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법, ‘가습기메이트와 천식 인과관계 인정’ 전향적 판결
마침내 그 가습기 살균제에도 유죄 판단이 내려졌다. 서울고법 형사5부(서승렬·안승훈·최문수 부장판사)는 지난 1월 11일 가습기 살균제 제조·판매 기업인 SK·애경·이마트의 임직원들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이들이 만든 ‘가습기메이트’, ‘이마트 가습기 살균제’는 가습기 살균제의 대명사가 된 ‘옥시싹싹 가습기당번’과 성분이 다르다. 피해자는 있었지만, 옥시 제품과 달리 초기 동물시험에서 폐 손상이 관찰되지 않았다. 때문에 가습기메이트에 대한 모든 조치는 한 발씩 늦어졌다. 사건 초기에는 강제 수거 대상 제품에서 빠졌고, 피해자 구제가 늦어졌으며, 기업에 형사 책임을 묻기 위한 수사와 기소도 늦었다. 옥시레킷벤키저가 가습기 살균제 형사재판에서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뒤에야 기소됐지만, 2021년 1심에선 무죄가 선고됐다. 가습기메이트 피해자들의 발목을 잡은 건 늘 ‘시험실 과학’이었다. 이번 항소심 판단으로 피해자들은 뒤늦게나마 한 발 내디딜 발판을 갖게 됐다. 세계 최초의 가습기 살균제이자 원조 가습기 살균제, 가습기메이트가 1994년 세상에 나온 지 약 30년 만이다.
‘과학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에 답한 항소심 재판부
“1심 재판부처럼 완벽한 증거를 요구한다면 여전히 상황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일 수 있다. 결국 항소심 재판부의 시각이 가장 중요할 것 같다.”
2022년 12월 항소심에서 가습기메이트의 건강 피해를 입증할 새로운 연구가 증거로 제출되자 한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과학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재판부의 태도가 1심과 달라지지 않는다면 어떤 연구가 나온다 한들 상황 반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비관적 전망이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1심과 완전히 다른 결론을 내놨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이 학자의 말대로 ‘과학을 다루는 태도’였다.
1·2심은 도합 4년간 진행됐는데, 주로 가습기메이트의 건강 피해 관련 각종 연구 결과를 둘러싼 공방이 벌어졌다. 근본적으로는 법과 과학의 긴장 때문이었다. 형사재판은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전제 아래 엄격한 증명책임을 요구한다. 반면 100%가 없는 과학 연구는 ‘단정’하고 ‘확신’하기보다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 기업 변호인단은 각각의 연구가 ‘가습기메이트가 폐 손상이나 천식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한 채 ‘가능성만 제시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검사 측은 이들 연구를 개별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령 100점 만점에 70점, 80점, 90점짜리 연구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모두 기준에 못 미치니 증명력이 없다’는 게 변호인단의 논리였다면, ‘평균 80점으로 증명력을 평가해야 한다’는 게 검찰의 논리였다.
1심 재판부는 변호인단 논리에 힘을 실었다. 1심은 판결문에서 20여 가지 연구를 다뤘는데, 각 연구의 결과를 쓰고 그 연구의 한계를 들어 인과관계를 부정했다. 예컨대 한 역학조사는 가습기메이트를 사용한 피해자들이 폐렴, 천식 등 호흡기질환으로 진료를 받은 비율이 통계적으로 높게 나타나 “인과적 관련성이 의심된다”고 결론 내렸는데, 재판부는 “‘의심된다’는 표현 자체에 의하더라도 인과관계가 ‘입증됐다’고 보긴 어렵다”라고 판단했다. 그리고는 가습기메이트의 건강 피해를 입증한 연구는 한 건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반면 항소심은 판결문에서 23건 연구의 목적·방식·결과를 하나씩 기재한 뒤에 이를 묶어서 한 번에 판단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연구 및 시험 결과 그리고 이를 수행한 교수 내지 전문가의 증언을 개별적으로 봤을 경우 일반적 인과관계를 단정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각 연구 및 시험 결과, 각 전문가 증언이 모두 가습기메이트 성분 노출과 폐 손상 사이의 일반적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뚜렷한 방향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증거 전체를 종합해 보면 가습기로 분무된 가습기메이트의 반복적 흡입이 폐 손상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과학자들의 전문성을 존중한 결과로도 볼 수 있다. 단적으로 학자들이 동물독성시험을 하면서 가습기메이트 성분의 농도를 높인 것을 두고 1·2심의 평가는 엇갈렸다. 1심은 ‘가설에 부합하지 않는 결론이 나오면 농도를 비현실적 수준까지 높이면서 시험을 계속해서 진행해왔다’고 판단했다. 반면 항소심은 독성학 교과서를 인용하며 ‘고용량의 독성물질에 시험동물을 노출시키는 것은 사람에게서 발생할 수 있는 위해성을 발견하는 데 필요하고 유효한 방법’이라고 봤다. 동물시험은 대개 수개월 내로 진행되는데, 기간의 한계로 수년간 가습기메이트에 노출된 사람의 건강피해를 확인할 수 없으니 농도 상향이 필요했다는 학자들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강태경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자유심증주의에 따라 판사가 증거를 믿을지 말지에 대한 심증을 형성하는데, 판사의 자의에 의한 판단이 되지 않으려면 경험 법칙에 부합해야 한다. 판사가 모든 것의 전문가가 될 수 없으니 학자들의 경험 법칙을 존중한 것 같다. 재판부 스스로 재량을 최대한 줄인 것으로도 볼 수 있다”고 했다.
“동물시험은 보충적인 증거로 봐야”
“동물시험은 인과관계 증명에 있어서 보충적인 증거로 봐야 한다.”
항소심 재판부는 시험용 쥐보다 가습기메이트 사용자들에게 발생한 피해에 무게를 뒀다. 검찰이 SK·애경·이마트를 기소하면서 범죄 피해자로 적시한 사람은 98명이다. 이중 4명은 다른 가습기 살균제는 쓰지 않고 가습기메이트만 사용했다. 1심은 동물시험을 각개격파했듯이, 4명의 피해자 각각의 기저질환이나 다른 화학물질에 노출됐을 가능성을 들어 제품 사용과 건강피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그러나 이들이 입은 피해가 “동물을 상대로 이루어진 몇 가지 제한된 시험 결과보다 일반적 인과관계를 뒷받침하는 유력한 증거가 된다”며 “인과관계를 부정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면 종간 차이로 인해 발생할 수밖에 없는 동물시험의 한계 영역 내의 건강상 피해에 대한 피해자 보호에 심각한 공백이 생기게 된다”고 판단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동물시험 자체의 증거능력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1심은 동물시험 결과가 옥시제품과 달랐고, 이후 이뤄진 동물시험은 농도 등 그 조건이 가혹했으며, 권장사용량대로 썼다면 문제 성분의 공기 중 농도가 유해영향이 확인되지 않는 기준값(무영향농도·NOEL값)을 한참 밑돈다고 보고 이들 연구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 항소심은 2016~2019년 수행된 동물시험에서는 가습기메이트 성분의 폐 손상 가능성이 증명됐다고 봤다. 또 “시험이 반드시 실제와 동일한 환경 조건에서 수행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판시했다. 실제 사용환경과 달랐다고 하더라도 그 시험방식이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실사용환경과의 차이가 시험 결과에 미친 영향을 과학적으로 기술할 수 있다면 그 인과관계를 합리적으로 의심할 수 있다는 얘기다. 끝으로 1심이 동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용량을 의미하는 NOEL값을 사람에 그대로 적용했다는 점도 지적했다. 일반적으로 사람에 적용할 때는 시험동물과 사람의 차이, 같은 사람이라도 개체 간 차이를 고려해 NOEL값을 100(불확실성계수)으로 나눈다. 1심은 이런 변수를 고려하지 않아 독성반응을 실제보다 과소평가했다는 것이다.
특히 역학 연구를 수행한 학자들이 항소심 재판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다. 역학 연구는 특정 인구집단에서 질병이 발생한 원인을 사람을 대상으로 조사해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심은 이들 역학 연구가 조사 대상이 대표성이 없거나, 피해자 구제를 위한 목적으로 수행된 것이어서 인과관계를 설명해주지 못한다고 봤다. 아예 사실관계를 잘못 이해한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2011년 질병관리본부가 원인미상 폐질환 환자 16명을 대상으로 수행한 역학조사에 대해 1심은 가습기메이트를 사용한 사례는 없다며 인과관계를 부정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가습기메이트와 다른 가습기 살균제를 복합 사용한 환자가 5명 있었다. 2018년 국립환경과학원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입었다고 신청한 사람 400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여, 이들이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이후 천식 등 호흡기계 질병으로 입원하는 비율이 증가했다는 결론을 내놨다. 1심 재판부는 그러나 피해신청자는 가습기 살균제 사용자 전체를 대표하는 인구집단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 연구의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전체 사용자에 대한 자료 확보는 사실상 불가능함에도, 완전무결한 연구를 요구한 셈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역학 연구를 통해 증명되는 것은 가습기메이트를 사용한 피해 인정 신청자 집단에 속한 개인이 걸린 천식 등 호흡기질환이 가습기메이트로 인해 발생했을 일반적인 가능성”이라며 “가습기메이트의 사용과 폐 질환 및 천식 사이의 역학적 상관관계가 일정 부분 인정된다고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나아가 피해자들의 천식 피해도 가습기메이트가 원인이 됐음을 인정했다. 천식은 다양한 원인으로 발병할 수 있는 질환이다. 이런 질환을 법정에서는 ‘비특이 질환’이라 부른다. 반대로 가습기 살균제 사용자에게서만 나타나는 폐섬유화는 ‘특이 질환’이다. 원인과 결과가 명확히 대응하기에 법정에서도 인과관계 인정이 비교적 수월하다. 반면 비특이 질환은 어떤 특정 요인이 원인이 됐다고 단정할 수 없기에 인과관계 인정이 더 까다롭다. 입증 책임이 무거운 형사재판에서 더욱 그렇다. 항소심 재판부는 그럼에도 피해자들의 천식과 가습기메이트 사용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동물시험과 역학 연구 이외에 전문가 의견도 쟁점 판단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가습기 살균제 역학 연구를 다수 수행한 김재용 연세대 의대 교수는 “특이 질환이라는 용어는 현대 역학에서 과학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다. 현대 역학은 일대일의 특이적 관계란 매우 예외적인 경우로 간주하며, 다대다의 관계를 일반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의견을 항소심 재판부에 제출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 항소심 재판부의 천식 인과관계 인정은 전향적이라 평가할 수 있다.
“옥시와 공범…과실 책임 무겁다”
항소심 재판부의 선고는 ‘만일 그때로 다시 돌아갔더라도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한다. 이에 대한 항소심 재판부의 답변은 300쪽에 달하는 판결문이다. 방대한 답변은 “이 사건은 제품 출시 전 동물들을 상대로 한 안전성 검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연령대의 불특정 다수의 국민에게 가습기 살균제 제품이 유통됨으로써 사실상 장기간에 걸쳐 전 국민을 상대로 가습기 살균제의 만성 흡입독성시험이 행해진 사건”이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유해 화학제품을 안전성 검증 없이 제조·판매한 기업들의 과실 책임을 무겁게 본 것이다. 화학물질에 독성이 있다는 것은 상식에 가깝지만, 대기업인 SK·애경·이마트 누구도 책임감을 갖고 제품 안전성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유공은 최초의 가습기 살균제인 가습기메이트를 출시하면서 안전성 검증을 서울대에 의뢰했는데, 이 보고서가 나오기도 전인 1994년 11월 제품을 출시했다. 1995년 8월에 나온 서울대 보고서는 백혈구 수치 감소 등이 나타나 좀더 시험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유공을 인수한 뒤 가습기메이트 사업을 넘겨받은 SK도 2000년 6월에는 이 보고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조치 없이 이듬해 제품을 출시했고, 2002년에는 애경과 가습기메이트 납품 계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SK 측은 가습기메이트 성분의 물질안전보건자료(MSDS)를 애경에 넘기면서 물질의 안전성을 의심할 수 있는 내용은 삭제하기도 했다. 서울대 보고서 등을 건네받은 애경은 물질의 안전성을 우려하고도, 별다른 조치 없이 가습기를 많이 사용하는 가을에 맞춰 가습기메이트를 2002년 9월 출시했다. 그러고도 제품 라벨에는 ‘인체에 해가 없는 안전한 제품’이라는 문구를 넣었다. 이마트는 2006년부터 애경 가습기메이트의 PB상품인 이마트 가습기 살균제를 판매했다. 제품의 안전성을 의심하는 소비자의 민원이 수차례 접수됐지만, 이마트에는 제품의 안전성을 관리할 조직이나 인력이 전혀 없었다.
이 과정에서 엿보이는 것은 대기업의 안전성에 대한 무시와 무지만이 아니다. 앞뒤 가리지 않는 이윤추구도 읽힌다. 홍지호 당시 SK케미칼 대표는 시즌 상품인 가습기메이트의 판매가 종료된 후 해당 시즌 매출액 예상이익을 보고받았다. 애경 관계자는 검찰에서 ‘안용찬 당시 애경 대표가 제품 하나라도 출시하는 것이 급했기 때문에 그냥 안전성 자료가 없어도 출시를 허락했던 것으로 안다’고 진술했다. 검찰이 제출한 공소사실을 보면, 이마트가 가습기메이트 PB 상품을 출시하던 당시 정용진 부회장 등 그룹의 최고경영진은 ‘PB 상품을 획기적으로 확대해 가격혁명을 이루겠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의 반대편에서 대기업의 임직원들은 실적을 쌓고 사업을 확장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SK·애경·이마트가 이미 확정판결이 내려진 옥시 등 가습기 살균제 제조·판매 기업과 공범 관계에 있다고 판단했다. 옥시 재판에서 서로 성분이 다른 가습기 살균제를 만든 옥시와 세퓨의 공범관계가 성립한 바 있는데, 이를 SK·애경·이마트까지 확장한 것이다. 옥시와 세퓨의 성분은 고분자인 반면, 가습기메이트 성분은 저분자로 물리화학적 특성이 다르다는 기업 변호인단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장에서 이들 제품이 경쟁적으로 판매돼 각 제품이 건강 피해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가려내기 어려운 데다, 기업들이 영업비밀이라며 성분을 공개하지 않아 소비자들이 성분을 가려서 제품을 구매하기도 어려웠다고 판단했다.
이제 한 발을 디뎠을 뿐이다. 피해자들은 아직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피해자들은 지난 1월 16일 최고 금고 4년형이 선고된 피고인들의 형량이 너무 가볍다며 양형 부당을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각각 금고 4년이 선고된 홍지호·안용찬 전 대표는 상고장을 제출했다. 검찰도 퇴사자의 공범 인정 여부 등 무죄 부분에 대해 상고하기로 했다.
<이효상 기자 hslee@kyunghyang.com, 김원진 기자 oneji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