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게시판 댓글에서 특정 지역 비하 발언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청소년들이 많이 이용하는 게임 중계에서도 지역 비하 논란이 최근 일어나고 있다. 특정 지역을 비하하는 닉네임을 사용하거나 이런 내용의 글을 채팅창에 올리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월 15일 케이블의 게임 전문 채널 온게임넷에서 ‘북괴멀티전라도’가 자막으로 방송됐다. 이 자막은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게임 중계에서 유저의 닉네임이었다. 사건은 네오플이 제작하고 넥슨이 배급하는 AOS (Aeon Of Strife) 액션 게임인 ‘던파&사이퍼즈’ 대회(총상금 2억 5000만 원) 중계 중 일어났다. ‘던전앤파이터 개인전’, ‘던전앤파이터 대장전’, ‘사이퍼즈’ 세 종목의 게임에 각각 8팀이 출전해 우승을 가리는 이 대회에서 ‘사이퍼즈’ 게임을 시작하기 전 검마노팀 정모 선수의 닉네임인 ‘북괴멀티전라도’가 자막으로 화면에 나온 것이다. 대회 시작 전 게임 회사인 넥슨은 선수에게 닉네임 변경권을 지급했고 정 선수는 ‘o정00o’으로 변경했으나 변경 전의 닉네임이 그대로 송출됐다.

지역 비하 용어를 닉네임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종종 있어 왔다. 게임 던파&사이퍼즈 이용자 중에도 지역 비하성 닉네임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다. 전직 대통령 이름을 넣은‘지옥의000’, ‘광주폭도’, ‘독재왕000’ 같은 닉네임들이 대표적이다.

넥슨의 사이퍼즈뿐 아니라 러시아의 워게이밍넷이 제작한 ‘월드 오브 탱크’의 한국 서버에서도 이런 종류의 닉네임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월드 오브 탱크는 193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의 역사적 전투 차량을 주제로 하는 PvP(플레이어 대 플레이어) 중심의 팀 기반 멀티플레이어 온라인 탱크 전투 게임이다. 이 게임에서는 전직 대통령의 이름을 넣은 ‘000의계엄탱크’, ‘폭도진압전땅크’, ‘독재자000’와 같은 용어가 닉네임으로 사용되고 있다.

출전선수 닉네임이 ‘북괴멀티전라도’
사이퍼즈 홈페이지에는 불건전한 닉네임을 사용하는 이용자는 로그인을 정지시킨다는 제재 조항이 명시돼 있다. 또 ‘월드 오브 탱크’는 나치즘, 역사·지역·정치·사회적 이슈로 말썽을 일으키면 이용을 제한한다. 고객지원팀에게 위배 사실이 확인되면 회사의 합리적인 재량에 따라 가중 제재를 받는다. 다른 게임도 이 같은 규정이 있지만 음란한 의미의 닉네임이 아니면 제재가 실제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리그오브레전드’(lol) 게임을 주로 하는 전현준(24, 서강대학교 경제학과)씨는 “게임 도중에 ‘홍어 냄새난다’, ‘전라도 빨갱이’, ‘수꼴 TK벌레’와 같은 기분 나쁜 지역 비하글을 볼 때가 많다”고 말했다. 같은 게임을 하는 조성훈(23, 직장인)씨도 상대방이 이기고 있으면 ‘광주 폭도를 진압했다’ 와 ‘내가 계엄군이다’와 비슷한 글들을 자주 본다고 말했다.

게임전문채널인 온게임넷은 이 전에도 스타리그 중계 중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고 이호성 씨를 비하하는 플래카드와 게임 프로그램 진행 중 진보 진영을 비하하는 용어를 그대로 방송해 논란을 일으켰다. ‘월드 오브 워 크래프트’(약칭 와우)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에서 전직 대통령 이름을 사용해 ‘탱크보이000’의 “너 000 XXX 해봐”라고 하는 자막을 모자이크 처리 없이 방송하기도 했다.

지역 비하성 자막이 화면에 나타나고 있는 현상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간 우리 사회에서 벌어졌던 숱한 이념적, 지역적 대립의 결과물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최태섭 문화평론가는 “게임은 10대, 20대의 생활에 핵심적인 부분이며 유행의 통로 역할을 한다”면서 “게임상에서 사용하는 이런 용어는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쓴다기보다는 일종의 유행어”라고 말했다. 최 평론가는 “용어를 쓰는 그 자체보다는 쓰게 되는 과정들이 위험하다”면서 “문제는 용어가 가진 심각성이 일상에서 중요시되지 않는 점”이라고 말했다.

유명 게임 커뮤니티 사이트인 Pgr21닷컴에서 아이디가 swordfish라는 이용자는 “지역 비하가 결국 사회적 분열을 가져오고 지역 차별을 낳을 수 있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방송사가 이런 용어를 송출하는 것을 가벼운 문제로 치부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같은 사이트의 이용자인 강승택(31)씨는 “이번에 문제 된 리그는 전문 게임단이나 ‘프로게이머’가 참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방송사가 미리 이들에게 충분히 알렸어야 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방송사 측의 잘못을 지적한 것이다.

온게임넷은 홈페이지 공지를 통해 “지난 15일 특정 지역 비하 자막이 화면에 나간 것에 대한 시청자의 항의를 공감한다”면서 “내부 징계위원회를 열어 해당 프로그램을 연출한 PD에게 ‘연출 정지’ 중징계를 내렸다”고 밝혔다.
강씨는 “시청거부 운동과 항의 외에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는 추후 게시판을 통해 의견을 모아봐야 알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직접 방송·통신 심의위원회(방심위)에 민원을 넣었다”고 말했다.

상지대학교 언론광고학부 박용규 교수(51)는 “방심위가 적극 나서서 지역갈등을 조장할 수 있는 자막의 송출에 대해 일정한 규제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가능한한 규제를 안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도 “일부 유료 방송 채널에서 지속해서 지역 비하글이 화면에 나오는 것은 규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게임 방송을 시청하는 세대는 대개 10대와 20대”라면서 “이들 세대의 의식에 악영향을 끼치는 지역 비하 문구가 버젓이 노출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해당 방송사, 연출PD 중징계 내려
방심위가 정한 방송심의 규정을 살펴보면 제4절 29조 (방송은 지역, 성(性), 세대, 계층, 인종, 종교 간 차별과 갈등을 조장하여서는 아니된다.)와 제8절 51조(3항 방송은 바른 언어생활을 해치는 억양, 어조 및 비속어, 은어, 유행어, 조어, 반말 등을 사용하여서는 아니된다.)에 제재 근거가 있다. 사안마다 다르지만, 민원이 제기되거나 모니터링을 하고 문제가 있는 부분은 심의위원회 회의에 올리면 위원들이 판단한다. 방심위 방송심의국 유료방송심의 2팀 장경식 팀장은 “온게임넷에서 특정 지역을 비하한 자막을 송출한 것은 방심위 특별위원회의 자문을 받아 소위원회 회의에서 현재 제재 논의가 진행 중”이며 “2월 둘째 주에 소위원회에서 결정이 난다”고 말했다. 소위원회에서 법적 제재를 결정하게 되면 사건 당사자의 의견 진술을 받아 결정을 한 주 더 미룬다. 장 팀장은 “2월 넷째 주 목요일에 전체회의에서 최종 결정이 날 것”이라고 말했다.

지역 비하 닉네임·아이디를 사용하는 것을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마치 욕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주장이다. 표현의 자유를 어느 선까지 용인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많다. 숙명여대 법학부 홍성수 교수는 “표현의 자유라고 해서 무한정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표현에도 넘어서는 안 될 한계가 있다”면서 “국가, 권력에 대한 표현의 자유는 허용돼야 한다고 보지만 소수, 특정지역에 대한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차별은 제한돼야 한다”고 말했다. 방송에 특정 지역 비하 자막이 송출된 것에 대해 홍교수는 “선수는 그저 닉네임을 만든 수준이기 때문에 처벌을 논하기는 다소 무리이지만 이 사건을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신중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준강 인턴기자 orionnada@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