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잠이 부족한 당신, 수면에 빚지고 있다

2017.11.28

잠이 부족하면 부채가 되어 매일 조금씩 쌓여간다. ‘수면부채’ 상태로 살면 안전사고나 생산성 저하는 물론 건강에도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 OECD 평균 수면이 가장 짧은 대한민국의 수면 실태를 조명한다.

주야 2교대 생산직으로 일하고 있는 이진혁씨(43)는 최근 아찔한 일을 겪었다. 전날 오후 8시부터 밤새 12시간 동안 야간근무를 한 뒤 바로 운전대를 잡은 것이 화근이었다. 지인들의 결혼식이 몰린 날이라 오전 8시 퇴근 직후 공장이 있는 충남 아산에서 서울까지 운전을 했다. 고속도로에 오른 지 얼마나 됐을까, 이씨는 순간 눈은 뜨고 있지만 몸은 잠들어 움직이지 않는 경험을 했다. 실제로는 몇 초 되지 않는 시간이었고 천만다행으로 사고는 없었지만 크게 놀란 이씨는 갓길에 차를 세운 뒤 한참 동안 마음을 가다듬고서야 다시 출발할 수 있었다. 가장 가까운 휴게소에 들러 잠시 눈을 붙인 것은 당연했다.

수면에도 빚이 있다. 어떤 면에서는 1400조원에 육박하고 있는 국내 가계부채 액수만큼이나 심각한 문제다. 지난밤의 잠이 필요한 수면시간에 못 미친 만큼 부채가 되어 쌓인다. 수면부채란 장기간에 걸친 수면부족이 건강은 물론 일상생활의 여러 부분에서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수면의학계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개념이다. 단순한 수면부족과는 달리 이자가 쌓이는 부채처럼 차츰 누적되면서 서서히 신체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쓰이고 있다.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에서 평균 수면시간이 가장 짧다고 나온 한국은 이 수면부채 역시 막대한 나라다. 수면장애로 인한 직접적인 치료비용 외에도 안전사고나 생산성 저하, 그리고 장기적으로 나타나는 건강문제 등의 비용까지 더하면 만만하게 볼 수준이 아니다.

전날 밤 잠을 못 자고 운전한 이진혁씨가 고속도로에서 겪은 현상을 수면의학계에서는 ‘미세수면(microsleep)’이라고 부른다. 쉽게 말하면 깜빡 조는 것이지만 자신이 졸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심각한 경우도 있다. 수면이 부족한 피험자들을 대상으로 한 미국 스탠퍼드대의 실험에서 눈 바로 앞에 불빛을 번쩍였는데도 불빛이 점멸했다는 사실을 아예 깨닫지 못한 결과가 보고되면서 미세수면의 심각성은 더욱 주목받기 시작했다. 수면부채는 단기적으로는 미세수면처럼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는 결과를 부른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빚처럼 쌓여 더 큰 악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주의가 필요하다.

안대를 하고 똑바로 누워 잠을 자고 있는 모습. / 이준헌 기자

안대를 하고 똑바로 누워 잠을 자고 있는 모습. / 이준헌 기자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미세수면’

빚에는 이자가 붙는 것처럼 수면부채도 신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누적시킨다. 수면시간이 부족했거나 질 나쁜 잠을 잔 것이 하루이틀에 불과하다면 피로하긴 해도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장기간 동안 수면부채가 쌓이게 되면 신체는 갚지 못한 빚에 대한 독촉장을 보내기 시작한다. 눈 앞에서 플래시가 터지는데도 눈과 뇌 사이의 신경이 일시적으로 차단되어 시각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정도의 미세수면 현상은 일종의 차압딱지와도 같다. 매일의 수면으로 당장 급한 불은 끄고 있다 해도 차곡차곡 쌓이는 빚은 비만에서 시작해 고지혈증이나 당뇨병 같은 대사질환에 걸릴 위험성을 높인다. 또 혈압을 높여 심혈관계에 무리를 주는가 하면 치매 유병률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까지 나오고 있다.

“더 젊었을 땐 밤잠이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20대 때 술집이나 노래방처럼 밤에 일하는 곳에서 일하면서도 딱히 잠 때문에 힘들다고 느끼진 않았으니까. 근데 낮밤이 계속 바뀌는 이 생활은 생각보다 더 많이 힘들어요.” 이진혁씨는 한 주는 주간, 다음주는 야간에 일하는 식으로 주야 2교대 근무를 한다. 주간근무를 할 때는 그래도 낫지만, 야간근무인 주에는 잠을 설치기 일쑤다. 특히 토요일 야간근무를 마친 뒤 맞는 일요일이 가장 괴롭다. 일요일 아침 피곤한 몸으로 퇴근을 해도 바로 잠이 들면 안되기 때문이다. 바로 다음날인 월요일부터는 주간근무라 아침에 출근해야 하므로 일요일 낮부터 잠들면 정작 밤에는 잠들기가 어려워 뒤척이게 된다. 저녁에 잠들기 위해 낮 동안 졸음을 참으면서 자연히 수면부채는 쌓이게 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안전문제다. 미세수면이 즉각적인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졸음운전의 위험성은 일반 교통사고보다도 더 치명적이다. 최근 5년간 고속도로 졸음운전 사고는 총 2241건이 발생해 사상자는 1786명에 이르렀다. 경찰청과 한국도로공사의 통계에 따르면 고속도로 졸음운전 사고 치사율은 과속사고의 2.4배에 달한다. 수면부채를 낳는 근무환경은 곳곳에서 인명피해를 부를 수 있는 폭탄을 키우는 셈이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모의고사를 앞두고 책상에 엎드려 쪽잠을 자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서울의 한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모의고사를 앞두고 책상에 엎드려 쪽잠을 자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수면장애 환자들 매년 크게 늘어

운전 외의 직종에서도 수면부채의 위험성은 여실히 드러난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수면과 작업에 관한 연구리뷰’ 보고서를 보면 하루 10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과 수면부족이 결합될 경우 산업재해 발생 위험은 2배나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를 진행한 정경숙 동국대 일산병원 작업환경의학과 교수는 “수면장애가 있다고 나온 조사대상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심각한 행정과실을 범할 가능성이 1.43배, 졸음운전은 1.51배, 안전수칙 위반은 1.63배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며 “수면 박탈과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작업재해 위험의 증가가 막대한 사회적 손실을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수면부채는 이씨처럼 특수한 근무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개인에 따라 필요한 적정 수면시간은 차이가 있지만 누구든 각자에게 필요한 수면시간을 채우지 못하면 부족분만큼이 수면부채로 쌓이게 된다. 2016년 OECD 회원국들의 수면시간을 비교한 결과 한국인의 평균 수면시간은 OECD 평균 8시간22분보다 41분 짧은 7시간41분으로 조사대상국 중 가장 짧았다. 대상을 성인으로 좁히면 평균 수면시간은 더 짧아진다. 한국갤럽이 올해 7월 발표한 국내 성인 수면실태에 관한 조사 결과를 보면 평균 수면시간은 6시간24분에 불과했다. 조사방법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한국갤럽의 같은 조사에서 2013년 성인 평균 수면시간이 6시간53분으로 나왔던 점과 비교하면 한국인의 수면실태가 나아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러한 현실은 수면장애 때문에 병원을 찾는 환자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는 점으로도 입증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의료기관을 찾아 수면장애를 호소한 환자 수가 49만4000명을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2012년 35만8000명과 비교하면 약 38% 증가한 수치다. 같은 기간 수면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지출한 비용도 2012년 359억원에서 지난해 597억원으로 66% 증가했다. 가장 대표적인 수면장애 증상 중 하나인 불면증에 시달린 적이 있는 성인 인구만 해도 전체의 12%인 400만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긴 노동시간이 수면부족의 가장 큰 요인

더욱 심각한 것은 한창 성장기에 있는 청소년들도 필요한 만큼 잠을 자지 못한다는 점이다. 일생 동안 계속될 수면부채 누적이 청소년기부터 시작되는 셈이다. 지난해 서울시가 서울 거주 청소년들의 건강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작성해 발표한 ‘서울통계분석’을 보면 서울 청소년들의 수면시간은 하루 평균 6시간6분에 불과했다. 성인들보다도 짧게 자는 것이다. 5년 전의 조사에 비해서도 수면시간이 6분 줄어들었다. 그만큼 수면의 질과 만족도도 낮았다. 피로가 회복될 만큼 잠을 충분하게 잤다고 생각하는 청소년은 27.8%에 불과했다.

[표지이야기]잠이 부족한 당신, 수면에 빚지고 있다

중학교 3학년과 1학년인 두 자녀를 둔 학부모 김은정씨(41) 입장에서도 늦게 자는 자녀들이 골칫거리다. 두 자녀에게 주말에는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로 하는 게임을 허락한 뒤로 새벽까지 노느라 잠들지 않는 것이다. “자라고 노래를 불러도 이불 속에서까지 전화를 만지작거리는 애들이니 속이 터졌죠.” 그런데 첫째가 중3이 된 뒤 학교 시험기간을 앞두고 학원 특강에 보낸 뒤로는 김씨의 생각도 조금 달라졌다. 이전까지는 학원에 수강시키는 과목이 1~2개에 불과해 애들이 하루 종일 공부에 치인다는 생각을 안해 봤는데, 시험 대비 특강 기간에 자정이 가까워서야 녹초가 되어 들어오는 아이를 보면서 걱정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김씨는 “앞으로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 직장에 가면 놀 시간은 더 줄어들 텐데 지금이라도 놀게 놔둬야 하나 싶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렇다고 잠까지 미루면서 놀게 할 수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어 머릿속이 복잡하다”고 말했다.

문제는 수면이 부족하면 그만큼 깨어 있는 동안의 각성도 역시 영향을 받는다는 데 있다. 수면부채를 쌓게 만드는 사회적 요인들을 한두 가지로 축약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노동시간이 긴 한국의 직장환경은 수면부채를 조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배경으로 지목된다. 1인당 한 해 평균 노동시간이 2113시간에 달하는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멕시코(2246시간)에 이어 두 번째로 노동시간이 길다.

직장인 노모씨(34)의 경우를 보면 오랜 시간 동안 직장에서 머무르는 현실이 비효율적인 수면과 휴식으로 이어지고, 다시 업무에서의 비효율로도 이어지는 현실을 엿볼 수 있다. 노씨의 출근시간은 오전 9시로 정해져 있지만 퇴근시간은 일정치 않다. 오후 6시 정시퇴근을 할 수 있는 날도 없진 않지만 상사의 퇴근시간을 눈치봐야 하는 문화가 강해 막상 급한 일은 없어도 오후 9~10시까지 남게 된다. “퇴근이 늦다고 해서 꼭 자는 시간이 늦어져야 하는 게 아닌 건 알지만, 그래도 늦게 퇴근하면 ‘내 시간’이 없이 하루를 보냈다는 게 아쉽거든요.”

노씨와 노씨의 부인이 퇴근 후 집에서 즐기는 여가는 드라마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등 막상 본인들도 꼭 필요하다고 여기지는 않는 활동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자신만의 시간을 즐기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면 하루를 날린 것 같은 아쉬움을 부부가 공통적으로 느낀다. 부부는 ‘내일 또 피곤하겠군’이란 걱정과 함께 오전 2시를 넘겨서야 잠자리에 든다. 걱정은 그대로 직장에서 현실이 된다. 졸음을 쫓느라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왔다갔다 하는 동안 시간은 또 그만큼 흘러간다. 막상 ‘칼퇴근’이 가능한 날이 와도 쉽게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저녁이 없는 삶’을 만든 직장의 환경이 어느샌가 저녁의 여가를 심야로 미루도록 만든 셈이다. 여기에 직무능력이 떨어질수록 불면증에 걸릴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까지 고려하면 수면부채와 업무 사이의 악순환은 더욱 심각해진다.

서울 필동 남산골한옥마을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인근 직장인들이 한옥집 대청마루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 / 정지윤 기자

서울 필동 남산골한옥마을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인근 직장인들이 한옥집 대청마루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 / 정지윤 기자

직장 내 인간관계에 악영향 미쳐

이렇게 잠을 빚낸 만큼 그 시간을 직장에서 보낸다. 그리고 그만큼 부족한 여가시간도 잠을 줄여 충당한다. 이런 환경에서 한때 열풍이 불었던 ‘아침형 인간’ 식의 자기계발은 현실성을 잃어버렸다. 2003년 국내에 소개된 동명의 책에서 제시한 기상시간은 오전 5시였다. ‘인생을 두 배로 산다’는 점을 강조하듯 기상시간을 앞당겨 업무와 자기계발에 활용하면 더 높은 성과를 이룰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단시간 수면’을 요구한 셈인데 이에 대해 수면의학 전문가들은 부정적이다. 미국 스탠퍼드대 수면생체리듬연구소의 니시노 세이지 소장은 “‘단시간 수면은 유전’이라는 연구 결과가 이미 2009년 <사이언스>지에 발표된 바 있는데, 유전적으로 단시간 수면자가 아니어서 계속되는 단시간 수면이 힘든 사람에겐 수면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수면시간을 줄여서 성과를 높이자는 식의 문화가 위험한 이유는 이 반(反)수면문화의 폐해가 단순히 건강이나 안전문제로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면이 부족한 만큼 각성도 부족해지는데, 이 과정에서 생산성 저하를 낳는 요인들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수면부채가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훨씬 더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는 것이다. 임창희 홍익대 경영학과 교수는 ‘수면부족이 직장 무례함과 반생산적 행동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에서 수면부족이 자신을 통제하는 능력을 잃게 만들어 직장 내 무례함이나 반사회적 행동 등의 부정적 결과를 낳는다고 분석했다. 특히 수면부채를 쌓기 쉬운 야간·교대근무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주간근무 사무직 노동자들에게도 수면부채는 직장 내 인간관계 등의 요인에 다양한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다.

잠을 줄여서라도 성과에 집착하는 조직문화가 문제라고 지적하는 임 교수는 “12세 미만에 겪은 수면문제가 5년 후 근심과 조바심, 우울성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연구 결과와 7시간 이하 수면을 취한 사람은 정서적 건강이 약해진다는 연구 결과들이 제시된 바 있다”며 눈에 보이지 않는 조직문화와 구성원들 상호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비록 야간근무나 교대근무가 아니더라도, 창의력과 집중력이 필요한 연구직종이나 아이디어 개발 산업분야에서도 수면부족의 악영향은 피로 증가와 창의력 하락으로 이어짐을 감안해 대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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