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연구결과에서 나타나…
대사질환과 심혈관계 질환의 요인 될 수도
전날 잠을 충분히 못 자서 그런가 유난히 출출하다. 마음속에서는 ‘이러면 안돼’라는 소리가 들리지만 야식을 배달시켜 먹고 후식으로 냉장고에 있던 아이스크림까지 밥숟가락으로 실컷 먹었다. 이 시점에 와서야 ‘아차’ 싶다. 배가 부르니 이대로 잠들고 싶지만 그냥 잠들면 속이 부대껴 푹 잠들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배가 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려니 수면시간이 절대적으로 모자랄 것이 걱정된다. 직장인 이모씨(30)의 이런 고민은 누구나 겪어봤을 만한 일이다. 그럼 이 문제의 진짜 주범은 누구일까.
지난해 2월 미국 시카고대 의대 내분비·당뇨·대사 연구실의 에린 핸론 박사와 연구진은 범인을 추적할 실마리가 될 만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실험에서 참가자들은 4일간은 매일 8시간30분씩 침대에 누울 수 있었고, 다른 4일간은 4시간30분씩만 침대에 있는 것이 허용됐다. 자연히 침대에 머무르는 시간을 짧게 제한 받았을 때 수면시간도 짧아졌다. 그 결과 짧아진 수면시간에 반비례해 늘어난 것은 음식 섭취량이었다.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잠이 모자랄 때 식욕을 채우는 보상작용과 관련된 신경전달물질 2-AG의 혈중 수치도 높아진 사실을 확인했다. “잠이 모자라면 몸에서 배고픔을 불러일으키는 활동이 이뤄지고, 그에 따라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식탐을 즐기게 되는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 위험도 커진다”는 것이 핸론 박사의 설명이었다. 늘 가시지 않는 허기와 식탐의 주범이 수면부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잠이 부족하면 보상심리로 식탐 커져
사실 잠이 모자라면 비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는 이미 상당히 나와 있다. 이 점에서 최근 발표된 질병관리본부의 국민건강영양조사(2016년) 결과는 의미심장하다. 남성 비만율이 42.3%로 처음으로 40%대로 올라서며 성인 비만유병률은 34.8%로 전년(33.2%)보다 상승했다. 비만 이외의 만성질환 중 특히 수면부족과 관련이 있는 고혈압과 고콜레스테롤혈증 등의 유병률도 증가했다. 30세 이상 고혈압 유병률은 29.1%로 최근 10년간 최고치를 기록했다. 고콜레스테롤혈증과 당뇨병 유병률도 19.9%와 11.3%로 각각 전년보다 2.0%포인트, 1.3%포인트 높아졌다.
비만을 비롯한 이들 대사질환과 심혈관계 질환은 수면 외에도 식생활과 신체활동 같은 다른 요인에도 큰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수면부채가 부르는 장기적 폐해와의 관련성을 부정하기도 쉽지 않다. 국민건강영양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박상민 서울대 의대 교수팀이 수면시간과 비만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 수면시간이 짧은 집단일수록 체지방이 높아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수면시간과 고혈압 유병률의 관련성을 연구한 박은옥 제주대 간호대학 교수도 “지난 수십 년간 수면시간은 점점 짧아졌고, 같은 기간 고혈압 유병률은 점점 증가했다”며 “연구 결과 그간 고혈압 관련 요인으로 덜 주목 받았던 수면시간이 유의한 변수로 나타난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이미 쌓인 수면부채가 더 많은 수면부채를 부르는 악순환이 나타날 소지가 있다는 데 있다. 수면이 부족할수록 만족감을 느끼는 데 관련된 세로토닌 호르몬의 혈중 수치가 낮아지고, 이는 다시 폭식 등 비만을 부르는 습관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폭식으로 일시적으로 높아진 세로토닌 수치는 그만큼 빨리 떨어져 다시 만성적인 스트레스에 취약한 상황을 만드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비만인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비율이 높다고 알려진 대표적인 수면장애 증상인 수면무호흡증도 위험성이 높다. 비만이 아니더라도 이미 수면부채가 상당히 쌓여 수면무호흡증 같은 수면장애로 나타나면 빠른 조치가 필요하다. 코를 심하게 골다 갑자기 호흡을 멈추는 무호흡증이 일어나면 아무리 오랜 시간 자고 일어나도 피곤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수면부채의 누적으로 스트레스에 대응하는 코르티솔 호르몬이 증가해 심장박동수가 평소보다 빨라지고, 혈압도 높아진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이런 수면장애 때문에 수명까지 짧아지게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지난해 고려대병원 연구팀이 수면장애 환자 381명의 염색체를 분석한 결과, 체내의 노화시계로 불리며 남은 수명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진 염색체의 끝 부분 ‘텔로미어’가 짧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수면부채의 위험성을 알게 되더라도 문제는 남아있다. 당장 대처할 방법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수면시간이 짧아진 현실은 개인적인 습관 탓도 있지만 충분한 수면시간을 보장하기 힘든 구조적인 문제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해 수면부채 개념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는 미국 스탠퍼드대 수면생체리듬연구소(SCN)의 니시노 세이지 소장은 저서 <스탠퍼드식 최고의 수면법>에서 짧은 수면시간밖에 주어지지 않더라도 최대한 수면부채를 발생시키지 않는 방법들을 소개했다. 니시노 소장과 SCN의 연구 결과 잠이 필요하게 만드는 피로와 스트레스 등의 ‘수면 압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해소하는 시간대는 잠든 직후 90분 동안이다. 그러므로 이 시간대에 최대한 중점적으로 양질의 잠을 잘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요지다.
수면부채 인지해도 대처 쉽지 않아
초기 90분 동안의 수면을 ‘꿀잠’으로 이끌 수 있으려면 체온을 조절하고 뇌를 자극하는 활동을 줄이는 방법이 필요하다. 체온조절은 수면에 들어간 신체는 안쪽 깊은 곳의 심부 온도와 피부 표면 온도의 온도차가 가장 줄어든다는 점에 주목해, 취침 90분 전 따뜻한 물로 목욕이나 족욕을 한 뒤 차츰 수면상태의 체온상태와 가까워지게 유지하는 방법이다. 뇌를 자극하는 상황과 스트레스를 피하라는 방법도 그 자체로서는 새로울 것이 없다. 지루하게 느껴지는 책을 보거나 단조로운 숫자 세기를 반복하는 등의 상황이 잠을 부른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침대 위에서까지 스마트폰이나 TV를 보는 것은 양질의 수면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히려 스마트기기를 활용해 보다 적극적으로 수면을 유도하는 방법도 속속 나오고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인기 영상 콘텐츠 공급업체인 ‘넷플릭스’를 본뜬 ‘냅플릭스(Napflix)’ 서비스를 들 수 있다.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 있는 영상들 중에서 지루함을 극대화시킨 영상만 따로 모아놓은 곳이다. 아무리 해도 손에서 스마트폰을 떼어놓을 수 없어 불면과 수면부채로 이어지는 사람들에게는 ‘이열치열’ 격인 방법이다. 해당 사이트에 들어가면 고전적인 잠들기 방법인 ‘양 세기’ 영상을 포함해, 매우 천천히 진행되는 일본의 다도 영상 등 얼핏 봐도 지루하게 보이는 영상들로 가득 차 있다. 니시노 소장도 “문제라고 지적되는 스마트폰의 청색 계열 불빛이 그 자체로 불면을 부르기보다는 스마트폰 콘텐츠가 지속적으로 뇌를 자극한다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견 효과를 기대할 법하다.
수면부채가 더욱 심각해져 수면장애 수준까지 이르렀다면 하루 빨리 병원에서 전문적인 진료를 받는 것이 급선무다. 수면장애를 유발하는 원인은 불규칙한 근무시간과 생활습관 같은 외부적 요인에서 극심한 스트레스와 과로, 불안 등 심리적인 요인까지 다양하기 때문에 원인을 먼저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특히 전문가들은 정확한 진단 없이 수면제를 복용하거나 임의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이향운 이대목동병원 수면센터장은 “수면장애는 내과·신경과 질환과 관련되어 치매나 뇌졸중 같은 합병증을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에 신경과, 정신건강의학과, 이비인후과, 내과 등 관련 진료과의 통합적인 진료와 치료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