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로 보는 노무현 시대, 국민소득 2만달러와 수출 3000억달러 시대 열어
추모객 500만명, 기록물 825만건, 국민소득 2만달러, 수출 3000억달러, 국가채무 298조원…. 수치로 본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어떤 모습일까? 노 전 대통령의 행적의 숫자는 말 그대로 ‘대통령 노무현’의 역사이자 한국의 역사다.
500만명의 추모객
지난 5월23일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29일 국민장을 하기까지 500만명이 분향소를 다녀갔다. 봉하마을을 비롯해 전국 309개 분향소에 온 추모객을 집계한 결과다. 사상 최대의 추모객이었다. 고 김수환 추기경 선종 때의 추모객은 40여만명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국장 때는 관에서 동원한 추모객이 많아 노 전 대통령의 추모객과 비교하기 힘들다.
자발적 시민분향소는 전국적으로 150여 곳이었다. 이 역시 사상 최대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만장 1700개가 봉하마을에서 만들어졌고, 서울에서는 2000여개의 만장이 쓰였다. 모두 3700개다. 50만명의 인파(시민장례위 추산)가 서울시청 광장을 메웠다. 경찰 추산으로는 18만명이다. 2002년 월드컵 대회 이후 가장 많이 모인 것으로 추산됐다. 지난해 촛불시위의 참여객수 추산은 주최측 50만명, 경찰 8만명이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이탈리아 전에서 55만명이 모였고, 포르투갈전에서 47만명이 응원했다.
봉하마을 분향소에는 100만명이 조문했다. 봉하마을만 해도 진기한 기록이 많다. 근조 리본이 100만개 사용됐다. 봉하마을에 제공된 생수도 100만병에 이른다.
국민장 장의위원도 역대 최다인 1,404명이었다. 최규하 전 대통령 국민장 때는 680명,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국장 당시엔 691명의 인사들이 장의위원이었다. 방송3사에서 5월29일 국민장을 생중계하자 AGB닐슨미디어리서치의 조사에 따르면 실시간 시청률 합계가 38.8%였다. 최고 분단위 시청률은 이날 12시23분에 41.4%, 점유율은 80.4%로 나타났다.
825만여건의 대통령 기록물
노 전 대통령은 재임시절 대통령 기록물에 유달리 애착을 보였다. 노 전 대통령은 2004년 국무회의에서 “기록물 관리부터 새롭게 하고 지난날 자료를 모두 없애고 폐기하던 관습에서 벗어나 국민들 앞에 진상을 공개하고 앞으로 안 그러겠다고 맹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e-지원 시스템’을 통해 온라인 결재 과정이 낱낱이 기록됐다. 이렇게 기록해 국가기록원에 넘겨진 대통령 기록물은 825만 6478건이다. 이중 전자기록이 700만건에 달한다. 다른 대통령과 비교해 보아도 이 수치가 얼마나 경이적인지 알 수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3만7천여건, 전두환 전 대통령은 4만2천여건, 노태우 전 대통령은 2만1천여건, 김영삼 전 대통령은 1만7천여건, 김대중 대통령은 20만여건의 기록물을 남겼다. 기록물 전문가인 조영삼 한신대 국사학과 초빙교수는 “노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기록물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152석의 여당
노 전 대통령이 탄핵당한 후 실시된 2004년 4월 총선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152석으로 과반 의석을 확보했다. 민주화 세력이 처음으로 의회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한 것이다. 이 같은 압승에는 노 전 대통령의 탄핵이 큰 역할을 했다.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은 121석을 얻는 데 만족해야 했다.
탄핵소추 의결 찬성 193표
2004년 3월12일 현직 대통령을 탄핵하는 헌법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국회는 전체 271석 중 3분의 2를 넘는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소추를 의결했다. 국회의 의결로 노 전 대통령은 직무가 정지됐다. 2개월후 헌법재판소는 탄핵안을 기각했다.
12월 19일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12월 19일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보다 57만 980표를 더 얻었다. 노 전 대통령은 1201만4277표를 얻어 1144만 3297표를 얻은 이회창 후보를 물리쳤다. 노 전 대통령의 득표율은 48.9%였다. 선거에서 승리한 12월19일을 기념해 한 해 뒤인 2003년 12월 19일에는 노사모가 주최한 ‘리멤버1219’가 열렸다. 이 행사에 노 전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화제를 낳았다. 2007년 12월 19일 선거로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됨으로써 ‘1219’라는 숫자는 이 대통령의 승리숫자로 넘어갔다.
10·4 정상선언
2007년 10월4일 노 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의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됐다.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6·15 공동선언을 이끌어 낸 데 이어 두번째의 남북 정상 간 공동선언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어 육로로 평양을 방문했다.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
2007년 대한민국의 달러 기준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2만1695 달러다. 1995년 1만 달러를 돌파한 지 12년만에 이룬 쾌거다. 노 전 대통령의 임기 첫해인 2003년에는 GNI가 1만2826 달러였다. 매년 2000 달러씩 늘어나 임기가 마지막에 다다른 2007년에 드디어 2만 달러 시대를 열었다.
주가 2085
노 전 대통령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던 2007년 11월 1일 코스피 지수가 장중 2085로 최고를 기록했다. 그가 취임한 2003년 2월25일 주가는 592.25였다. 3배에 가까운 주가 상승이 이뤄졌다. 그는 주가 1686.45에 정권을 넘겨줬다. 이명박 정부 초기에 주가는 계속 하향곡선을 그려 한때 990대까지 떨어졌다.
3000억 달러 수출, 세계5대 외환보유국
노 전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한 첫 해인 2003년 수출액은 1938억 달러였다. 바로 전 해인 2002년 수출액은 1626억 달러였다. 계속 상승세를 그리면서 2006년에는 3000억 달러를 돌파했다. 3255억 달러였다. 불과 4년 만에 두 배에 가까운 성장을 이뤘다. 수출이 늘면서 외환보유액도 꾸준히 늘어났다. 2006년에는 2390억 달러를 기록해 중국·일본·러시아·대만에 이어 2006년 12월 기준으로 세계 5대 외환보유국이 됐다.
국가채무 298조원
노 전 대통령이 취임하기 직전 해인 2002년 국가채무는 133조 6000억원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임기 막바지인 2007년 국가채무는 300조원에 육박하는 298조 9000억원이었다. 두 배 가까이 국가채무가 늘어난 것이다. 참여정부는 국가채무가 주로 공적자금 상환과 외국환평형기금채권 때문에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국가채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언론의 공격 대상이 됐다. 이명박 정부 들어 국가채무는 300조원을 돌파해 지난해 308조 3000억원에 달했다. 정부가 4대강 살리기 등 대형 국책사업에 나서면서 국가채무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