과 공허감을 지워버린다. 이것을 읽는 동안 우리 내면에서는 정화 작용이 일어난다. 삶이 없는 한 풍요도 없다. 미국 작가 존 러스킨의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꾼다. 사랑이 없는 한 삶도 없다.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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