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0년 전에도 머리에 바르는 약 있었다

김태훈 기자
2022.01.24

역사와 함께해온 탈모

1974년 도미니카공화국 남부의 작은 마을 살리나스에서 일어난 일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간 여자아이로 알고 키워온 아동들이 사춘기를 맞으면서 몸에 남자 생식기가 나온 것이다. 원인을 분석해본 결과 이들 소년에겐 몸 안에서 분비되는 ‘5알파환원효소(5AR)’ 수치가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5AR은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을 디하이드로테스토스테론(DHT)으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DHT가 수행하는 대표적인 역할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소녀인 줄 알았던 살리나스 소년들에게서 보였듯이 남성 생식기를 생성하는 역할이다. 다른 하나가 머리카락을 빠지게 하는 역할이다.

고대 이집트의 의학 문서인 에베르스 파피루스의 일부 / papyrusebers.de 캡처

고대 이집트의 의학 문서인 에베르스 파피루스의 일부 / papyrusebers.de 캡처

유전적으로 5AR이 부족해 DHT 수치가 낮았던 살리나스 소년들은 다른 이들보다 늦게 외부로 드러나는 생식기를 갖게 됐지만, 그 ‘덕분에’ 탈모를 겪지 않기도 했다. 또 하나, 전립선이 작다는 특징이 있었다. 이들의 사례에서 5AR과 DHT의 역할에 착안한 과학자들은 처음에는 전립선비대증 치료에 보다 관심을 기울였다. 피나스테리드는 바로 이 5AR이 DHT를 생성하는 작용을 저해하기 위해 개발한 신약 성분이다. 이 성분을 함유한 전립선비대증 치료제에 탈모를 막아주는 ‘부작용’까지 확인되자 같은 성분이지만 함량을 달리해 탈모치료제로 내놓았다. 전립선비대증 치료제엔 피나스테리드를 5㎎, 탈모치료제엔 1㎎ 투입하는 식이다.

고대 이집트 의학 문서에 기록

얼핏 봐선 신약 개발 과정의 흔한 에피소드 같지만 인류 역사와 함께해온 탈모의 관점에서 보면 획기적인 변화였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기록에서 확인 가능한 탈모 치료의 역사는 기원전 1550년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이집트의 의학 문서인 에베르스 파피루스는 877예의 처방과 12예의 수술 방법을 전한다. 이 문서는 얼굴과 머리 각 부위, 손과 발, 피부 등에서 나타나는 병의 특징 등을 적는 한편 해부학과 생리학적 시각을 반영한 내용도 담고 있다. 치료의 대상에는 탈모증도 들어가 있다. 탈모 치료를 위해선 하마, 악어, 수고양이 등의 지방을 섞어 머리에 바르라는 처방이 나온다. 또 호저의 가시를 불에 그을려 지금의 흑채처럼 머리에 뿌리는 방법도 제시한다. 바꿔 말하면 인류는 고대 이집트 이래 적어도 35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탈모라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도전해온 셈이다. 3500년이 지나서야 마침내 탈모 치료의 대전환을 이뤄냈다. 바르거나 뿌리는 식의 외용제를 넘어 피나스테리드를 시작으로 내복약을 활용한 탈모 치료의 새 역사가 열린 것이다.

주로 머리카락이 빠진 두피에 바르고 문지르는 방식으로 탈모를 치료하려 한 시도의 기록은 숱하게 많다. 기원전 400년 무렵 ‘의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는 탈모증을 치료하기 위해 겨자무, 비둘기 배설물, 고추 등의 재료를 섞어 약을 만들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염소 오줌을 사용했고, 고대 로마 시대에 이르러선 당대부터 지금까지 ‘대머리’를 대표하는 인물인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탈모증을 해결하기 위해 숱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카이사르는 머리카락이 빠지는 만큼 쥐고 있는 권력도 흩어질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탈모를 치료하려 했다는 건 탈모를 그저 자연스러운 노화과정의 일부라기보다 부정적인 신체적 변화로 읽었다는 방증이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다양한 기록도 탈모를 저주 또는 수치의 대명사로 언급한다. ‘대머리’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쓴 개역개정판 한국어 성서를 보면 “썩은 냄새가 향기를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하고”(이사야서 3:24), “두려움이 그들을 덮을 것이요 모든 얼굴에는 수치가 있고 모든 머리는 대머리가 될 것이며”(에스겔서 7:18), “모든 머리를 대머리가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애통하듯 하게 하며”(아모스서 8:10) 같은 비슷한 표현이 여러 번 나온다.

탈모 때문에 모욕을 당한 인물도 여럿 등장한다. 기원전 9세기 무렵의 인물인 예언자 엘리사는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열왕기하 2:23)라는 기록에서 보듯 심한 조롱을 당했다. 같은 구절을 다른 번역본인 공동번역으로 보면 “대머리여 꺼져라” 하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모욕을 당했다. 물론 엘리사가 당대의 예언자였기 때문에 그를 놀린 아이들의 최후는 곱지 못했다. 엘리사가 신의 이름으로 저주하자 곰 두마리가 나타나 아이들 42명을 찢어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모든 문화권에서 탈모를 부정적으로 인식했던 건 아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선조들이 남긴 글을 보면 탈모를 한탄하지만 심각하게 부정적으로 여긴 것만은 아님을 엿볼 수 있다.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1168~1241)가 남긴 문집인 <동국이상국집> 제18권 ‘대머리를 자조함’을 보면 탈모가 진행 중인 자신의 외모를 한탄하는 시조가 나온다. “털이 빠져 머리가 온통 벗겨지니 나무 없는 민둥산을 꼭 닮았네 … 귀밑머리와 수염조차 없다면 참으로 늙은 까까중 같으리”라는 대목이 담긴 이 시조에선 늙음을 탄식하면서도 해학적인 표현과 함께 자신의 생을 돌아보는 모습이 함께 읽힌다.

네덜란드 국립고대박물관이 복원한 고대 로마의 지도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모습 / 네덜란드 국립고대박물관

네덜란드 국립고대박물관이 복원한 고대 로마의 지도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모습 / 네덜란드 국립고대박물관

권근의 ‘대머리의 변’

조선시대에 와서도 초기 개국공신인 권근(1352~1409)의 글 ‘대머리의 변’에서 자신의 탈모를 스스럼없이 표현하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한 남자가 대머리였음에도 요직을 역임하며 훌륭한 인품까지 지녔다”고 쓴 대목을 보면 외모보다는 업적, 더 나아가 인품이 우선이라는 교훈적인 내용이 나온다. 보다 후대로 오면 소론의 영수였던 명재 윤증(1629~1714)의 초상화에서 당시 탈모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탕건을 쓴 머리 부분을 자세히 보면 이마로 이어지는 두피에 머리카락이 다 빠져 뒷머리에 남은 머리카락을 모아 상투를 틀었음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의 20%가 탈모”

국가와 민족에 따라 탈모 현상을 바라보는 인식은 물론 탈모가 나타나는 비율도 사뭇 다르다. 현재로선 공신력을 갖춘 국가별 비교 통계는 없지만 일본의 모발 관련 기업 아데랑스가 세계 21개국 주요도시의 탈모 비율을 조사한 자료를 보면 대체로 아시아인들의 탈모 비율이 낮다. 이 조사에서 탈모 비율이 가장 높게 나타난 도시는 체코 프라하(42.8%), 스페인 마드리드(42.6%), 독일 프랑크푸르트(41.2%) 등의 순이었고 반대로 가장 낮은 곳은 중국 상하이(19.0%)에 이어 한국 서울(22.4%) 등의 순이었다.

국내 업계에선 대체로 전체 인구 중 탈모인구를 20% 수준으로 추산한다. 국내 탈모인구가 1000만명에 육박한다는 분석도 사실 명확한 통계에 바탕을 둔 것은 아니다. 남녀를 통틀어 전체인구 중 탈모를 경험한 인구를 700만명쯤으로 추정하고, 나머지 300만명은 잠재적으로 탈모 위험에 노출된 인구로 본다. 실제로 의학적 치료를 받으려고 의료기관을 찾은 탈모증 환자의 수는 전체 탈모인구 추정치에 크게 못 미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탈모증 진료 환자는 2001년 10만3000명에서 2005년 14만5000명, 2009년 18만1000명, 2016년 21만2000명, 2020년 23만3000명으로 매년 늘고 있다. 조남준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피부과 교수는 “통상 백인 남성들은 전체의 50~60%가 탈모를 겪는데 동양인들은 그보다 적고 발생 시기도 늦은 편”이라고 말했다. 한국 남성은 대략 20% 정도라고 했다. 그는 “젊은 층의 탈모 증가는 실제로 탈모가 증가한다기보다는 생활수준 향상으로 외모에 대한 관심이 증가해서 병원을 찾는 젊은 층이 늘어났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적극적인 탈모 대책을 세우려는 인구가 늘면서 국내 탈모 관련 시장 역시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지난해 기준 연간 4조원 규모로 추정한다. 의학적 치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10% 미만이다. 여기엔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는 전문의약품 치료제 사용 대신 화장품 등 간접적인 모발·두피 관리용품 사용에 보다 적극적인 여성 탈모인들의 움직임이 얽혀 있다. 김영선 케이벨르 대표는 “최근 결혼과 출산을 경험하는 여성들의 평균적인 연령대가 높아지고 특히 이 시기 모발에 영향을 주는 체내 호르몬 분비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면서 30대를 중심으로 탈모 문제에 대처하려는 관심이 높아지는 추세”라며 “여성은 유전적 요인 외에 스트레스 등 후천적 요인을 해결하는 쪽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경향이 크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도 사실상 인류 역사와 늘 함께해온 탈모 현상을 유전적인 측면에서 해결하기는 어려우니 스트레스 등 환경적 요인을 통제하는 쪽으로 대처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탈모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는 비탈모인들의 노력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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