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총련 출신 뮤지컬 배우 김승락 “우리 민족 위한 일에 최선 다할 것”

지난 10월 25일. 국내 최초의 뮤지컬전용극장으로 개관한 서울 잠실 샤롯데극장은 뮤지컬 ‘라이온 킹’ 프리뷰(개막 또는 개봉 전 관계자들을 초청해 미리 보게 하는 일) 공연으로 밤새 불을 밝혔다. 수많은 출연 배우는 형형색색의 200여 종 동·식물로 분해 무대를 종횡무진하며 어린 사자, ‘심바’의 성장담을 환상적으로 표현했다. 관객은 갈채로서 배우에게 화답했다.

몇 차례에 걸친 커튼콜. 출연배우라면 누구나 즐거워할 일이지만 이날 누구보다 가슴 벅차한 배우가 있다. ‘스카’를 열연한 김승락씨다. ‘스카’는 정글의 왕인 형 ‘무파사’를 살해하고 조카 ‘심바’를 내쫓은 후 왕의 자리에 오르는 악당이다. 악한 특유의 카리스마를 김씨는 빼어난 연기와 가창력으로 소화했다.

김승락씨의 감회가 남다른 것은 이번 공연이 아버지의 땅에서 이룬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재일교포 2세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북한 국적을 가졌다. 한국 국적으로 바꾼 것은 석 달 전. 한국 땅에 발을 디딘 것도 지난 6월 초 한국에서 열린 ‘라이온 킹’ 제작발표회 때가 처음이다.

“경북 봉화군 출신인 아버지는 일본 이바리키 현에서 조총련 활동을 하셨어요. 생전엔 입버릇처럼 ‘통일되기 전까진 고향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셨죠. 또 아버지보다 더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셨던 어머니는 일본사람인데도 이름과 국적을 조선으로 바꾸셨어요. 집안에 걸린 커다란 한반도 지도 앞에서 세 살 무렵의 저는 민요 ‘아리랑’을 부르곤 했는데 그때 기뻐하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요.”

재일교포 설움 딛고 아버지 나라에

일본 사회에서 재일교포의 삶은 고단하다. 차별도 심하다. 좋은 학벌과 탁월한 실력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어린 시절부터 노래에 재능을 보여 가수의 꿈을 키운 김씨 역시 이러한 일본 사회의 높은 장벽을 피하지 못했다. 우리로 치면 고등학생인 열여섯 살 때, 이로 인해 한 차례 쓰린 경험을 했다. 당시 일본의 한 방송사가 주최한 오디션에서 재일교포라는 이유로 탈락한 것이다.

“누나가 김승락 대신 일본 이름으로 제 지원서를 제출했어요. 3차까지 합격했지만 마지막 TV 출연 관문에서 꿈을 접어야 했어요. 제가 조선사람이고 조선학교에 다닌다고 밝히자 더 이상 오지 말라고 했거든요. 그들은 차라리 한국에서 건너온 연예인이면 주목을 끌 수 있지만 일본에 사는 재일교포는 기용할 수 없다고 했어요. 그 일을 겪으며 전 많은 생각을 했어요.”

이런 현실 탓에 적잖은 재일교포가 일본으로 귀화했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연예인의 70%가 한국계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그가 북한땅을 밟은 것은 열네 살 때의 일이다. 학생소년예술단에 선발돼 김일성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해는 그와 열여섯 살 터울이 지는 데다 일찍이 북한의 귀송사업으로 북송, 서로 얼굴도 몰랐던 큰 형을 원산항에서 처음 만난 뜻깊은 해이기도 하다. 지금 형은 이 세상을 떴지만 조카는 여전히 북에 살고 있다.

“형의 얼굴을 본 순간, 눈물이 솟구쳤어요. 아마도 그건 열여섯 살밖에 안 된 장남을 홀로 북한에 떠나 보내야 했던 부모님의 심정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김씨가 본격적으로 전문 예술인으로 활동한 것은 고교 졸업 후 ‘금강산가극단’에 들어가면서부터. 이후 13년 간 일본 전역은 물론 북한과 중국을 넘나들며 활약했다.

당시만 해도 그는 북한 주민 사이에서 유명인사였다. ‘말도 하나 노래도 하나 핏줄도 하나 조국에 바친 마음 하나이련만, 어이하여 내 조국이 둘로 있을까…’로 시작하는 노래 ‘희망의 길’을 부르는 그의 모습이 해마다 북한의 TV를 통해 방송됐기 때문이다. ‘까투리타령’도 자주 불러 ‘까투리’라는 애칭이 붙기도 했다.

그런 그는 10년 전 중대한 결심을 했다. 금강산가극단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 갈등을 겪는 와중, 북한에 있는 후배의 조언이 힘이 됐다.

금강산가극단 ‘까투리’로 산 13년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북한 상황이 안타까웠어요. 또 통일을 외치면서도 제가 하고 있는 일이 과연 통일을 위한 것인가 하는 회의가 들었죠. 후배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우리는 이곳을 떠나지 못하지만 형님는 그렇지 않잖아요. 기회가 있고 도전할 마당이 있으면 시도해 보세요’라고. 그렇게 금강산가극단을 떠났고, 그로부터 6개월 후인 1996년 극단 ‘시키’와 인연을 맺게 된 거예요.”

일본 최대 극단인 ‘시키(四季)’는 결코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배우가 기량을 닦을 수 있는 시설, 강습 등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는 만큼 혹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연습을 게을리 하거나 실력이 떨어지면 경력과 관계없이 가차 없다. 주역이었다 해도 조역으로 떨어지거나 내몰린다. 그 역시 녹록지 않은 과정을 겪었다. 그 결과 디즈니 뮤지컬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 역(68회), ‘캣츠’에서 아스파라거스, 크롤타이거, 바스토바존스 역(908회)과 럼텀터커(365회), 스킴블셩스 역(317) 등 주역으로 무대에 오르며 두각을 나타냈다. ‘라이온 킹’을 연기한 것은 이번 한국공연이 처음이다. 지난 9월말 일본에서 열린 ‘라이온 킹’ 시연회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의 고국 무대에 서게 된다는 감격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한 달여는 설레는 감정만큼 슬프고 고통스러운 감정도 교차한 시기였다. 무엇보다 그에 대한 일부 한국 언론의 혹평이 그를 아프게 했다. 연기에 일본색이 느껴지고 한국어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는 “어쩌면 한국 무대에 설 수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토로했다.

그럴수록 더 쉼없이 연습했다. 한국에 와서도 하루 1시간 이상씩 혼자 대사연습을 했다. 호텔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하는 일도 TV를 켜고 발음을 따라하는 것이다. 현재 그의 대사처리는 더 이상 흠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매끄럽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학교를 졸업한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장차 한국에서 활약하고 싶은 바람을 가지고 있는 그는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 연기를 가르쳐준 북한의 선생님과 친구, 그리고 남한의 배우들이 한 공간에서 한데 어우러져 예술활동을 하게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최근 국적을 바꾼 이유를 물었다. 그는 “지난 6월 생애 처음 조부모님 묘에 큰 절을 할 때,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무엇인가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조부모님이 불러준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며 “고민이 많았지만 잘한 결정으로 믿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두 개의 국가로 나뉘어져 있고 나라 이름도 두 개이지만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북한 국적이냐 남한 국적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만 저는 우리 민족의 나라, 우리 국민, 우리 배우를 위해 노력할 거예요. 그것은 제가 ‘라이온 킹’의 주역으로 무대에 오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에요. 제가 무대에 설 수 없다면 무대 뒤에서라도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는 매일 일본에 있는 아내의 휴대전화에 “오늘도 감사와 파이팅”이라는 문자를 보낸다. 누구보다 소박하고 겸손하며 진솔한 그의 속내다.

<글/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사진/김세구 기자 k39@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