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법의 탈을 쓰고 ‘진화’하는 조직… 기업사냥꾼에서 주가조작까지 영역 확장

시대변화에 따라 조폭도 진화한다. 1980년대 향락문화·유흥업소의 증가와 함께 늘어났던 조폭은 최근에는 규모나 활동면에서는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물론 경찰·검찰 등의 노력도 있겠으나 사실은 이들이 겉으로 보기엔 합법적 사업가로 변신했기 때문에 노출도 안 되고 철저한 위장으로 검거·기소 등이 어렵기 때문이란 것이 일선 경찰이나 연구원들의 분석이다.

폭력조직의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폭력조직은 업소나 상인들을 상대로 폭력을 휘둘러 보호비를 갈취하다가 장사밑천을 모으면 도박, 고리대금업, 성매매, 마약밀매 등 폭력과 무관한 불법영업에 손을 대는 기생자단계로 발전(?)한다. 이를 통해 축적된 자금을 건설업 부동산업 금융업 등과 같은 합법적인 영역에 투자해 사업기반을 더욱 건실하게(?) 다져 능력있는 사업가로 변신하는 공생자단계로 진화한다.

겉모양은 진화했지만 이들의 최종목적은 여전히 돈을 갈취하는 것이다. 사업가 위장형 조직폭력배가 개입된 사건유형 중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권갈취사건과 사기사건의 유형을 살펴보면 기업이나 영업권 운영권 갈취가 39·1%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재건축 사업권 갈취, 건축사업권 갈취 순이었다. 겉으로는 지역개발사업, 건축업, 상가분양 등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사업으로 위장해 성장하고 있으나 최종목적인 돈을 벌기 위해서는 다시 고전적인 형태의 갈취로 되돌아간다. 즉 활동영역은 다양해졌지만 활동방법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증거확보 어려워 처벌 쉽지 않아

그러나 이런 사업가 위장형 조폭들 때문에 수사 및 기소가 더 어려워졌다. 종전의 폭력조직범죄 피해자가 노점상 등 영세업자, 오락실이나 유흥업소 주인 등으로 정형화되었던 것에서 벗어나 사기사건은 그 피해자가 은행과 같은 기업체들, 고용주, 상품 및 용역공급업자, 보험 및 금융회사, 건물 소유주 등등으로 매우 다양하고 피해규모도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이런 조폭특유의 기망술(불법적 신용창출, 위조, 변조, 중요사실의 은닉과 과장, 허위적 중개능력 창출)을 사용한 사기사건은 성격상 신체적 폭행이 드러나지 않아 은밀하고, 그 결과도 즉각적이지 않고 기업·경제제도 등의 조직구조 등에 깊이 관계를 맺고 있어 재빨리 기소를 하거나 충분한 증거 자료를 확보하려면 복잡한 조사가 필요하다. 또 이들에게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 역시 자발적으로 고소하는 경우가 드물어 성공적인 기소나 처벌이 어려운 상태다.

자금을 축적한 조직폭력배들이 진출한 새로운 활동영역 중 하나가 기업이다. 최근 IT산업 부문의 거품이 꺼지고 지속적인 경제적 불황으로 인해 경영난이 심화되자 M&A 시장이나 사채시장에 내몰리는 기업들이 늘어났다. 조폭들은 이 과정에 개입해 기업사냥꾼으로 활동하며 손쉬운 방법으로 돈을 번다.

M&A 시장이나 사채 시장에서 투자자나 사업가로 변신, 회사의 합병인수자금을 필요로 하는 기업사냥꾼에게 주식이나 유가증권을 담보로 잡고 고리로 자금을 빌려주고 이를 회수하는 과정에 기업사냥꾼과 공모해 회사자금을 빼돌리거나 이들의 약점을 잡고 금품을 갈취함으로써 기업부실화를 심화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또다른 형태로 자금난을 겪는 기업에 고리로 사채를 대여한 후, 이를 변제하지 못하면 고리이자를 원금에 합산, 사업권을 갈취한 사례는 ㅇㅇ건설회사의 사건을 들 수 있다. 군산 ㅇㅇㅇ파 수괴급 자금책 여모씨, 두목 김모씨, 부두목 방모씨, 김모씨 등은 인천에서 오피스텔 시행사업을 하고 있던 전 프로야구선수 출신의 피해자 이모씨에게 원금 5억 원을 빌려주며 이자 3억 원을 합쳐 총 8억 원을 받기로 했다. 그러나 이를 제때 갚지 못하자 조직폭력배들을 동원해 협박 등으로 법인 인감증명서를 갈취해 건축주 명의를 변경해 간 다음 5억 원을 변제하는 조건으로 3억 원을 더 빌려 쓰도록 강요하고 변제기일을 어겼다는 이유로 차용증을 쓸 것과 공사도급을 줄 것을 강요했다. 결국 견디다 못한 피해자 이씨로부터 오피스텔에 대한 건축주로서의 모든 권한을 포기하겠다는 포기각서를 받아 오피스텔 20개 동 전체에 대한 사업권을 위임 형식으로 갈취한 사건이다. 2001년 당시 오피스텔 1동의 평균감정 가는 7억8000만 원으로 토지대금 등을 공제하면 약 112억 원을 갈취한 것이다.

사업가로 변신(?)했지만 조폭들의 관심은 사업 확장이나 기업운영이 아니다. 이들은 기업 대표이사 등의 위치를 이용해 기업자금을 횡령해 개인재산을 축적하고 기업부실화를 초래해 근로자, 채권자들에게 막대한 손해를 입힌다.

서방파 부두목 출신인 이모씨의 (주)드림랜드 자금횡령·배임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씨는 주변인들에게 돈을 빌려 (주)드림랜드 경영자 이모 사장에게 회사어음 10억 원을 할인해주고 회사에 대한 가수금을 변제해 주는 조건으로 회사를 인수하기로 해서 1인 대주주가 되었다. 회사 인수 후 이모씨는 추징금 강제집행 등을 피할 목적으로 대주주 및 임원으로 일절 등록하지 않고 여러 개의 차명계좌를 이용해 매달 회사 자금 수십 억 원을 직접 관리하며 사채업을 했고 회사 주요사업인 건설업은 수백 억 원 상당의 관급공사를 수주, 다른 회사에 일괄도급을 주는 방식으로 운영했다. 이씨는 또 부대사업인 치악산 드림랜드 놀이시설에는 재투자를 하지 않아 경영을 악화시켜 놓고도 횡령·배임 등의 방법으로 100여억 원의 회사자금을 빼돌렸다. 경영이 부실해지자 어음을 60억 원 상당 발행하고는 결국 부도를 내서 이 회사 채권자 230여 명이 130억 원의 손해를 입게 만들었다.

권력기관 동원 전방위 로비까지

점점 더 자금력이 강화되고 네트워킹도 활발해진 조폭들은 사업 또한 선진화·지능화한다. 주가조작에도 개입하고, 부동산 재개발 사업에도 진출하며 사건이 터질 경우에는 로비스트를 비롯, 각종 권력기관을 동원해 전방위 로비를 펼친다.

2002년에 일어났던 (주)한빛네트 주가조작은 꽤 유명한 사건. 양은이파 부두목 출신의 강모씨는 건설회사 회장으로 있으면서 유명 애널리스트를 동원해 조직적으로 주가를 조작했다. 무자본으로 (주)한빛네트를 인수하기로 마음먹은 기업사냥꾼 우모씨는 이 회사의 주가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린 다음 유상증자를 통해 납입된 자금이나 가장납입으로 늘어난 주식을 매각해 인수대금으로 사용하기 위해 시세조종을 주도했다. 경제방송 증권프로그램에 고정출연하는 유명 애널리스트 윤모씨는 우씨의 제의로 시세조종에 사용될 자금과 운용계좌를 모집했다. 이 과정에 양은이파 부두목 출신의 강모씨는 자신의 명의 계좌 등 3개 계좌와 시세조종자금 4억8000만 원을 위탁했고 42개 증권계좌를 이용해 (주)한빛네트 주가를 상승시키기로 공모해 7억 원이 넘는 시세차익을 얻었다. 그러나 자금부족으로 매수주문을 못해 상한가까지 올라갔던 주가가 폭락, 투자금이 손실을 보게 되자 관련된 우씨, 윤씨 등을 협박, 폭행해 강제로 공정증서를 작성하고 2억7500만 원을 갈취했다.

최근 들어 조폭들이 가장 많이 진출하는 분야는 부동산 개발 및 건설분야이다. 공시입찰, 건설자제공급, 아파트 건설 및 분양관련 분야, 상가 및 쇼핑몰 개발 분야 등에 진출해 뇌물이나 갈취 등의 방법으로 이권을 확보하며 거금을 벌어들이고 있다.

권력자들과 공생관계로 발전도

명동지역 신상사파 조직원 출신, 신상사파 부두목 출신, 양은이파 부두목 출신, 방계계열인 차상진파 폭력배 등이 총동원된 화려한 멤버들이 천호동 N쇼핑몰 개발 사업권을 확보한 다음, 사업추진 과정에 한빛은행, (주)한국토지신탁 직원, 구청 및 경찰공무원 들에게 전방위 로비를 하며 거액의 금품을 제공한 사건도 있었다. 이들은 협박과 폭력이란 고전적인 조폭의 행태에서 벗어나 사업권 획득 이후에는 거래 상대방을 금품으로 매수하는 방법으로 이권을 확보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원로 조폭들이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도 배후에서 각종 이권사업에 개입하거나 조폭들간의 갈등조정 및 정·관계 로비를 구실로 거액의 금품을 챙기는 등 여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조폭들은 이렇게 진화하며 다양한 활동 영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한편으로 일반인은 물론 권력자들이 피해를 보면서도 이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거나 오히려 자기 이익을 위해 활용하는 경우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연구원들의 조사 자료에 따르면 학력, 직업, 가구소득별로 분석한 결과 4년제 대학과 대학원 졸업의 고학력자들 중에서 `‘가깝게 지내는 이들 중에 조직폭력배가 있다’는 응답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직업별로 보면 생산직에 종사하는 응답자 중에서 `‘민형사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조직폭력배를 이용했다’는 답이 가장 높게 나왔다.

이렇게 조폭에 대한 수요(?)는 높은 반면, 조폭을 검거하거나 기소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조폭들의 활동 자체가 은밀한 데다 심증이 가도 조직의 우두머리를 검거해 유죄를 입증하기는 쉽지 않다. 두목을 검거해 처형하면 또다른 2인자가 새 두목이 되고 새 두목을 검거하면 그 다음 강자가 조직을 장악하고 교도소 등에서 격리시켜도 석방되면 거의 전원이 조직원으로 복귀한다.

또 조폭들이 독점공급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것으로 알려진 각종 불법서비스나 이권의 경우 그 성질상 압류 대상이 아니고 공직자 매수 등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압류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조폭 연구자들은 “범죄조직의 운영자금이나 판매수익을 철저히 박탈하면 범죄동기가 약화되고 조직의 존립기반이 순식간에 무너질 개연성이 높으므로 불법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자금을 한푼도 남김없이 몰수해 버리면 아무리 막강한 조직도 지탱할 기력을 상실할 것”이라고 제언한다. 조폭이 이념이나 의리로 뭉친 조직이 아니라 오로지 돈이 목적이고 동기이기 때문에 돈을 묶는 것이 가장 확실한 제거방법이란 것이다.

<유인경 편집위원 alic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