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연중기획

비정규직 근로자는 ‘21세기 전태일’

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6년째 이어지는 기륭전자 노조의 시련은 언제쯤 끝날까

지난 1월 6일 오후 4시 기륭전자 사옥 앞에서 열린 연대집회에 참석한 노동자들. 오른쪽 맨 앞에 앉아 있는 이가 김소연 금속노조 기륭전자 분회장이다.

지난 1월 6일 오후 4시 기륭전자 사옥 앞에서 열린 연대집회에 참석한 노동자들. 오른쪽 맨 앞에 앉아 있는 이가 김소연 금속노조 기륭전자 분회장이다.

직접 쓴 글에서 전태일은 ‘소외’라는 ‘어려운 말’을 사용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누구보다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작고한 조영래 변호사는 <전태일 평전>에서 전태일에게 사상이 있었다면 그것은 “각성한 밑바닥 인간의 사상”이라고 말했다. 단 한 번도 빈곤의 수렁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밑바닥 인간 전태일이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온몸으로 겪어낸 깨달음은 ‘근로기준법 준수’라는 목숨을 건 외침으로 표출됐다. 전태일에게 평화시장 의류공장의 어린 여공들이 처한 근로 조건이 당대 최악의 노동 조건 표본이었다면 21세기의 전태일이 있어야 할 노동 현장은 어느 곳일까.

1월 6일 오후 4시 서울시 영등포구 신대방동 기륭전자 사옥 앞. 이틀 전 100년 만의 폭설이 중부권을 덮친 뒤 사흘째 계속되는 강추위 속에 30여 명의 노동자들이 모였다. 2010년 기륭전자 비정규직노조의 첫 연대집회에 참석한 이들이다. 칼바람이 불었지만 참석자들의 목소리는 우렁우렁했다.

맞은편 주상복합단지 입구 앞에 걸린 펼침막에는 연일 이어지는 집회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 선연하다. “고성방가에 아이들 교육 다 망친다.” “시끄러워 못살겠다. 언제까지 시위 계속할래.” 김소연 금속노조 기륭전자 분회장(40)은 “주민들이 모두 집회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항의하는 사람도 있지만 격려해 주는 사람도 있다”면서 “회사는 사옥을 이곳으로 옮긴 뒤 주민들에게 ‘죄송하다. 이들은 우리 회사 직원인 적이 없었다. 이들이 원하는 건 고용보장이 아니라 보상금’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말했다.

노조 결성하자 대량해고 이어져
기륭노조 박행란 조합원(48)의 사회로 시작된 집회는 오후 5시가 다 돼서야 끝났다. 김소연 분회장과 유흥희, 박행란, 윤종희 조합원들은 집회를 마치고 승합차로 금천구 가산동 기륭전자 옛 사옥 앞으로 이동했다. 차는 눈 쌓인 도로 위에 늘어선 차량들의 대열을 헤치고 40여 분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옛 사옥 앞에는 작은 컨테이너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기륭 조합원들의 농성장이다. 컨테이너 안에서 강화숙 조합원(40)이 동료들을 맞았다. 강씨는 지난해 2월에 태어난 딸 아이를 안고 있다. 동료들은 투쟁 기간에 태어난 이 아이에게 ‘투쟁둥이’라는 별명을 지어 줬다. 오는 4월에는 집회 사회를 도맡던 이미영 조합원(30)의 아이가 태어난다.

햇수로 6년째다. 2005년 7월 노조 결성 이후 조합원들에게 투쟁은 일상이 됐다. 기륭전자는 위성라디오와 차량용 내비게이션을 생산하는 업체다. 노조 설립 당시 회사 직원 500여 명 가운데 300여 명이 비정규직이었고, 그 가운데 250여 명이 파견직이었다. 대부분이 최저임금이나 마찬가지인 64만1850원을 받았다. 노조가 만들어지자 회사는 대량해고로 맞섰다. 그해 8월부터 파업에 들어갔다. 조합원들은 안 해 본 일이 거의 없다. 투쟁 1000일을 맞은 2008년 5월 19일 조합원들은 서울시청 앞 광장의 18m 높이 철탑에 올랐다. 죽음의 문턱까지도 가 봤다.

지난 1월 6일 오후 6시쯤 기륭전자 옛 사옥 앞 컨테이너 농성장에서 기륭전자 조합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유흥희, 윤종희, 강화숙, 박행란, 김소연씨.

지난 1월 6일 오후 6시쯤 기륭전자 옛 사옥 앞 컨테이너 농성장에서 기륭전자 조합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유흥희, 윤종희, 강화숙, 박행란, 김소연씨.

2008년 6월에는 당시 배영훈 사장과의 사이에 진전된 합의안이 나오기도 했다. 회사는 2년 후 정규직 복직을 제안했고, 노조는 1년 후 복직을 요구했다. 마지막 조정만 남은 상태에서 회사는 합의안을 전면 백지화했다. 그러자 조합원들은 집단으로 단식에 들어갔다. 1주일을 넘기고 2주일을 넘기면서 하나 둘 병원으로 실려갔다. 김소연 분회장과 유흥희 조합원(40)의 단식은 60일을 넘겼다. 김소연 분회장은 단식 63일째부터 소금과 효소도 끊었다. 평소 50여 ㎏이던 몸무게는 38㎏까지 줄었다. 김 분회장은 그 뒤로 단식을 30여 일 더 이어갔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나’는 질문에 김 분회장은 “해결하기 전에는 단식을 풀 수 없다는 생각만 했다”고 말했다. 김 분회장이 94일째에 이르러 단식을 푼 건 “정작 고통받아야 할 상대는 회사인데 나를 걱정하는 동료들만 고통받는 것 같아서”였다.

조합원들은 오랜 투쟁 끝에 급격하게 숫자가 줄었다. 초창기에 200여 명이던 조합원은 2008년 여름 무렵 30여 명으로 줄었다. 회사는 2008년 10월 15일 사옥 앞 농성 천막을 강제로 철거했다. 회사 측 직원들과 용역들이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왔다. 경찰은 구경만 했다. 조합원들은 그 모습을 보고 절망했다. 회사와의 교섭은 그 뒤로 완전히 중단됐다.

회사가 사옥을 가산동에서 신대방동으로 옮긴 뒤인 지난해 8월과 9월에는 회사 측과 집회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동작경찰서에 집회신고를 하기 위해 밤 12시가 되면 회사 쪽 직원과 노조원들이 경주하듯 경찰서로 달려가는 웃지 못할 풍경이 연출됐다. 결국 경찰의 중재로 회사와 노조가 격일로 집회를 하기로 결정했지만 지난 겨울부터는 회사 측이 집회를 한 적이 거의 없다.

새해 조합원들의 일상은 2009년과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돌아가면서 한 명씩 컨테이너에서 잠을 자고, 날이 밝으면 모여서 함께 아침을 먹는다. 오전 7시50분~9시는 기륭전자 최동열 회장의 집과 사옥 앞에서 출근 투쟁을 벌인다. 조합원들의 요구는 분명하다. 불법 파견에 대해 회사가 책임을 인정하고 정부가 파견법을 폐기하는 것이다.

조합원들 매년 전태일 열사 묘지 찾아
조합원들은 2008년 단식 때 “단식해도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면 무슨 희망으로 살아야 하나 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지금 조합원들은 무슨 희망으로 살고 있을까. 김 분회장은 “단식 후에도 문제가 풀리지 않았을 때는 내가 죽지 않아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상한 몸을 추스르면서 살아서 싸우자라는 쪽으로 생각을 바꿨다”고 말했다. 그는 또 “시간이 걸리더라도 여유 있게 싸우자고 다짐했다. KTX나 코스콤 같은 단위사업장들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 기륭의 투쟁에 도움을 줬다고 본다. 하는 데까지 해 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2008년 단식 때 농성장을 방문했다. 조합원들에게 “죽으면 안 된다”면서 “태일이가 있었더라면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해 싸웠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조합원들은 노조를 만들고 투쟁에 나서기 전까지는 전태일을 몰랐다. 투쟁하면서 <전태일 평전>을 읽었다는 박행란씨는 “책을 읽고 정말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난 그렇게까지는 못할 것 같다”면서 “책을 보면 지금 비정규직 모습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김 분회장은 “1970년의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지금의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이 노조를 만들면 해고 아니면 구속이다. 2010년 비정규직도 사람답게 살게 해 달라, 노동3권을 누리게 해 달라고 요구한다. 전태일 열사 분신 후 40년이 흘렀지만 본질적으로 달라진 건 없다”고 말했다.

“소연 동지가 전태일입니다.” 김소연 분회장의 휴대전화 장식에 적힌 문구다. 김형우 금속노조 부위원장이 지난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조합원들에게 준 것이다. 조합원들은 해마다 연초에는 마석 모란공원 전태일 열사 묘지를 방문했다. 올해는 가지 못했다. 날을 잡아 두었던 1월 4일 폭설이 내린 탓이다. 2010년 1월, 40년 전 전태일이 소망하던 세상은 미완의 꿈으로 남은 채 꽁꽁 얼어붙어 있다.

<글·사진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매체별 인기뉴스]

      • 경향신문
      • 스포츠경향
      • 주간경향
      • 레이디경향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