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터 온 파이어, 마이단
2013년 11월부터 2014년 2월까지 93일간 계속된 대규모 시위(유로마이단)는 현재의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르는 거대한 시발점을 이루는 역사적 사건이다. 21세기 국제정세를 뒤흔든 시위의 이름은 아주 간단하게 명명됐다. ‘마이단’은 광장을 뜻하는 우크라이나 말이다.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이우(키예프) 중심 광장은 과거에는 ‘10월 혁명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우리에겐 2016년 연말의 광화문 광장 격이다. 여기에 ‘유럽’을 뜻하는 ‘유로’가 붙는데, 해당 사건의 성격을 좌우하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윈터 온 파이어>, ‘광장’의 상황일지 해당 사건을 다룬 작업이 더 있긴 하지만 현재까지 국내에서 가장 접근 수월한 작품은 넷플릭스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윈터 온 파이어>다. 영화는 시작되자마자 시위 90여일째, 유혈로 치닫는 급박한 현장을 비춘다. 진압경찰의 총격 속에서 열여섯 살 소년 시위대와의 짧은 인터뷰로 강렬한 인상을 던진 후 카메라는 시위가 처음 시작된 2013년 11월 21일부터 연대기적 흐름을 담는다. 영화는 복잡한 역사적 배경과 정치·사회적 요소를 분석해주진 않는다. 상당히 빠른 완성 시기를 감안하면 애초 그렇게 방향 잡기도 불가능했을 테다. 대신에 마이단 상황을 주요 국면 변화에 따라 달력 방식으로 소개하는 데 총력을 다한다.
카메라에 담긴 시위 출발은 소박하다. 청년층 중심으로 자생적으로 모여든 시위대는 야당이나 사회운동단체가 보기에는 지나칠 만큼 자유분방하다. 그들은 노래하고 춤추며 2016~2017년의 광화문 촛불을 연상케 하는 집회를 이어간다. 시위 참여가 늘어나자 이 정도 모이면 조금은 반영되겠지 기대감도 싹튼다. 모두가 알듯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정권은 우왕좌왕 끝에 강경진압을 시도한다. 마이단에서 군중을 몰아내려 경찰이 들이닥치자 자연히 시위대는 거점을 지키기 위해 대항한다. 권위주의 정권이 폭력으로 일관하자 시위대는 자위권 차원에서 조직화한다. 부상자 치료를 위한 야전병원, 군 경력자들이 책임지는 광장 방위대, 차량시위대 등으로 분업화하고 경찰을 막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설치한다. 시위대와 경찰의 대치는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의 중장보병(重裝步兵) 전투처럼 치닫는다.
정권은 시위의 자유를 제약하는 법을 통과시키지만, 악법은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 될 뿐이다. 해가 바뀌고 초조해진 정권은 강경대응으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경찰 선두엔 특공대 ‘베르쿠트’가 과거 한국 군사정권 시절 시위 진압에 악명을 날리던 ‘백골단’ 역할을 맡는다. 여기에 경찰 대신 ‘더러운 임무’를 청부 맡은 ‘티투쉬키’란 깡패들이 판을 친다. 인명피해가 늘어가며 광장은 그야말로 전쟁터가 된다.
시위대의 요구도 피해에 비례해 더 강경해진다. 정치범 석방, 의회의 행정부 견제기능 강화, 조기 대선을 요구하며 광장에서 의회 진격을 시도한다. 이제 경찰은 총을 쏘고 시위대는 화염병을 던진다. 경찰은 저격수를 동원해 적십자 대원이나 사제까지 무차별 공격한다. 장갑차가 바리케이드로 돌진하다 불탄다. 시가전 그 자체다. 카메라에 등장하던 시위대가 총에 맞아 죽거나 경찰에 잡혀 유린당하는 광경이 펼쳐진다. 전쟁터 한복판으로 강제 소환되는 기분이다.
2014년 2월 19일 하루에만 20여명이 사망하고 400여명이 부상으로 실려간다. 야당이 타협안을 가져오지만, 동료들의 죽음에 격분한 시위대는 즉각 퇴진이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다. 3일 후 더 버티지 못한 정권이 붕괴되고 대통령은 헬기로 도주한다. 93일의 시위 동안 125명 사망, 65명 실종, 1890명이 후송돼 치료를 받은 것으로 공식 집계됐다.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승리한 시위대는 남녀노소, 종교와 민족의 차이를 초월해 하나가 된 것처럼 보인다.
영화를 만든 이들은 시위의 최초 주체였던, 소련 붕괴 후 1990년대에 태어난 청년세대가 더 이상 권위주의적인 구체제 대신 서유럽으로 상징되는 자유체제를 선택한 것으로 마이단의 의의를 풀어낸다. 공동의 체험으로 승화된 마이단을 통해 비로소 ‘우크라이나’의 통합된 국가 정체성이 확립됐다는 시각은 곧 제작진의 목소리인 셈이다.
<마이단>, 장대한 시민혁명의 풍경화 세르히 로즈니차 감독은 시위 소식에 급히 다른 일정을 취소하고 키이우로 향한 덕분에 광장이 변하는 흐름을 온전히 담을 수 있었다. 여기에다 감독은 독특한 접근법으로 작업의 가치를 극대화한다. <마이단>은 우크라이나의 21세기 역사가 결정되는 4개월의 시작을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우크라이나 국가를 제창하는 장면으로 연다. 화면 가득한 사람들의 얼굴. 이어서 카메라는 광장 곳곳을 비추기 시작한다. 진행자와 현장 상황실의 안내방송이 스피커로 이어지지만, 영화는 특정 개인의 영웅화를 배제한 채 시민들의 표정과 소소한 순간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정치적 시위나 투쟁을 담은 영화에서 반드시 등장하게 마련인 영웅적 지도자나 친절한 전문가 해설은 찾아볼 수 없다. 감독이 의도적으로 배제했기 때문이다.
대신 감독은 광장의 작은 일상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진 거대한 군집체로 마이단을 재구성한다. 전반부 내내 집회에 참가하고 광장을 지키는 이름 모를 시민들의 표정과 그들이 나눠 맡은 임무 수행과정이 일개미들의 작업풍경처럼 이어진다. 사람들은 다른 시위 참가자들에게 음식물을 제공하거나 바리케이드를 쌓는 등 분주하다. 어느새 크리스마스 주간. 집회에 캐럴 합창과 자작시 낭독이 등장한다. 연말엔 누구나 소원이 이뤄지길 꿈꾼다. 해가 바뀌고 정부는 묵묵부답. 시위 풍경은 점차 경직돼간다. 시민들의 복장이 군사화되고 경찰과의 충돌은 물리적으로 변한다. 자유롭던 다양성의 광장은 이제 대립하는 두 세력 간 힘과 힘의 대결장으로 재탄생한다.
두 번째 국가가 제창된다. 미세한 공기의 변화가 감지된다. 광장에선 일진일퇴 공성전이 거듭된다. 시위대는 전위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이들과 지원하는 이들로 분리된다. 불꽃놀이가 크리스마스 주간 이후 다시 등장하지만, 이제는 공격용 폭죽으로 활용된다. 사람들은 계속 쓰러져가고 광장은 불바다로 변한다. 한편에선 ‘광장’을 되찾으려는 몸부림마냥 거리를 청소하는 풍경도 관찰된다. 어느새 2월 중순, 가장 격렬했던 충돌과 살상이 그치고 정적이 감돈다. 희생자들을 향한 추도사와 운구가 광장을 차지한다.
영화는 정권이 무너지는 승리의 광경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자막으로 희생자의 숫자와 간략한 상황 요약이 이어지며 막을 내린다.
<마이단>이라는 심플한 제목은 감독의 치열한 고민 끝에 탄생한 결과물이다. 대개 우리는 해당 사건을 ‘유로마이단’이라 부른다. ‘유럽 광장’이란 뜻이다. 즉 마이단 시위를 친서방화 흐름으로 간주하는 태도다. 그런데 왜 굳이 유럽을 붙이지 않고 광장 자체에 주목했을까? 그 행간에 감독이 상황을 바라보는 입장이 농축돼 있다. 두 다큐멘터리(<윈터 온 파이어>와 <마이단>)의 미세한 결 차이는 영화를 봐야 감지할 수 있을 문제다. 로즈니차 감독은 이 영화에 담지 못한 것들, 크름반도(크림반도) 병합과 돈바스 전쟁을 다룬 후속 작업을 선보이며 고민을 이어가는 중이다.
<김상목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