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변에서도 범죄가 발생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처음 든 것은 스무 살 때였다. 재수 학원에 다닐 때였는데, 옆 반 담임 강사가 학생들을 불법 촬영한 혐의로 경찰에 잡혀갔다. 사건은 ‘강남 유명 학원 강사 여학생 몰카’라는 기사로 짧게 보도됐다. 그전까지 나에게 범죄는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심각한 방송 프로그램에서나 보던 예외적이고 흉악하고 비일상적인 무언가였는데, 기사에서 다뤄지는 디지털 성범죄 사건이 매일매일 가는 학원에서 벌어진 것은 충격이었다.
사건은 또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몇 년 지난 때였다. 갑자기 만들어진 고등학교 여자 동창 단톡방에서 나쁜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가 학교에 다녔던 그 기간에 학교 기숙사를 불법 촬영한 사람이 있었고, 그 영상이 지금 온라인에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화가 났고 무서웠다. 무엇보다 3년 동안 먹고 자며 집처럼 지낸 기숙사에서 불법 촬영 사건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기함했다.
내가 10대와 20대를 특별히 범죄에 취약한 환경에서 보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일상 속에서도 범죄는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불쑥불쑥 나타났다. 성인이 돼서 주변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기자로서 여러 사건을 목격하면서 디지털 성범죄가 평범한 사람의 일대기에 무작위로 불쑥 끼어드는 경험이 꽤 흔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최근 딥페이크 성착취물 사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굳히게 된다. 몇몇 대학교에서 먼저 드러난 딥페이크 성착취물 피해가 초·중·고등학교, 군대, 가정에서도 발생했다는 폭로가 나오고 있다. 10년도 넘게 지났는데 여성들의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에서 디지털 성범죄가 발생하는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카메라에서 인공지능(AI)으로 도구와 방법만 바뀌었을 뿐이다.
소셜미디어 엑스(X·구 트위터)에서 딥페이크 피해가 발생한 학교 리스트가 공유되고, ‘딥페이크 피해 학교 지도’까지 만들어진 것도 봤다. 지도에 표시된 피해 학교는 제보를 통해 수집된 거라 정확하지 않다고 하지만 500개가 넘는다. 조그만 땅덩어리를 그린 지도에 빽빽하게 피해 학교가 표시된 것을 보고 암담해졌다. 피해 학교 지도를 만드는 것이 바람직한지 아닌지를 떠나서, 그 지도야말로 “언제 어디서든 디지털 성범죄가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언제 어디서든 디지털 성범죄가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이 “피해자가 평소에 더 조심했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거나 여성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말로 쓰이지는 않았으면 한다. 마음 놓고 쉬어야 하는 집이나 길게는 하루의 절반 가까운 시간을 보내는 직장이나 학교에서 뭘 어떻게 어디까지 조심할 수 있는지 감도 안 잡히기 때문이다.
이 말이 부디 모두의 일상을 위협하는 디지털 성범죄를 경각심을 가지고 몰아내는 데 쓰였으면 좋겠다. N번방 사건 때도, 그리고 이제는 잊힌 수많은 디지털 성범죄 사건이 드러날 때마다 매번 지겹게 하는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박채영 기자 c0c0@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