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L에서 힘겹게 생존기를 쓴 지 벌써 3년. 올해 사우샘프턴은 그야말로 팬들을 깜짝 놀래키고 있다. 현재 11경기를 치러 8승1무2패를 기록, 선두 첼시에 이어 2위를 달리고 있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뛰고 있어 ‘꿈의 무대’로 불리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에서는 지난 10년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맨체스터 시티, 첼시 등 강팀들만 우승컵을 독차지했다. 그런데 올해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사우샘프턴이 약체의 반란을 일으키면서 첼시에 이어 당당히 2위를 달리고 있다. 맨시티와 맨유, 리버풀 등 전통의 강자들이 부진한 터여서 사우샘프턴의 선전은 더욱 돋보인다. 사우샘프턴의 반란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 선두 첼시까지 삼킬 수 있을 것인지, 지금 사우샘프턴은 EPL에서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강등 후보에서 현재 순위 2위 질주
사우샘프턴은 영국 남부 햄프셔주에 있는 인구 25만여명의 작은 소도시 사우샘프턴시를 연고지로 1885년 창단된 팀이다. 창단 당시 클럽의 모태가 교회 축구팀이라 별명도 세인츠(Saints·성인들)로 불렸다. 1992년 출범한 EPL의 창립멤버이지만 2004~2005시즌 꼴찌로 2부리그인 챔피언십으로 강등되면서 고난의 길을 걸었다. 심지어 2008~2009시즌에는 2부리그에서 23위로 추락해 아예 3부리그(리그1)까지 떨어지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2010년 9월 나이젤 앳킨스 감독을 영입하면서 2011년 챔피언십으로 승격했고, 이듬해 챔피언십에서도 준우승을 거둬 3년 만에 EPL로 돌아오는 기적 같은 반전을 이뤘다.

EPL에서 힘겹게 생존기를 쓴 지 벌써 3년. 올해 사우샘프턴은 그야말로 팬들을 깜짝 놀래키고 있다. 리버풀과의 개막전서 1-2 패배로 익숙한 시작을 알렸지만, 3R인 웨스트햄전(3-1승)부터 무려 4연승을 내달리며 신바람을 냈다. 지난 11월 9일 세인트 메리즈 스타디움에서 열린 레스터 시티와의 홈경기에선 2-0으로 승리해 선두 첼시에 이은 2위로 자리매김했다. 11경기를 치러 8승1무2패를 기록했다.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 올해 안에 맨체스터 시티(11월 30일), 아스널(12월 4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12월 9일), 첼시(12월 28일) 등 쟁쟁한 팀과 경기가 남았다. 빅클럽 상대 전적에 따라 최종 성적이 결정되기에 섣부른 예상은 힘들지만 그 어느 때보다 힘찬 출발인 것은 분명하다.

사실 사우샘프턴의 질주를 예상한 이는 드물었다. 올여름 이적시장에서 주축 선수들이 대부분 팔려나갔기 때문이다. 카타리나 리베르 구단주는 루크 쇼(맨유), 칼럼 챔버스(아스널), 아담 랄라나, 리키 램버트, 데얀 로브렌(이상 리버풀) 등 팀의 주축을 이루던 12명을 9500만 파운드(약 1643억원)에 팔아치웠으니 ‘공중분해’라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이를 말리던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감독(현 토트넘 감독)도 경질됐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시즌 프리뷰에서 “사우샘프턴은 강등을 걱정해야 할 판”이라고 예상했을 정도다. 실제로 포체티노 감독 대신 부임한 로날드 쿠만 감독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에 텅 빈 훈련장 사진과 함께 “훈련 준비 끝!”이라고 올려 허탈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랬던 사우샘프턴이 우승후보로까지 거론되고 있으니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다. 사우샘프턴의 상승세 비결은 선수들의 뜨거운 열정과 탄탄한 조직력에 있다. 상투적인 표현이 아니다. 사우샘프턴의 열정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지난 9월 23일 아스널과의 컵대회 경기(1-0 승)가 끝난 뒤 쿠만 감독이 주말 퀸스파크레인저스전을 대비해 다음날 선수단 휴가를 결정했다. 그런데 주장인 조세 폰테가 감독실로 찾아와 “내일도 훈련하고 싶다”는 선수들의 뜻을 전했다. 쿠만 감독은 “나도 아내와 약속이 있다”고 반대했지만 “휴가도 좋지만 우리 머릿속은 오직 주말 퀸스파크레인저스전으로 가득찼다”는 선수들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사우샘프턴은 이 경기에서 2-1로 이겼다. 휴가도 반납하고 훈련하는 선수들이 이번 시즌 EPL 최소 실점(5골)을 자랑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쿠만 감독은 최근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사우샘프턴이 지금처럼 잘한 적이 없다”며 “4위 이내 성적으로 리그를 마친다면 환상적일 것이다. 우리는 한 경기 한 경기에 최선을 다해 승점을 쌓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몰 마켓의 성공 모델 될 수 있을까
사우샘프턴이 열정만 갖고 성공한 것은 아니다. 빅클럽처럼 큰 돈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알짜배기 선수만 데려오는 혜안이 또 다른 비결이었다. 사우샘프턴은 올여름 네덜란드에서 뛰던 두산 타디치(트벤테·이적료 190억원)와 그라치아노 펠레(페예노르트·138억원)를 데려왔는데, 이 선수들이 데뷔하자마자 맹활약을 펼치면서 큰 효과를 봤다. 특히 세르비아 국가대표인 타디치는 사우샘프턴의 전술 핵심으로 손꼽히는 선수다. 간결한 볼 처리와 예리한 공간 패스, 날카로운 킥까지 모두 갖춰 팀 공격을 이끈다. 전 사우샘프턴 수비수 고드 왓슨이 “(리버풀로 보낸) 랄라나보다 타디치가 더 뛰어나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다. 타디치의 활약상은 기록에서도 잘 드러난다. 타디치는 이번 시즌 EPL에서만 도움 7개, 경기당 크로스 8.44개, 경기당 키패스 2.8개를 기록했다. 모두 EPL 최상급의 활약이다. 실제로 EA스포츠 프리미어리그 순위에서 미드필더 부분 1위는 거액의 몸값을 받고 입단한 앙헬 디 마리아(맨유·1013억원)도 세스크 파브레가스(첼시·453억원)도 아닌 타디치다. 전 포지션 순위표에서도 그는 세 번째 높은 순위에 올라 있다. 선수를 보는 정확한 눈만 있다면 부자 구단이 아니더라도 성공의 길을 열 수 있다는 의미다.

<황민국 경향신문 스포츠부 기자 stylelo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