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당시 관계자 증언 엇갈려, “더 많이 죽었다” vs “감히 조작했겠느냐”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 1일 착공해 1970년 7월 7일 준공식을 가졌다. 당시 국가예산(1500억원)의 3분의 1(429억원)에 맞먹는 비용이 투입될 정도로 국가적 역량이 총동원된 대공사였다. 그러나 공사에 필요한 인프라는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당시 한국인에게는 고속도로라는 말조차 낯설었다. 공사에 참여한 16개 민간건설업체 가운데 고속도로 건설 경험이 있는 업체는 1곳뿐이었다. 공사 기간도 규모에 비하면 초단기간이었다. 완공일은 애초 1971년 6월 30일로 잡혀 있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도중에 1년이나 앞당겨졌다. 고속도로 건설에 필요한 노하우가 전무한 상황에서 속도전으로 진행된 공사였다. 사고가 빈발할 수밖에 없었다.
“일용직 잡부는 대상에서 빠졌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과정에서 사망한 이는 몇 명이나 될까. 77명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과정을 다룬 기록들은 예외없이 사망자를 77명으로 잡는다. 77명은 금강 어귀에 자리잡고 있는 순직자 위령탑에 이름이 새겨진 사망자들이다. 위령탑을 관리해 온 한국도로공사가 1980년에 펴낸 <땀과 눈물의 대서사시: 고속도로 건설 비화>를 보자. 책은 “2년 5개월 동안 890만명의 인원이 동원되어 이룩한 사업이었고 보니 생명을 잃은 이가 77인이었다는 것(11만5000명 중 1명 꼴)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국가기록물을 관리하는 국가기록원은 어떨까. 국가기록원 간행물인 <기록인> 2009년 여름호에 실린 ‘경부고속도로 건설, 기록과 기억과 만나다’라는 제목의 글도 사망자를 77명으로 보고 있다.
77이라는 숫자는 시대를 뛰어넘어 면면하다. 1970년 7월 6일 경향신문 기사와 이튿날 동아일보 사설은 사망자가 77명이라고 적고 있고, 2000년 이전의 기존 사료를 정리해 대중적인 눈높이로 집필한 강준만 전북대 교수의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1권>(2002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당시 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망자 숫자에 대한 견해가 엇갈린다. 현역 대위로 공사에 참여한 이성규씨(69)는 세 차례 통화에서 “실제 사망자는 77명이 훨씬 넘는다”고 거듭 말했다. “숱하게 죽었다. 한 구간이 약 10㎞이다. 하루에 1000명 넘게 투입됐다. 지금은 제대로 된 장비가 있지만 그때는 거의 다 사람 손으로 했다. 그렇게 2년5개월을 했다. 사망자는 770명일 수도 있고 890명일 수도 있다.”
“왜 77명인가. 7월 7일(준공식 일자)에 맞춘 것이다.” 이씨의 주장이다. 그는 또 “사망자들을 엄선해 77명만 위령탑 명단에 넣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고속도로 건설사무소에 파견된 육군 및 건설부 출신 공사 감독관들의 모임인 ‘77회’ 총무를 1997년 2월부터 맡고 있다. 군인과 건설부 공무원이 파견된 것은 당시 민간업체 인력만으로는 공사에 필요한 현장 감독관 수요를 충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씨는 1968년부터 1970년 공사가 끝날 때까지 3개 구간에서 일했다.
실제로 발생한 사망자 가운데 일부를 선별해 순직자로 등록했다면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이 총무에 따르면 “공사 현장에서 업무 시간에 사고로 사망한 사람들과 현장 사고는 아니지만 공무 중 사망한 사람들이 우선이었다. 일용직 잡부들은 대상에서 빠졌다.” 그는 “우리 구간에서 일한 사람이 많이 빠졌다”고 전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다. 40년 전 일이어서 기억이 흐릿하다고 했다.
“연고 미확인 사람들 빠졌을 것”
같은 모임의 방동식 회장(79)은 사망자를 77명으로 추렸다는 주장에 대해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이다. “현장에서 올라온 보고대로 처리했을 뿐 위에서 조정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실제 사망자가 77명이 맞는지를 따지는 건 고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면서 “모두가 밤을 낮처럼 생각하면서 헌신했다”고 강조했다. 사망자 숫자를 따지는 것보다는 경부고속도로가 많은 사람의 땀과 노력으로 완성됐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방 회장은 1967년 11월부터 1968년 1월까지 ‘청와대 파견단’의 일원으로 일했다. 청와대 파견단은 박 대통령이 고속도로 구상을 위한 사전조사를 위해 육군과 건설부에서 차출한 인력으로 구성된 4인 태스크포스다. 육군본부 공병감실 소속 윤영호 대령, 박찬표 중령, 방동식 소령, 박종생 건설부 토목기좌(사무관)가 그들이다.
순직자 위령탑의 설계와 시공을 맡은 김성남씨(75)는 이성규 총무와 같은 입장이다. 건설부 토목기좌였던 김씨는 최대 난공사 구간인 당재터널 구간을 포함해 2개 구간에서 일했다. 김씨는 “개통일이 7월 7일이니 77명으로 하자는 얘기가 윗선에서 나왔다고 들었다. 공사 현장에서 사고로 사망한 사람, 관련 업무를 수행하다 사망한 사람, 특정 기간 이상 일한 사람, 일용직으로 하루이틀 일하다 운 나쁘게 사망한 사람 등 순서로 기여도를 매긴 다음 77명을 선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정 요건을 충족한 경우라도 연고가 확인되지 않은 사람들은 빠졌을 것”이라면서 “당시에는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일하고 싶으면 인적 사항이 분명하지 않아도 일을 시켰다”고 덧붙였다.
<땀과 눈물의 대서사시>에는 “… 공사판의 근로자들 중에는 가족이나 연고자의 소재가 분명치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런 이들은 명부상에 기록된 연고자의 인적사항이나 소재 등이 엉터리일 경우가 없지 않아서 가끔 연고자를 찾지 못해 애를 먹기도 하는데…”라는 증언이 나온다. 이 증언을 한 사람은 ‘당재의 심완식’이라고 불린 당시 육군 대위 심완식씨(72)다.
그는 당재터널 공사에서 보여 준 돌파력으로 박 대통령으로부터 당시 영관급에게만 수여한 4등 보국훈장을 받았다. 심씨는 전화통화에서 “사망자 숫자를 7월 7일 개통식에 맞춘 것은 아닐 것”이라면서 “피와 땀으로 만든 고속도로인데 누가 감히 숫자를 조작해 77로 만들었겠느냐”고 말했다.
심씨의 말에 따르면 정확한 통계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그의 전언이다.
“당시 통계는 현장 일지를 바탕으로 했을 텐데 요즘처럼 일목요연한 자료를 만들지도 않았고, 40년 전 일을 두고 77명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도 무의미하다. 그냥 믿는 수밖에 없다. 내가 맡고 있던 구간에 소공구가 여러 곳 있었다. 각 소공구에서 올린 보고를 다시 위로 보냈다. 숫자가 정확한지 따질 여유도 없었다. 하루 3교대로 잠 잘 시간도 없이 바쁘게 일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처음으로 건설하는 428㎞의 고속도로를 2년5개월만에 끝낼 수 있었겠는가. 요즘 사람들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속도였다.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정확한 사망자가 몇 명인지 따지는 건 살수대첩에서 사망한 수나라 병사가 몇 명인지 확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땀과 눈물의 대서사시>에 따르면 “70년 6월초 현장 시찰 때 위령탑에 이름을 명기할 순직자 명단을 작성 보고토록 지시”한 사람은 이한림 당시 건설부 장관이다. 이 전 장관은 현재 노환으로 투병 중이다. 한국도로공사는 “워낙 오래 전의 일이어서 지금 우리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밝혔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