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걱대는 올림픽이 떠들썩한 선거보다 나은 이유

이용균 스포츠부 기자
2021.08.23

성장·노력·성취에 대한 자신감, 과거 ‘승리 지상주의’ 자리 대신해

도쿄 출장을 1주일 앞두고 사내 동료들이 물었다. “올림픽 진짜 하나?” 코로나19 델타 변이 바이러스의 위협이 커지고, 확진자 수가 크게 늘기 시작하던 7월 중순이었다. 일본 내에서도 개최 반대 여론이 높았다. 개막 직전까지도 일본 국민의 절반 이상이 개최를 반대했다. 토요타그룹은 올림픽 후원을 취소했다. 7월 23일 개회식 때 텅 빈 신국립경기장 밖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올림픽 개최 반대 시위를 열었다.

2020 도쿄올림픽 폐막식 / 사진공동취재단

2020 도쿄올림픽 폐막식 / 사진공동취재단

올림픽은 강행됐다. 약간은 정치적 목적이었고, 상당 부분 경제적 이유였다. 스가 요시히데 내각의 가을 총선 정권 연장의 이유와 함께 IOC 수익의 70%를 차지하는 중계권료가 결정적이었다. NBC가 IOC에 지급하는 도쿄올림픽 중계권료는 14억5000만달러(약 1조6000억원)나 됐다.

목표 미달? 재미는 충분

한국 대표팀도 올림픽에 출전했다. 코로나19 때문에 국제대회에 나가지 못했고, 국내에서 훈련도 여의치 않았다. 기대와 우려가 함께했다. 과거 올림픽은 우리 사회가 거친 저돌적 산업화를 빼다 박았다. 메달 생산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전략 종목’을 집중 육성해 순위를 높이는 방식을 활용했다. 정부 차원의 ‘메달 목표’는 사라졌다. 대한체육회가 대신 메달 목표로 ‘금메달 7개, 메달 순위 10위 이내’를 걸었다. 다분히 관행적이다. 국가기관이 ‘올림픽 생산성 목표’를 내걸고 이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시대 정신과는 맞지 않는다.

대회 초반 대표팀의 성적이 삐걱댔다. 옛날로 치자면 ‘생산성 목표 미달성’이었다. 선수단의 한 고위 임원은 “속이 탄다”고 했다. 선수들은 “경기 감각, 실전 감각이 좀처럼 올라오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이유는 자명했다. 코로나19로 국내에 갇혔고, 스포츠 저변이 부족했다. 유명 게임 ‘스타 크래프트’에 비유하자면 열심히 ‘싱글 모드’만 플레이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유저들이 모여 겨루는 ‘래더’에서 경험을 쌓고, 레벨을 높여야 했는데, 싱글 모드에서 기술만 유지했으니, 막상 올림픽에서 ‘실전’에 들어갔을 때 상대 전략에 대한 대응이 이뤄지지 않았다. 새벽에 산을 뛰어오르는 ‘강철 체력’으로 메달을 따는 시대는 지났다. ‘전략 종목 집중 육성’이라는 생산시스템은 재능 있는 몇명에게 자원을 집중하는 방식이다. 잘하는 몇명이 나올 수 있지만 해당 종목의 저변은 없다시피 하다. 코로나19에 따른 고립은 ‘렙업’의 기회를 사라지게 했다.

양궁만 펄펄 날았다. 금메달 5개 중 4개를 땄다. 양궁은 달랐냐고? 달랐다. 양궁은 잘 알려져 있듯 올림픽 본선보다 국가대표 선발전이 더 어렵다. 전 세계에서 양궁 제일 잘하는 사람들이 국내에 모여 있으니, ‘실전’과 ‘렙업’의 기회가 널렸다. 양궁 저변이 엷은 미국의 베테랑 브래디 엘리슨은 실전 감각 유지에 실패하며 메달을 한개도 따지 못한 채 돌아갔다.

개최 전에 반대가 심했고, 대표팀 성적도 ‘목표’에 못 미친 것 같은데 올림픽은 재미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올림픽을 즐기는 방식이 달라졌다. 옛날의 올림픽이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금메달입니다”류의 ‘국뽕’에 머물렀다면 이번 올림픽은 선수 개인의 성취와 이를 이뤄가는 방식에 대한 공감이 더 큰 의미를 지녔다.

그동안의 올림픽은 목표가 외부에서 주어졌다. 전체 선수단의 ‘생산 목표’가 정해지고, 이를 위해 각 하부조직이 그 목표에 맞춰 움직였다. 누구는 금메달을 따야 했고, 누군가는 동메달에 승부를 걸어야 했다. A종목은 금 몇개, 은 몇개를 따고, B종목은 은 몇개, 동 몇개를 따야 했다. 목표에 미달하면 죄송하고, 반성하고, 뼈를 깎는 훈련으로, 다음 대회 성장하겠다는 각오를 보여야 했다.

이대훈이 7월 25일 일본 지바 마쿠하리 메세 A홀 경기장에서 열린 68kg이하급 남자태권도 동메달 결정전에서 패한 후 상대선수에게 인사하고 있다. / 사진 공동취재단

이대훈이 7월 25일 일본 지바 마쿠하리 메세 A홀 경기장에서 열린 68kg이하급 남자태권도 동메달 결정전에서 패한 후 상대선수에게 인사하고 있다. / 사진 공동취재단

2021년에 열린 2020 도쿄올림픽에선, 그런 목표가 불편해졌다. 과거 올림픽들의 대한민국은 ‘후진국’이거나 ‘개발도상국’이었지만 이번 올림픽은 ‘선진국’ 자격으로 참가한다. 어른들에게는 미국이나 유럽, 일본이 ‘기를 쓰고 넘어야 할 강국’이었지만 지금 주축인 젊은 선수들에게 그들은 그냥 ‘다른 나라’일 뿐이다. 허구연 MBC 해설위원(70)에게 일본야구는 “어릴 때부터 아무리해도 이기기 힘든 상대”의 이미지가 남아 있지만, 이정후(23), 강백호(22)에게 일본은 “그냥 야구하는 나라, 우리가 자주 이긴 상대”다.

그래서 안산(21)과 김제덕(17)은 신선했다. 어른들은 ‘저렇게 큰 무대에서 저렇게 센 나라들과 붙는데 어찌 저리 떨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겪은 시대의 공기가 어른들과 다르다. 그들에게 한국은 이미 선진국에 가까웠고, 괜히 다른 나라에 주눅 들고 쫄 이유가 없다. 안산은 양궁 여자개인 4강전과 결승에서 모두 슛오프 ‘한발 싸움’에서 이겼다. 안산은 슛오프 때 혼잣말로 “쫄지 말고 대충 쏴”라고 말했다며 웃었다. 김제덕의 눈치 보지 않는 ‘빠이팅’ 역시 뉴제너레이션이 보여주는 자신감의 상징이었다.

‘메달 못 따면 끝’은 이제 끝

2020 도쿄올림픽이 보여준 것은 새 세대의 자신감만이 아니었다. 선수들의 치열한 경쟁과 성취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우리 사회가 잠시 잊고 있던 여러 가치를 되새기게 했다.

수영의 황선우(18)는 연거푸 신기록을 세우며 세계 수영계를 놀라게 했다. 남자 자유형 200m 결승에서는 150m 구간까지 1위를 달렸다. 오버페이스를 하는 바람에 마지막 50m에서 처져 7위에 머물렀다. 예전 같으면 ‘전략 실수’라는 자책과 비난이 나왔겠지만, 황선우는 “우와 첫 100m를 49초대에 들어왔다고요? 그걸로 만족할게요”라고 환하게 웃었다.

여서정(19)은 체조 여자 도마에서 동메달을 땄다. 25년 전 애틀랜타올림픽 때 아빠 여홍철은 은메달을 따고도 표정이 굳었지만 여서정은 아버지와 비슷한 실수를 해 동메달을 따고도 “메달을 따 너무 만족스럽다”며 환하게 웃었다. 아버지 여홍철 역시 자신의 은메달에 실망했지만 딸의 동메달에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우상혁(25)은 높이뛰기에서 2m35의 한국신기록을 세우며 4위에 올랐다. 한국 올림픽 육상 최고 성적이라는 ‘숫자’보다 ‘할 수 있다’는 에너지와 “파리올림픽은 금메달이 목표”라는 자신감이 울림을 줬다. ‘메달 못 따면 끝’이라는 비아냥은 더 이상 올림픽을 보는 태도가 아니다.

배드민턴 여자복식 동메달 결정전에서 대한민국 이소희·신승찬과 김소영·공희용의 경기 / 연합뉴스

배드민턴 여자복식 동메달 결정전에서 대한민국 이소희·신승찬과 김소영·공희용의 경기 / 연합뉴스

태권도 간판스타 이대훈은 대회를 4위로 마쳤다. 동메달 결정전에서 자오솨이에게 15-17로 패한 뒤 엄지를 들어보였다. 여자 67㎏의 이다빈 역시 결승전에서 세르비아의 밀리차 만디치에게 패한 뒤 ‘엄지척’을 했다. 이다빈은 “올림픽이라는 큰 무대 위한 노력 잘 알기 때문에 그 선수의 승리 축하해 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며 “그 선수보다 부족한 점이 있으니까 은메달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웃었다.

남자유도 100㎏급 결승에서 패한 조구함 역시 상대 울프 아론의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조구함은 “대표팀 10년 넘게 하면서 오늘의 울프가 가장 강한 상대였다. 패배를 인정한다”면서 “대신 울프가 파리올림픽 도전을 결정하게 해줬다”며 웃었다. 우리 사회는 승리에 지나치게 관대하고, 패배에 지나치게 인색하다. 이토록 ‘멋진 패배’를 어디서 또 볼 수 있을까.

그래도 올림픽은 계속되면 좋겠다

배드민턴 여자복식 동메달 결정전에서 김소영·공희용이 이소희·신승찬을 이겼다. 오랜 대표생활 동안 친자매보다 더 친한 이들의 대결이었다. 당일 아침에도 드라마를 함께 보며 밥을 먹었다. 승패가 갈린 뒤 네트를 넘어 함께 끌어안았다. 김소영·공희용은 “이겨서 미안했다”고 했고, 이소희·신승찬은 “이겼는데, 맘껏 좋아하지 못하는 것 같아 더 미안했다”고 했다.

김연경을 중심으로 한 여자배구대표팀은 ‘똘똘 뭉치면 할 수 없는 게 없다’는 걸 증명했다. 세계랭킹 11위였던 대표팀은 계속된 지독한 승부를 결국 이겨내며 4강에 올랐다. 작전 시간 때 김연경이 “해보자, 해보자, 해보자, 해보자, 해보자, 후회하지 말고”라고 외친 장면은 보는 이들을 울컥하게 했다. 다 함께, 마지막까지 쏟아부어, 뭔가를 해본 게 언제였을까.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해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 혼자 말고, 누군가와 함께 온 힘을 쏟아부어 이룬 성과는 어떤 기분일까.

2020 도쿄올림픽은 반대와 무관심 속에 시작했지만, 금세 우리 사회 전체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빠이팅’이 화제가 됐고, 새로운 세대의 자신감이 드러났다. 그 자신감은 함부로 상대를 무시하면 안 된다는 ‘공정감’으로 이어졌다. 대회 초반 올림픽 중계방송이 보여준 무감각은 비난의 대상이 됐다. 상대를 낮춤으로써 자존감을 얻으려는 시도는 과거의 자격지심일 뿐이다.

과거 올림픽의 승리 지상주의는 이제 성장과 노력, 성취에 대한 자신감 등이 자리를 대신했다. 이번 올림픽을 통해 선수들은 너를 이기는 것이 승리가 아니라 나를 이기는 것이 더 중요한 승리라는 것을 보여줬다. TV와 온라인을 통해 쉴새없이 경기가 중계되며 올림픽의 가치가 순식간에 온 나라에 퍼졌다. 어쩌면 금세 잊힐지도 모르지만, 그 가치들이 다시 한 번 환기되고, 스쳐지나가는 것만으로 우리 사회가 조금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게 된다.

올림픽은 위기다. 돈도 많이 들고, 정치적·경제적 의도에 휘둘리기 일쑤다. 올림픽을 하겠다는 나라도 거의 없다. 그래도 이번 올림픽이 우리 사회에 환기시킨 여러 가치를 고려하면 올림픽은 계속되면 좋겠다. 편집을 통해 강요된 감동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날것이 보여주는 감동, 효율과 승리에 매몰돼 잊고 있던 가치가 살아나는 현장. 그러니까 자존감을 높여주는 올림픽이 자괴감만 쌓이게 하는 선거보다는 낫다.

<이용균 스포츠부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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