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송경용 신부 “참사 유족들 슬픔 치유, 정부가 공간 제공해야”

박주연 선임기자
2022.11.21

이태원 참사 등 아픔과 고난의 현장 찾아가 미사

“언론, 유족을 찾아가 마이크를 들이대지 말아야”

지난 10월 30일 새벽, 송경용 신부(62)의 휴대전화가 쉴새없이 울렸다. 이태원 핼러윈 축제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거였다. 믿기지 않았다. 사태 파악과 대응을 위해 그 역시 서둘러 여기저기 연락을 취했다. 그가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생명안전시민넷’은 시민사회단체 중 제일 먼저 이날 성명서를 발표했다. 유족에게 정확한 정보 제공과 피해자·유족의 인권 보호, 선정적 보도 방지, 의료진이나 소방관 등 구호자들의 안전 보장, 생존자·목격자·구조대의 심리적 치료와 치유 등에 대한 요구사항이 담겼다.

사진 / 김창길 기자

사진 / 김창길 기자

성공회의 송경용 신부는 ‘걷는 교회’ 주임사제다. 예배당 건물 없이 어떤 곳도 성소가 될 수 있다는 송 신부의 철학이 담긴 열린 교회다. 반도체 노동자 인권단체인 ‘반올림’ 농성장, 세월호 광장, KTX 해고 승무원들과 함께한 서울역,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를 위한 희망버스 등 고난에 빠진 이들의 간절함이 담긴 곳이면 어디든 예배당이 됐다. 이태원 참사 발생 후 첫 주말인 지난 11월 6일에는 참사 현장인 해밀톤호텔 옆 골목에서 미사를 진행했다.

해밀톤호텔 옆 골목서 ‘걷는 교회’ 미사
여자친구 잃고 우는 남성 위해 기도
“위험 방치는 생명 경시하는 사회 방증”

그는 시민운동가들 사이에서 ‘송파더(father)’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40여년간 빈민운동과 노동운동에 매진해온 그에 대한 시민사회계의 신뢰를 방증한다.

지난 11월 7일 그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서울 마포의 한국사회가치연대기금 사무실에서 송 신부를 만났다. 한국사회가치연대기금은 사회적금융 생태계 발전과 사회적경제 활성화를 위해 2019년 1월 설립된 공익재단이다. 은행연합회와 신협의 출연을 받아 사회적경제기업과 사회문제 해결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지난 7일 이태원 핼러윈 참사 현장에서 미사를 진행했다고요.

“그 골목에 그냥 앉아 있었어요. 기도가 잘 안 나왔어요. 그런데 내 옆에 한 젊은 남성이 만취한 상태로 울고 있었어요. 검은 정장에 검정 넥타이를 맨 친구가 그를 위로하고 있었고요. 들어보니 여자친구를 이곳에서 잃었더라고요. 참사가 발생한 날 여자친구와 핼러윈 축제를 즐기다 다퉜고, 남자가 먼저 집으로 돌아간 사이에 일이 생긴 거예요. 후회와 자책으로 통곡하는 그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어요. 팔을 잡아주고 기도했죠.”

2017년 10월 27일 집배원 과로사 추모대회

2017년 10월 27일 집배원 과로사 추모대회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자꾸 발생하는 걸까요.

“공권력의 책임 방기죠. 국가의 부재나 다름없어요. 참사가 일어난 내리막 골목은 길이 45m, 폭은 4m 내외(넓이로 계산하면 55평 남짓)에 불과한 아주 비좁은 공간이에요. 156명(인터뷰 당시 사망자 수)이 들어가도 꽉 찰 공간에 추정컨대 1000명 이상이 몰린 거예요. 코로나19 거리 두기 해제 후 인파가 몰릴 건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어요. 그러고선 주체자 없는 행사라 매뉴얼이 없다거나 법과 규정이 없다고 변명하는 건 정부가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거죠. 무엇보다 헌법과 재난안전법, 경찰법에는 모두 국민의 안전을 보호할 의무를 명시하고 있고요.”

송 신부는 “위험이 예견됨에도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생명과 안전에 대한 감수성이 떨어지는지를 방증한다”며 부모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어린 자녀를 둔 부모의 최대 걱정은 아이의 안전이에요. 심지어 80 넘은 노인도 환갑을 넘긴 아들에게조차 차 조심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게 인간의 본능이에요. 그런데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도처에서 사람이 죽어나가고 있어요. 매년 산업재해로 1000명 가까운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어요. 원인을 알면서도 고쳐지지 않는 건, 우리 사회가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고 도구화하기 때문이에요. 이태원 참사도 마찬가지고요.”

-비통함에 젖어 있을 피해자 유족을 위해 우리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가족을 잃은 충격에 휩싸여 있을 유족들에게 시간이 필요해요. 기자들도 유족을 찾아가 마이크를 들이대는 우를 범해선 안 돼요. 이는 인권의 문제예요. 그리고 같은 아픔을 지닌 분들이 슬픔을 나누고 추스를 수 있도록, 개별화돼 시달리거나 혹은 숨지 않도록 정부는 공간을 제공해야 해요. 유족들에 의해 선출된 대표자로 정부는 대화 창구를 일원화해야 해요.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밝혀내고 보상과 치유를 하는 등의 과정이 필요한데 개인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정부는 아직까지 이런 공간이나 시스템을 제공하고 있지 않아요.”

송 신부는 1960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4녀2남 중 장남이다. 위로 두 명의 누나가 있다. 그는 성장기에 혹독한 가난과 외로움을 경험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후 가족은 할머니 손에 그만 남겨두고 일감을 찾아 서울로 떠났다. 하루 한끼만 먹는 날이 많았다. 글 읽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책은 물론 신문쪼가리까지 찾아 읽었다. 중학교 2학년 때 가족이 있는 서울로 올라왔다. 하지만 1년 만에 가족은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했다. 가난 때문이었다.

-청소년기에도 혼자 산 날이 많았던 건가요.

“아버지의 일이 계속 안 풀려 집도 절도 없을 때였어요. 중학교 때는 엄마와 연신내시장에서 사과를 팔고 구파발 다리 밑에서 호떡장사도 했는데 나중엔 혼자 거처를 옮겨가며 살았어요. 북한산 밑 무허가 판잣집이나 용두동 공장터의 빈 창고가 거처인 날도 있었고, 만리동시장 배추창고에서도 지냈어요. 아기였던 막냇동생(일곱째)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었어요. 처지가 안 되니 고등학교 진학도 포기하려 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고 해 공고에 입학했죠.”

건축학과 학비 위해 룸살롱서 허드렛일
환락·학대의 세상과 학교 부조리 고민
상계동 야학 통해 따뜻함과 연대 느껴

2018년 2월 13일 김훈 작가(뒷줄 오른쪽 두 번째)와 함께한 ‘반올림’ 농성현장

2018년 2월 13일 김훈 작가(뒷줄 오른쪽 두 번째)와 함께한 ‘반올림’ 농성현장

-공부할 짬이 없었을 텐데 연세대 건축학과(79학번)에 합격한 걸 보면 머리가 꽤 비상했나 봅니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어려서부터 책을 표지부터 통째로 다 외웠거든요. 사르트르, 카뮈,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간디, 장자…. 동서양의 철학서든 문학서든 뭐든 읽으면 텍스트가 영화 장면처럼 각인됐어요. 수학과 화학도 마찬가지였어요. 하지만 내게 대학은 사치다 싶어 취직시험을 봤어요. 삼성, 한전 등에 다 붙었죠. 그래도 결국 대학입시의 유혹을 떨치지 못했어요. 건축학과를 선택한 건 전주에서 건축직 공무원을 지내시던 작은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어요.”

-사립대학 등록금 마련이 쉽지 않았겠어요.

“신문 배달, 공장 노동 등 닥치는 대로 일했어요. 그중 하나가 신사동 룸살롱에서 허드렛일을 한 거예요. 주방에서 양주잔에 넣을 얼음을 깨고 손님들의 담배 심부름을 하며 1년쯤 일했어요. 주지육림의 세계가 역겨웠어요. 고위 관료들과 부자들과 깡패들…. 온갖 술과 돈과 환락과 학대…. 거기서 고통받는 여종업원들이 들려준 삶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절절했어요. 그런데 학교에 오면 발랄함과 활기로 가득 찬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죠. 당시 실존주의에 빠져 있던 때였는데, 이런 부조리를 견디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야학을 선택한 건가요.

“이런 고민을 선배에게 토로했더니 야학을 추천했어요. 상계적십자청소년학교인데, 적십자와는 관계없어요. 학생들은 많을 때는 100명이 넘었어요. 주로 14~16세의 가내수공업 종사자들이었죠. 매일 12~14시간 동안 맨손으로 화공약품을 사용해 도금하는 일을 하던 어린 노동자들도 있었어요. 그들은 화학약품 독성으로 인해 코뼈와 치아가 다 주저앉았어요. 나는 국어와 영어를 기본으로 가르치고, 여러가지 철학책과 역사책, 성경책도 함께 읽었어요.”

-원래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까.

“아뇨. 어릴 때 벽돌공장 창고에 버려진 성경책을 달달달 읽었어요. 정확한 의미는 몰랐지만 어린 마음에도 좋은 말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배고프고 외롭고 힘들고 부모님이 그리울 때 성경책이 위로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야학 학생들에게도 위안이 될까 해서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같이 읽었던 거예요. 그런데 학생들을 데리고 동네 교회를 찾아갔다가 추레한 차림새 때문인지 문전박대를 당했어요. 놀랐어요. 화도 났고요. 교회는 가난한 사람을 환대해줄 것으로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2019년 1월 17일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씨 사망사고 직후 위험의 외주화 금지를 촉구하는 공동기자회견

2019년 1월 17일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씨 사망사고 직후 위험의 외주화 금지를 촉구하는 공동기자회견

사회선교하려 천신신학교 편입
신영복 선생과 나눈 각별한 사제의 정
나눔의 집 시작으로 빈민·노동운동

-야학생활에서 가장 크게 느낀 건 뭐였나요.

“제일 먼저 느낀 건 따뜻함이에요. 학생들이 막 떠들고 쉬는 시간에 같이 라면 먹고, 단무지 하나 갖고 싸우고 하면서 왁자지껄하는 모습이 너무 좋더라고요. 룸살롱 종업원들을 비롯해 가난한 사람들이 숨쉴 틈 없는 공간에서 배제되고 소외되고 서러워하는 모습만 보다가 아주 밝은 모습을 보니 작은 이들의 연대, 끈끈한 공동체 같은 게 느껴졌어요. ‘내가 있을 곳은 여기구나’ 했어요.”

그는 1981년 군에 입대했다. 원래 계획은 그해 11월 3일 학교 건물에서 줄을 타고 내려와 유인물을 뿌리며 ‘정권 타도’를 외친 뒤 감옥에 가는 거였다. 사전에 운동권 친구들과 그렇게 약속이 돼 있었다. 작전은 무산됐다. 직전 정부의 일제 단속령으로 학교가 텅 비면서 계획을 실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해 12월 경찰에 체포된 후 군대로 보내졌다. 6개월 만에 보안사에 끌려갔다. 송 신부는 “보름 동안 군홧발로 폭행하고 잠을 안 재우며 수백 장의 진술서를 쓰게 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운이 좋았다. 그를 걱정하던 어느 목회자가 마침 그를 취조한 보안사 준위와 잘 아는 사이였다. 준위의 “빨갱이는 아닌 것 같다”는 보고서 한 장 덕에 그는 풀려났다.

-연세대를 4학년 1학기까지만 마치고 1986년에 성공회대학교 전신인 천신신학교에 편입했지요.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는 뭔가요.

“1984년 제대 후 상계동에 갔더니 깡패를 동원한 철거반이 우리 학생들이 거주하던 공간들을 폭력적으로 철거하고 있었어요. 여학생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울고 있었고요. 그 자리에서 기도했어요. ‘하느님, 다시는 이 자리를 떠나지 않게 해주세요’라고요. 이듬해 어떤 일로 선배의 신혼집 골방에 피신해 지냈어요. 선배는 연세대를 다니다 천신신학교에 편입한 후 교회 전도사로 일했고, 부인은 제 야학 선배였어요. 낮에 부부가 나가면 성경책을 혼자 읽고, 돌아오면 성경책 내용을 두고 셋이 토론했어요. 신학공부를 하면서 사회선교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선배의 얘기에 사제가 되기로 했어요.”

송 신부는 1988년 천신신학교 강사로 초빙된 신영복 선생(1941~2016)과 각별한 사제의 정을 나눴다. 신 선생은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아 구속돼 있다가 20년 만에 특별가석방으로 풀려났다.

2022년 11월 3일 생명안전시민넷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가 공동으로 이태원 참사와 정부 대응에 대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송경용 신부(왼쪽 첫 번째)가 ‘국가책임 분명히 하는 게 진정한 애도’라고 쓴 종이를 들고 있다. / 김창길 기자

2022년 11월 3일 생명안전시민넷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가 공동으로 이태원 참사와 정부 대응에 대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송경용 신부(왼쪽 첫 번째)가 ‘국가책임 분명히 하는 게 진정한 애도’라고 쓴 종이를 들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신영복 선생과 관련한 특별한 일화가 있습니까.

“학교 산길 너머 두붓집에서 같이 식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내가 여쭸어요. ‘20년을 갇혀 지냈는데 억울하지 않냐’고. 선생님은 ‘너희들과 좀 다른 세상을 살았을 뿐 거기도 사람이 있고 희로애락이 있다’며 ‘또 하나의 세상이다’라고 하셨어요. 큰 깨달음을 얻었어요. 우리는 나와 다른 것에 대해선 상상하지 않고, 생각이 다르면 내가 모르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틀리다고 규정하잖아요. 또 선생님은 ‘역사가 뭐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셨어요. ‘역사는 특별한 게 아니다. 산은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고 계곡도 있다. 사람도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또 아이를 낳고 하면서 누구나 인생이 굴곡을 겪는다. 나는 그게 역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일상이 곧 역사임을 알게 해준 말씀으로 제 삶에도 큰 영향을 끼쳤죠.”

-신 선생이 써준 서예를 팔아 20여년간 빈민활동에 사용했다고요.

“그랬죠. 나는 힘들 때면 선생님을 찾아갔어요. 그러면 담배를 같이 피우자고 하시거나 커피를 타주셨어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훤하게 꿰고 계셨어요. 1992년에는 사람을 보내 30여 년간 복역한 비전향장기수 두 분의 신원증명을 부탁하셨어요. 그 두 분을 제가 설립한 봉천동 나눔의 집으로 모신 게 이후 관악구가 40여 명에 달하는 장기수의 아지트가 되는 단초가 됐어요.”

-‘나눔의 집’은 1986년 상계동에 처음 문을 연 이래 봉천동, 의정부 등 서울은 물론 대전, 인천 등 전국에 8곳이 있더군요. 어떤 곳입니까.

“교회이기도 하고 아이들 공부방, 푸드뱅크와 자활센터이기도 해요. 지역사회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찾아와 하소연도 하는 곳이고요. 나는 교회라는 이름을 안 쓰고 싶었어요. 가난한 사람들에게 교회 역시 또 다른 벽임을 아니까요. 그래서 예수의 정수(精髓)를 표현할 이름을 고민했어요. 어느날 미사를 드리며 신부님이 빵(성채)을 쪼개시는데 커다란 소리와 함께 내 등이 쪼개지는 것 같은 큰 충격을 받았어요. 이어 포도주를 올릴 때는 피냄새가 진동했고요. 그때 나눔이라는 말이 떠올랐어요. 예수님이 ‘이건 내 살과 피다’라고 하시며 다 나눠주고 가셨잖아요.”

‘나눔의 집’ 이후 송 신부는 청소년 쉼터, 노숙 가정 쉼터, 자활후견기관, 푸드뱅크, 장애인센터 등 사회적 가치를 나누고 실천하는 다양한 공간과 기구를 설립하고 발전시켰다. 특히 IMF 외환위기 때 그의 역할은 혁혁했다. 실직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자 송 신부는 서울역에서 2박3일간 신문지를 깔고 노숙인들과 먹고 자며 이야기를 들었다. 민관이 함께하는 실직노숙인대책협의회를 조직하고, 종교계 사회복지협의회를 만들었다. 2000년 시행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을 위해 수년간 준비한 것도 그였다. 송 신부는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일본, 미국을 자주 다녔다”며 “이 시기에 노숙인 2만~3만 명이 밀집한 오사카 가마가사키의 노숙인정책을 들여다봤고, 나중에 푸드뱅크의 모델이 된 미국 뉴욕 성공회 교회의 ‘두 번째 추수(second harvest)’ 운동을 접했다”고 말했다. 송 신부는 “하나님이 IMF 외환위기 때 역할을 하라고 미리 보내신 것 같다”고 했다. 이 시기 형을 도와 서울역에서 노숙인 상담을 하던 그의 막냇동생(여섯째)은 과로로 사망했다.

[박주연의 메타뷰](25)송경용 신부 “참사 유족들 슬픔 치유, 정부가 공간 제공해야”

송 신부 역시 건강이 악화됐다. 실명 위기를 겪었고, 췌장에 커다란 담석이 생겨 수술을 받았다. 2000년 8개월, 2003년부터 2009년까지 총 7년간 영국에서 지내며 건강을 회복했다. 동시에 그 나라에서 사회적경제를 배웠다. 귀국 이듬해인 2010년 1월 북한산에서 첫 미사를 하면서 ‘걷는 교회’를 시작했다. 고통받는 이들이 있는 현장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세월호 참사에 이어 스크린도어에 끼어 사망한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 등 수많은 생명이 죽고 병드는 사건이 잇따르자 2017년 생명안전시민넷을 만들었다. 2019년에는 한국사회가치연대기금을 설립했다. 기금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인간적인 금융’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송 신부는 “280억원 정도를 모금해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자활기업, 소셜벤처 등 지금까지 219개 사회적경제기업을 지원했다”고 말했다.

-왜 교회 이름을 ‘걷는 교회’로 지었습니까.

“귀국하기 6~7개월 전에 허리가 몹시 아팠어요. 치료도 소용없었죠. 그래서 매일 물 한 병을 들고 16㎞씩 걸었어요. 차 타고 다닐 때는 못 보던 꽃과 흙, 물살이 보였어요. 또 그것이 매일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우리가 평상시 얼마나 많은 것을 지나치고 사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 주변 생명들을 유심히 보고 경청하는 습관이 생겼어요. 그러다 ‘건물이나 제도에서 벗어나 보자’는 생각에 이른 거예요. 하늘 아래가 다 교회이니 세상에서 제일 큰 교회죠(웃음).”

IMF 때 자활센터·푸드뱅크 등 설립
건강 위기 겪은 뒤 ‘걷는 교회’ 시작
“희망은 타인과 관계 통해 확장되죠”

-나눔과 미래 대표, 생명안전시민넷 공동대표, 한국사회가치연대기금 이사장 외에도 많은 직함과 역할을 맡고 있어요. 어떻게 이 많은 일을 소화합니까.

“나는 계획을 통해 내년에 할 일을 정하지 않아요. 언제나 어떤 상황이 나한테 오는 거예요. 그래서 때로는 ‘하느님이 나를 매번 이렇게 어려운 데만 끌고 다니지 마시고, 편한 데 좀 데려다주시지’ 합니다(웃음). 또 주된 일은 활동가들이 하고 있어요. 나는 주로 그분들이 시간이나 사회적 관계 등의 이유로 직접 수행하기 어려운 일이나 분야의 심부름을 하는 거예요.”

송 신부에게는 야학생활을 시작한 대학 1학년 때부터 마음에 새겨둔 좌우명이 있다고 했다. ‘가난한 사람 한 명이라도 더 도울 수 있다면 내 인생은 헛되지 않다’이다. 그에게 ‘여러 가지로 혼탁한 이 세상에 그래도 희망은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희망을 자신에게서만 찾으려고 하면 안 돼요. 개인이 보고 느끼고 배우고 아는 건 협소하기 때문이죠. 결국 희망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확장되고 더 열리는 거예요. 나는 내 아픔도 사랑도 타인과의 관계에서 봐요. 그러니 여러분도 타인을 낯선 존재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나를 더 성장시키는 존재로 바라보면 많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게 될 거예요.”

<박주연 선임기자 j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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