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이순신의 ‘쌍룡검’은 본래 없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2019.01.07

사후 200년 동안 간행된 책에는 안 나와… 충무공을 기리는 쌍장검을 오해한 듯

현존하는 이순신과 관련된 칼은 모두 6자루다. 현충사에 소장된 장검 한 쌍, 통영 충렬사에 소장된 명나라 신종이 선물했다는 귀도(鬼刀) 한 쌍과 참도(斬刀) 한 쌍이다. 그 외에 현재는 소재 불명이 된 ‘쌍룡검’이라는 한 쌍의 칼이 이순신의 칼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쌍룡검은 이순신의 칼이 아니다. 쌍룡검이 이순신의 칼이라고 알려진 계기는 박종경(朴宗慶·1765∼1817)의 <돈암집(敦巖集)>에 실린 ‘원융검기(元戎劍紀)’ 때문이다. 특히 조선고서간행회가 1910년에 궁내부박물관 소장 유물을 촬영해 실은 <조선미술대관> 속의 두 자루의 칼과 설명문은 이순신의 칼이라는 결정적 근거가 되곤 했다. <주간경향>은 2013년 9월 24일자 1044호에서 ‘이순신 쌍룡검 어디로 갔을까’를 기사로 다뤘다.

<조선미술대관> 중 원융검 / 연합뉴스

<조선미술대관> 중 원융검 / 연합뉴스

원융검기에 따르면, 훈련대장 박종경은 1811년 가을에 병조판서 심상규로부터 이순신이 차고 다녔다는 칼 한 자루를 받았는데, 그 칼에는 “쌍룡검을 만드니 오랜 세월이 지날지라도 그 기운은 오히려 웅혼할 것이구나. 산에 맹세하고 바다에 맹세한 그 뜻, 충성을 다하려는 분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구나(鑄得雙龍劒 千秋氣尙雄 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라는 시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박종경은 시구의 ‘쌍룡검’이라는 것에 착안해 다른 한 자루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머지 한 자루를 구하고자 했다. 10여일이 지나 아산 사람에게서 똑같은 다른 칼을 구한 뒤에 쌍룡검을 이순신의 칼로 여겼다. <조선미술대관>의 설명문에도 원융검기 속의 시 부분이 동일하게 나오고, 칼의 사진을 보면 ‘원융검’이라는 표찰이 붙어 있다. 박종경이 소장했던 그 칼과 동일한 모습이다.

쌍룡검과 쌍장검의 같은 글귀

그러나 필자는 쌍룡검과 관련해 고종 때 문신 고산 임헌회(任憲晦·1811~1876)가 쓴 <통제사 이공 묘갈명(統制使李公墓碣銘)>에 주목해 <주간경향>과의 인터뷰에서 “박종경이 얻은 칼은 어쩌면 이복연이 충무공을 존경해 만든 칼일 수도 있다”고 추측했었다. 그 이유는 ‘묘갈명’에 실린 “공(통제사 이복연)이 한 쌍의 장검을 만들고 ‘산에 맹세하고 바다에 맹세한 그 뜻, 충성을 다하려는 분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구나’라는 글귀를 새겼다(公鑄得一雙長劒 刻以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之句). 대개 공은 평생 이 충무공을 우러르며 그리워했기에 그 마음을 이처럼 시로 표현한 것이다”라는 기록 때문이었다. 삼도수군통제사 이복연(李復淵·1688~?)이 제조했다는 쌍장검과 검명은 원융검기 속의 시와 거의 일치한다. 쌍룡검(원융검기)과 쌍장검(묘갈명)은 “오랜 세월이 지날지라도 그 기운은 오히려 웅혼할 것이구나(千秋氣尙雄)”에서 차이가 있으나, 뒷부분의 시는 같다.

1819년쯤에 이순신의 후손 이호빈(李浩彬·1777∼?)이 저술한 아산읍지인 <신정아주지(新定牙州誌)>에는 현존 현충사 장검과 이복연의 쌍장검을 각각 설명하고 있다. 현충사 장검에 대해서는 “충무공에게 한 쌍의 장검이 있어, 검면에 자명(自鳴)을 새겼다. 하나는 ‘석 자 장검 높이 들어 푸른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바다가 함께 기뻐하네(三尺誓天 山河動色)’, 또 하나는 ‘단칼에 더러운 무리 깨끗이 쓸어버리니, 산과 바다가 핏빛으로 물드는구나(一揮掃蕩 血染山河)’라고 했다. 지금까지 후손 집에 전해져 오고 있다”고 했다. 쌍장검에 대해서는 “이복연은 단석(端錫)의 아들이다. 통제사로서 한 쌍의 장검을 만들었다. 검명은 ‘산에 맹세하고 바다에 맹세한 그 뜻, 충성을 다하려는 분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구나’라고 했다. 모두 이 충무공을 우러르는 뜻이다(李復淵 端錫也 以統制使鑄一雙長劍 銘曰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 蓋慕李忠武之意也)”라고 했다. 현충사 장검과 완전히 구분하고 있다. <신정아주지>는 임헌회의 <묘갈명>보다는 박종경이 쌍룡검을 입수한 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저술된 것이다.

<신정아주지>를 기초로 쌍룡검의 주인공을 추측해 보면, 쌍룡검은 이순신의 칼이 아니라 이복연의 칼이 분명하다.

첫째는 이순신이 전사한 뒤 110년 뒤 정도인 1709년부터 이순신의 4대손 이홍의(李弘毅)에 의해 간행되기 시작한 <이충무공가승(忠武公家乘)>, 그로부터 약 90년 뒤인 1795년에 규장각에서 간행한 <이충무공전서> 모두 현충사 장검은 언급하고 있으나, 쌍룡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순신 사후 200년 동안 이순신의 쌍룡검은 등장하지 않았다. 존재했다면 누락시킬 이유도 없다.

박종경의 <돈암집> 중 원융검기(왼쪽), <신정아주지>(서울대 규장각·1819년경) 중 이복연 부분(오른쪽) / 연합뉴스

박종경의 <돈암집> 중 원융검기(왼쪽), <신정아주지>(서울대 규장각·1819년경) 중 이복연 부분(오른쪽) / 연합뉴스

둘째, 이순신 후손 이호빈의 <신정아주지>에서 처음으로 현충사 장검과 이복연이 제작한 쌍장검을 구분해 언급하고 있다. <원융검기>의 쌍룡검 검명과 같은 칼이 처음 등장했다. 특히 이호빈은 이순신의 후손이고 아산에 살았던 인물이다. 1827년 증광시에서 진사에 합격했는데, 그 합격자 명부인 <숭정기원후4정해경과증광사마방목(崇禎紀元後四丁亥慶科增廣司馬榜目)>에도 거주지가 아산으로 나온다. 때문에 <이충무공가승>과 <이충무공전서>에 실려 있지 않은 다양한 이야기까지 기록하고 있다.

후손의 책에 등장하는 쌍장검

이순신의 외가에 대한 정보도 구체적이다. 이순신의 외고조부인 현감 변자호(卞自浩)는 사직(司直) 이수인(李守仁)의 사위가 아산 백암촌에 정착했고, 이순신의 외증조부 변홍조(卞弘祖)는 첨사(僉使)였으며,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이순신의 외조부 현감 변수림(卞守琳)의 사위로 아산에 와서 살았다는 내용 같은 것이다. 또한 이호빈이 이순신의 후손 중에서 친척으로 아산 출신의 저명한 인물들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면 원융검기의 기록처럼 아산에 쌍룡검이 존재했다면, 이호빈이 쌍룡검에 대한 정보를 착각하거나 누락할 까닭도 없다. <신정아주지>는 그 이후에도 고종 때까지 내용이 줄거나 늘어나는 등의 다양한 판본이 존재하지만, 쌍룡검에 대해서는 모두 이복연의 칼로 보고 있다. 이순신의 칼이 아니다.

셋째, <신정아주지>에는 아산 출신 혹은 아산과 관계가 있는 인물들이 나온다. 그 중 이복연은 ‘전주 이씨’로 ‘덕수 이씨’인 이순신과는 본관이 다르나, 이순신 가문처럼 아산 사람이다. 이복연의 아버지 이단석(1625~1688), 할아버지 이제형(1605∼1663), 손자인 병마절도사 이응혁(李膺爀·李應爀), 병마절도사 이주혁(李周爀)도 아산 사람으로 나온다. 이복연은 이순신처럼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1726년 12월~1727년 12월)하기도 했다. 이복연이 ‘이(李)’씨라는 점, 아산 출신인 것, ‘통제사’를 역임했던 것을 고려하면, 쌍룡검을 이순신의 칼로 충분히 오인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 특히 이복연의 검명에 들어 있는 ‘산에 맹세하다(盟山)’와 ‘바다에 맹세하다(誓海)’는 글귀는 <이충무공전서>에 실려 있는 이순신의 시 “바다에 맹세하니 용과 물고기가 감동하고(誓海魚龍動), 산에 맹세하니 나무와 풀도 알아주는구나(盟山草木知)”와도 직접 연상이 되기 때문에 더욱 오해할 수 있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이순신 사후 200년 동안 간행된 <이충무공가승>·<이충무공전서>·<신정아주지>의 기록으로 보면, 이순신의 쌍룡검은 본래 없었고, 200년 뒤쯤 이복연이 이순신을 존경해 쌍장검을 제작했는데, 그것이 몇십 년 뒤에 심상규 등에 의해 오해되었고, 박종경에 의해 이순신의 칼로 완전히 굳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현재 그 두 자루의 칼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복연의 칼은 이순신의 기상을 닮고자 하는 마음이 담긴 것이기에 소중하다고 하겠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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