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생도 형사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강당 입구에서 벌어진 한바탕 소란. 얼떨결에 '유인물'을 받아든 학생도, 몸싸움 끝에 그것을 빼앗은 형사도 소란 자체보다 그것이 진정된 뒤의 상황에 더 당황했다. 8절 갱지에 아무 글자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햇빛에 비춰보고 물에 담가보고 불에 쬐어봐도 헛수고였다. 급히 다리미를 구해와 다려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말 그대로 백지였다. 사실인지 유언비어인지 확인되지 않지만 백지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해 정밀 분석까지 했다는 소문이 나중에 나돌기도 했으니... .

1975년 특별했던 '연세의 봄'

백지를 배포한 학생은 2~3학년생 4명이었다. 철학과 3학년 김철기(현 아이보트 대표), 물리학과 3학년 김성만(전 한겨레가족찾기운동본부 사무총장), 경영학과 2학년 강성구(전 제2건국위원회 교육홍보국장), 토목과 2학년 우원식(현 열린우리당 의원)이었다. 이들은 즉각 현장에서 기관원들에 체포돼 교내 학생과를 거쳐 신촌역 앞 대현파출소로 압송됐다.

이들이 뿌린 것이 백지로 확인되자 경찰은 닭 쫓던 개 모양이 됐다. 무언가 주장을 한 근거가 없으니 꼬투리를 잡을 게 없었다. 집회를 한 것도 아니었고, 구호를 외친 것도 아니었다. 무소불위의 긴급조치 9호도 백지선언문 앞에는 무용지물이었다.

"우리가 뭘 잘못했습니까?"

학생들이 따졌다.

"백지를 돌린 이유가 있겠지."

"중간고사 기간이라 공부할 때 연습지로 사용하라는 건데... ."

학생들이 천연덕스럽게 말하자 이들을 조사하던 정보과 형사는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잔소리 마. 죄목은... ."

그의 대답이 더 기발했다.

"이심전심 유언비어 유포죄야!"

그로부터 몇 시간 뒤 교내 윤동주 시비 앞. 일단의 학생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이라 캠퍼스는 착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이들은 아무 말 없이 시비 앞에 도열해서 묵념을 했다. 담배 한 대 피울 만큼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 교내에 상주하던 형사들이 슬금슬금 주위를 에워쌌다. 학생들이 눈을 뜨자 형사들은 두 사람을 학생처 별관으로 끌고 갔다. 백지선언문 사건으로 연행됐다가 훈방된 강성구와 그의 신일고 동기인 화공과 2학년 박성훈(현 사회복지법인 아이들과미래 상임전문위원)이었다.

윤동주 시비 묵념 사건 역시 긴급조치 9호에 저촉되는 요소가 없었다. 경찰은 끓어오르는 부아를 애써 가라앉히고 이들을 또 다시 훈방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4-19혁명 17주년 기념일에 연세대에서 벌어진 이 두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었다. 뒤에 벌어질 대사건의 서막이었다. 사찰기관과 학교 당국은 그것을 알았다. 연세대 학생운동의 전통과 컬러를 꿰고 있는 서대문서 정보라인은 이를 사전에 차단하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하지만 마땅한 방도를 찾지 못했다.

무악골의 영웅 강성구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될 무렵 다른 대학과 마찬가지로 연세대 학생운동권도 초토화됐다. 운동권은 싹쓸이되고 조직은 지리멸렬됐다. 긴급조치 9호를 부른 1975년 봄 대학가 시위의 하이라이트 가운데 하나가 연세대 4-3데모였다.

연세대의 '1975년 봄'은 특별했다. 총장을 위시한 학교 당국이 학생과 한편이 되어 박정희 정권에 대항했기 때문이다. 박대선 총장은 문교부의 지침을 무시하고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됐다가 풀려난 김찬국 교수(전 상지대 총장) 등의 복직과 김영준(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장)-김학민(전 학민사 대표)-최민화(현 환경관리공단 감사) 등의 복교 절차를 밟았다. 이처럼 학생과 학교 당국이 혼연일체가 되어 정부 방침에 저항한 예는 연세대가 아니고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렇게 되자 문교부는 즉각 계고장을 발부했고, 이에 질세라 박 총장도 사임을 발표했다. 1975년 4월 3일이었다. 문교부의 총장 사임 압력에 반발해 단식농성을 벌이던 학생들은 '총장 사표 반려'와 '문교부 장관 퇴진'을 요구하며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민청학련 사건 1주년 기념일이기도 한 이날 서울대-서강대-한신대 등에서도 집회-시위가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연세대 4-3시위는 개교 이래 최대 규모라고 할 만큼 극렬했다.

연세대는 모든 단과대학이 한 캠퍼스에 있다. 이날 시위에는 이공대-의대-음대까지 총동원됐다. 의대생과 간호대생이 흰 가운과 마스크를 쓰고 시위에 나서 비장한 분위기를 더했고, 음대 밴드부가 공과대학 옥상에서 진군 나팔소리로 시위대의 진격을 북돋웠다. 음대가 전면에 나선 것은 이 시위와 1987년 이한열 장례식 등 손에 꼽을 정도다. 그만큼 거교적 시위였다는 얘기다.

전교생 8,000여명 중 7,000여명이 참여했다는 이 시위로 정문이 무너지고 동문-북문-서문이 모두 돌파됐다. 그 결과 학교에는 2개월의 장기 휴교령이 떨어졌고, 민족문화연구회-인간걱정반-목하회(木下會) 등 모든 서클이 해체되거나 활동이 정지됐다. 총학생회장 유지준(개인사업)을 비롯해 김건만(현 칠원공조 대표)-고도원(전 청와대 연설담당비서관)-김규복(현 대전 빈들교회 목사)-황순영(전 현대전자 이사)-장광근(전 한나라당 의원) 등 수십명이 무더기로 제적됐음은 물론이다.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됐을 때 연세대 학생운동은 재기불능 상태였다. 서울대-고려대와 마찬가지로 운동권이 싹쓸이됐기 때문이다. 숨어 있는 의식분자들을 모을 사람도, '끼' 있는 후배를 가르칠 선배도 없었다. 연세대는 앞으로 몇 년간은 데모를 할 엄두도 내지 못할 것 같았다. 무악의 독수리상은 그렇게 하릴없이 무심하게 백양로를 지나치는 학생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세월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1976년 3월. 새 학기가 시작됐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캠퍼스는 평화롭다 못해 적막감이 돌 지경이었다.

강성구는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고위공직자인 아버지와 독실한 기독교인 어머니의 슬하에서 구김살 없이 성장기를 보낸 그가 사회문제에 처음 눈뜬 것은 고교 3학년 때였다. 연세대가 휴교중이던 1975년 4월 12일 신일고생의 광화문 시위(본 시리즈 제8화 참조, 2004년 2월 19일자) 때 처음으로 시위에 가담하고 경찰에 연행되는 경험을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녔던 그는 미션스쿨인 신일고를 졸업하고 연세대에 입학, 기독학생회(SCA)에 가입했다. 당시 SCA는 이대수(현 경기시민사회포럼 사무처장, 목사)-김철기(현 아이보트 대표)-윤문종(미국 거주)-이창규(현 SK네트웍스 전무) 등 75학번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이대수는 그의 신일고 1년 선배이기도 했다.

'주전론'과 '주화론'의 충돌

SCA는 긴급조치 9호 아래에서 살아남은 유일하다시피 한 학생조직이었다. 문교 당국은 '지도교수제'라는 이름으로 학내 서클을 통제했다. 보름 이상 지도교수가 공석일 때 그 서클은 자동해산됐다. 교수들은 서클 지도교수를 맡아 골치를 썩일 필요가 없었다. 교수들이 기피하니 등록하지 못한 서클은 공중분해되거나 지하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션계 학교인 연세대가 SCA마저 외면할 수는 없었다. 교목실장이 당연직으로 SCA의 지도교수를 맡게 되어 있었다. 씨앗은 바로 여기에서 잉태됐다. 밭이 있으면 싹이 자라는 법이다. SCA의 회원이 의식화되거나 의식분자가 SCA의 우산 속으로 들어오거나... . 긴급조치 9호 시대 연세대 학생운동의 지휘봉이 저절로 SCA로 굴러떨어진 것이다.

SCA가 급속히 운동권화한 데는 강성구를 비롯한 76학번의 '끼'가 결정적이었다. 우원식은 경동고 시절 이미 SCA의 준회원 격이었다. 그의 형 우천식(현 삼성화재 부장)이 연세대 화학과 75학번으로 SCA 의식분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세검정 집에는 이대수-김철기-이창규-윤문종-김성만 등 75학번 SCA 멤버들이 자주 찾아왔다. 간호학과 구성애(현 아우성센터 소장)도 '세검정 멤버'의 일원이었다. 우원식은 이들에게 라면도 끓여주며 함께 어울렸다. 연세대에 입학했을 때 그는 자동적으로 SCA에 가입돼 있었다.

기계과 76학번 장신환(현 원광디지털대 교수). 그 역시 미션스쿨인 대광고 출신이었다. 발 넓고 활달한 그도 우원식과 마찬가지로 입학 전부터 SCA에 스카우트됐다. 이창규-김철기가 그의 고교 선배였다. 공대 수석입학에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장기자랑으로 상을 받은 경력이 있어 그는 처음부터 선배와 교수, 기관원의 주목을 받았다.

이밖에 노영민(현 열린우리당 의원)-김거성(현 국제투명성기구 이사, 반부패국민연대 사무총장)-오성광(현 호주 시드니교회 담임목사) 등 '끼'가 철철 넘치는 의식분자들이 속속 SCA의 우산 속에 들어왔다.

SCA가 조직적으로 의식화되기 시작한 것은 75학번부터라고 할 수 있었다. 75학번이 입학했을 때 이들을 가르칠 선배는 전멸한 상태였다. 73학번 이덕승(현 녹색소비자연대 상임위원장) 등이 고작이었다. 최민화 등 민청학련 세대가 학교 밖에서 이들을 챙겼지만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75학번이 자생적으로 의식화했고, 76학번의 기세가 이들을 압도했다. 1976년 무악의 봄기운은 이렇게 무르익어갔다.

75~76학번 SCA 조직이 일으킨 첫 사고가 그해 12월 일어난 '기독학생회 수련회 사건'이었다. 60~70명의 대가족을 이룬 SCA는 전체가 움직이지 않고 몇 개 소그룹으로 활동했다. 학기중에는 한국사회연구회-국제사회연구회 등으로 나뉘어 학습 활동을 했고, 방학 중에는 도시봉사단(도봉단)-농촌봉사단(농봉단) 등이 따로 움직였다. 당시 농봉단장은 김철기였고, 도봉단장은 윤문종이었다.

이 가운데 도봉단은 가장 급진적인 그룹에 속했다. 강성구-박성훈-오성광-장신환 등이 단원으로, 이들 모두 강경한 주전론자(主戰論者)였다. 도봉단은 동계 봉사활동을 준비하면서 참가자 수련회를 12월 26일부터 28일까지 경기 고양군 장자원에서 실시했다.

그런데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온 10여일 후 참가자 전원이 경찰에 연행됐다. 수련회 중에 '박동선 사건'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렸고, '바람이 분다' 등 불순한 노래를 불렀다는 게 그 이유였다. 별것 아닌 내용으로 트집을 잡는 것도 기막혔지만 단원끼리 한 얘기가 경찰의 귀에 들어간 것 또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단원들은 그 사건 후 SCA에 발을 끊은 친구가 프락치였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도봉단장인 윤문종은 고집이 강한 원칙주의자이면서 다혈질이었다. 장신환은 노래를 잘하고 사회를 잘 보았다. 그는 1980년대 운동권 결혼식의 단골 사회자로 유명하다. 그는 오성광과 서울대 심상완(현 창원대 교수) 등과 함께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에서 노래를 가르치기도 했다. 거기서 만든 노래집이 서울대 [메아리]의 전신 격이다.

경찰은 교내 가장 위험집단인 도봉단을 거세하기 위해 이들을 연행했지만 구속하는 데는 실패했다. 수련회에서 얘기했다는 '유언비어'가 조사중에 언론에 사실로 보도됐기 때문이다. 결국 수련회를 주도한 윤문종과 불순한 노래를 가르친 장신환이 무기정학 처분을 받는 것으로 수습됐다.

SCA 내부는 주전파와 주화파로 양분돼 있었다. 주전파는 당장 치고나가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주화파는 아직은 역량을 축적하며 암중모색할 시기라는 입장이었다. 75학번은 주로 후자에 비중을 두고 있었고, 76학번은 주전론을 펴며 선배를 압박하는 형국이었다.

운동권 '싸이클링히트'

75학번 중에는 김철기가 주전론에 동조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열혈분자로 알려져 있었다. 대광고를 졸업하고 연세대에 지원해 합격하자 SCA에는 이미 그에 대한 소문이 나 있었다. "김동완의 동생이 연세대에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기독교계에서 그의 집안은 이미 유명했다. 어머니가 형제교회의 설립자이고 두 형이 신학교를 나와 목회자의 길에 들어섰으니 그럴 만도 했다. 김동완(현 평화를만드는 교회 담임목사)은 감신대를 졸업하고 KSCF 전도사를 하고 있었는데, 민청학련 사건으로 15년을 선고받고 풀려난 경력이 있었다.

집안 배경만으로도 블랙리스트에 오를 만한 김철기는 SCA의 식구가 된 뒤 더욱 찍혔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폭발하는 성격 때문이었다. 그는 고무신을 신고 괴상한 행색으로 캠퍼스를 활보했고, 걸핏하면 기관원과 마찰을 빚었다. 4-19 백지선언문 사건 때도 학생처에 연행되자 책상을 뒤엎으며 "도대체 여기가 학생처냐, 정보과 수사실이냐"며 상주하는 형사들에게 대갈일성했다.

이 때문에 그는 학창시절 학생으로서 받을 수 있는 모든 징계를 다 받았다. 유기정학-무기정학-제적-구속을 다 받는 것을 운동권에서는 '사이클링히트'라고 부른다. 물론 그는 이 진기록의 보유자다. 제적돼 군복무를 하던 중인 1979년 4월 회식 자리에서 '바람이 분다'를 불렀다는 이유로 구속된다. 이른바 '민중가요 사건'이다.

백지선언문 사건은 바로 그의 '작품'이었다. 이날 원래 거사하려던 계획이 불발된 데 따른 분풀이성 내지 자책성 '행사'였던 것이다. 4월 거사를 주장해온 그는 76학번 팀과 함께 4월 19일을 D데이로 잡고 준비를 해왔다. 그런데 마지막 점검을 위한 세검정 모임 때 우원식 쪽에서 펑크가 나는 바람에 거사 자체가 무산됐다.

"4월 15일쯤 세검정 우리 집에 거사팀이 모이기로 했다. 그렇게 모여서 치고나가려고 했는데 마침 이대수 선배가 그걸 알고 전화를 했다. 그때 형이 다른 방에서 같이 전화를 받았다. 형이 눈치채고 아버지한테 말하는 바람에 나는 집에 붙잡히고 계획도 깨져버렸다."

우원식의 최근 회고. 백지선언문 사건은 김철기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오늘이 4-19라는 것이라도 알리자"며 즉흥적으로 종이를 사서 우원식 등과 함께 돌린 사건이다. 이들은 백지를 나눠주면서 학생들에게 "오늘이 4-19입니다. 백지성명밖에 낼 게 없습니다"고 말했다.

강성구-박성훈의 '윤동주 시비 묵념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긴급조치 9호에 대한 무언의 거부이자 거사 불발을 자책하는 통한의 '백지구호'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이들은 몰랐다. 자신들이 어떤 일을 저지를지를, 그리고 어떤 결과가 닥칠지를.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