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메르스 징비록’ 서울시, 판도라 상자 열다

2015.07.21

박원순 시장 포함 각계 핵심관계자 20명 심층 인터뷰… 서울시 홈피에 공개

“제가 별로 화를 안 내는 사람인데, 그날 3일째인가 화를 냈습니다. 정부가 보내온 역학조사서를 보면 한 페이지짜리에 동선이 별로 없어요. 도대체 이 사람이 이 병원 갈 때 뭘 타고 갔는지를 조사했느냐, 그래서 오늘 밤 중으로 이거 조사 다해라, 제가 막 이렇게 했으니까. 그리고 제가 집에 안 간다고 했어요. 앞으로 이게 완전히 종식될 때까지 여기에서 침대 놓고 자겠다고 했더니….” 박원순 서울시장이 밝힌 6월 4일 심야 기자회견의 ‘내막’이다.

<주간경향>은 박 시장의 심야 기자회견이 어떻게 결정됐는지, 질병관리본부나 보건복지부 등 관련 정부 부처가 있는데도 서울시가 정보공개에 나서게 된 까닭은 무엇인지, 막전막후를 취재해 보도한 바 있다.(1131호 관련 보도 참조)

“동선 없는 1쪽짜리” 정부 역학보고서
박 시장이 직접 육성으로 밝힌 막후 사정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또 다른 ‘민감한 정보’를 담고 있다. 동선(動線)이 게재돼 있지 않은 한 페이지짜리 정부 역학조사서. 얼핏 ‘술은 먹고 운전했지만, 음주운전하지 않았다’와 같은 역설처럼 들린다. “지자체가 병원에 대해 통제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며 “(삼성서울병원과 관련해) 심지어는 유사시인데도 자료를 주지 않았고, 가서 조사할 수 있는 권한도 있어야 한다”는 언급도 앞으로 메르스 확산의 원인 규명 과정에서 논란이 될 만한 대목이다.

박 시장의 인터뷰는 서울시 홈페이지에 PDF 포맷으로 공개돼 있다. 박 시장을 포함해 이번 메르스 사태와 관련된 각계 인사 20명의 심층 인터뷰 중 하나다. 이번에 공개된 인터뷰에는 ‘메르스 징비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6월 4일 밤 서울시청 브리핑룸에서 메르스 관련 긴급 브리핑을 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박원순 서울시장이 6월 4일 밤 서울시청 브리핑룸에서 메르스 관련 긴급 브리핑을 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징비록(懲毖錄). 서애 류성룡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기술한 임진왜란 7년의 기록이다. <시경>의 ‘미리 징계해 후환을 경계함(豫其懲而毖後患)’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으로, 한자사전을 보면 징(懲)은 징계하다, 벌주다라는 뜻이고, 비(毖)는 삼가다, 경계하다는 뜻이다. 누구를 징계하고 무엇을 경계한다는 뜻일까.

메르스 사태에 관여한 사람들이 남기는 기록에 징비록을 붙인 것은 복수의 서울시 관계자들의 말에 따르면 박 시장 아이디어다.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TV사극에서 착상한 것으로 보인다. 앞의 인터뷰에서도 관련 언급이 있다. 박 시장은 “요새 징비록이 유행이잖아요. 징비록을 서애 류성룡이 쓴 이유도 다음에 이런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인데…(중략)…징비록을 쓰는 심정으로 해주세요”라고 ‘사회자’에게 당부한다. 사회자라고 돼 있지만 맥락상 인터뷰어다.

다른 핵심 관여자의 인터뷰에서도 이번 사태에 대한 서울시 대응의 자세한 뒷사정이 드러난다.

“…5월 말부터 6월 초로 넘어가면서 언론들이 어떤 반응들이 있었냐 하면 서서히 강남부터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게 뭔가 정부가 환자를 감추고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 발표된 환자 말고 환자가 더 있다더라, 어디 병원에 있다더라 이런 이야기까지 소문이 막 돌기 시작했다. 그것에 대해 진위를 파악해보려고 기자들이 덤벼들었고, 그 다음으로 저희들(서울시)도 그때 정부가 제대로 정보를 안 주니까 나중에 정보를 받고 조금씩 질문을 던지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감을 그때부터 갖고 있었다.”(김창보 서울시 보건기획관)

“기존 (삼성서울)병원 내용이 외부에 나오지 않을 때도 개인적으로 가까운 분들이 있어 삼성서울병원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메르스 사태를 심각하게 봤다…(중략)…개인적으로 조금 혼란에 빠졌던 것이 보건당국이 발표 수위를 조절하는 것인지, 무엇을 감추려고 하는 것인지 의심을 품게 됐다. 그래서 더더욱 정보를 얻기 위해서 뛰어다녔다. 그리고 메르스 환자를 담당하고 있던 국립중앙의료원장과 몇 번의 전화통화로 정보를 교환하다가 직접 찾아가 원장님하고 면담도 해봤다. 그런데 그분도 정보를 잘 못접하고 있었다. 국가의 중추병원을 맡고 계시고 메르스 사태에 중앙병원이 돼야 할 국립중앙의료원 원장님조차도 내용을 잘 모르는 것에 놀랐다.”(김민기 서울의료원 원장)

서울시가 7월 6일 공개한 메르스 전문가 및 현장 관계자 20여명의 심층 인터뷰 일명 ‘메르스 징비록’ 파일. 서울시 인터넷 홈페이지(http://health.seoul.go.kr/archives/46912)에서 전문을 다운로드해 읽을 수 있다.

서울시가 7월 6일 공개한 메르스 전문가 및 현장 관계자 20여명의 심층 인터뷰 일명 ‘메르스 징비록’ 파일. 서울시 인터넷 홈페이지(http://health.seoul.go.kr/archives/46912)에서 전문을 다운로드해 읽을 수 있다.

“국립중앙의료원 원장도 내용 몰랐다”
아직 메르스 사태는 끝나지 않았다. 인터뷰이들의 언급 역시 아직 검증된 주장은 아니다. 메르스 사태의 원인과 확산과정, 그 과정에서 컨트롤타워의 부재나 제도적 결함 등의 주장은 향후 서울시뿐만 아니라 관여된 중앙정부나 민간병원 핵심 관계자들에 대한 교차검증을 통해 확인돼야 한다. 인터뷰어의 질문들을 보면 몇 가지 반복되는 질문형식이 있다. 먼저 이번 메르스 사태에서 인터뷰이들이 맡았던 역할에 대한 질문에 이어 보건당국(정부)의 초기대응이 적절했는지, 메르스가 전국 범위로 확산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비교적 초기대응에 성공한 2003년 사스 사태와 비교해 왜 이번에는 실패했는지, 컨트롤타워는 행정가와 전문가 중 어느 쪽이 맡는 게 옳은지, 병원 명단이나 환자 신상 공개는 신속히 이뤄지는 게 바람직했는지, 특히 6월 4일 서울시가 심야 기자회견을 통해 병원을 공개해 감염 의심환자의 동선을 공개한 것이 적절했는지 등을 물었다. 자유토론 형식의 인터뷰이지만 사전에 설계된 질문지로 보인다. 인터뷰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서울시의 조치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신상도 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선제적인 방역이 필요했는데 그것을 못한 것은 서울시도 마찬가지”라며 “서울시도 확진자가 어디를 돌아다녔느냐만 입증하는 데 주력했다”고 인터뷰에서 말한다. 신 교수는 “앰뷸런스 이송을 담당하는 이송요원을 (방역대상에서) 빠뜨린 것은 삼성서울병원뿐 아니라 중앙대책본부나 서울시 대책본부도 몰랐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며 “확진된 사람만 쫓아다닐 것이 아니라, 응급실의 흐름을 먼저 장악하고 환자를 차단했어야 했다”고 언급했다.

신 교수가 언급한 ‘구체성이 떨어지는 지침’은 지금도 수정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일부 병원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방호복을 입고 근무시간 내내 그 선별진료소에서 대기하면서 환자를 보라고 했다. 그런데 보호복은 한 번 입고 환자를 진료하고 나면 벗어야 한다. ㄱ이라는 의사가 앞 환자 진료를 하면서 그것을 입고 다시 진료하면 ㄱ이라는 의사가 진료하는 사람은 다 감염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병원 의사들도 해당 분야를 공부한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른다. 그래서 지침은 항상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내려져야 한다.”

환자 신상공개에 대해서는 특히 의료계 인사들이 비판적인 인식을 드러낸다. 특히 이재명 성남시장이 일부 확진자 아파트까지 공개한 것과 관련해서는 찬성보다는 전반적으로 비판 쪽으로 평가가 기울어 있다. 메르스 사태가 나기 전까지 서울시의 주무부서인 생활보건과 감염병관리팀을 통틀어 역학조사관이 1명뿐었다는 사실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메르스 사태와 관련해 정부 컨트롤타워가 부재했다는 데 전문가들은 인식을 같이하면서도 그렇다면 누가 컨트롤타워를 맡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랐다. 대체로 의료계 쪽은 (감염병 전문) 의료계 인사가 컨트롤타워를 맡아야 한다는 입장이 우세한 반면, 행정 쪽 전문가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는 입장도 일부 제기됐다. 특히 위기관리와 소통전문가의 부재를 지적하는 경우가 많았다. (ㄱ○○ ○○대 예방의학 교수. ○○ 표기는 서울시에서 한 것) 삼성서울병원 의사이자 확진자였던 ‘35번 환자’ 동선 공개에 대해서도 의견은 엇갈렸다. 반면, “늑장대응보다는 과잉대응이 낫다”는 박 시장의 발언은 대부분의 인터뷰 참가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6월 4일 박 시장의 심야 기자회견이 서울시를 포함해 정부와 지자체의 메르스 대응에 전환점이 됐다는 것도 대부분 동의했다.

‘메르스 징비록’은 박 시장 아이디어
이번에 공개된 ‘메르스 징비록’을 보다 보면 인터뷰는 애초에 서울시가 추진하던 ‘서울시 메르스 백서’에 포함되는 내용이라고 인터뷰어들이 사전에 공지하는 대목이 나온다. 다시 말해, 지금과 같은 형태의 전면공개는 처음부터 기획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공개 결정은 누구의 아이디어였을까.

공개된 메르스 징비록 전체는 415페이지다. 단행권 한 권 분량이다. 인터뷰는 윈지코리아 컨설팅이라는 회사에서 서울시의 용역을 받아 진행했다. 윈지코리아의 이근형 대표는 참여정부 여론조사비서관, 국민의정부 대통령비서실 행정관을 역임한 인사다. ‘메르스 징비록’은 서울시 외곽의 박 시장 캠프에서 기획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100% 박 시장의 아이디어다. 가감없이 사초를 만든다는 생각에서 외부 업체에 용역을 줬고, 다만 인터뷰 당사자에게는 정리된 내용을 피드백을 줘서 다듬는 기회를 갖도록 했다. 6월 4일 기자회견에서도 밝힌 것처럼 투명하게 정보를 공개하는 것이 최선의 대책이라는 것이 박 시장의 생각이다. (‘메르스 징비록’을 만들어 공개하는 것에 대해) ‘논란만 있을 수 있다’는 내부 의견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현장의 목소리를 가감없이 기록해 차후를 대비해 남기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더 나아가 서울시의 결정이나 대책 추진에 우호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만 들을 것이 아니라 서울시 입장과 다르더라도 현장에 나섰던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최대한 포함시키자는 내용으로 정리돼 추진됐다.” 황보연 서울시 시민소통기획관(국장)의 말이다. 접촉한 현장전문가들 모두가 인터뷰를 한 것은 아니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인터뷰를 고사한 전문가도 없지 않다. 20인 심층 인터뷰와 별개로 ‘서울시 메르스 백서’ 역시 제작될 예정이다. 황 기획관은 “‘메르스 징비록은 백서의 별책부록 형태로 나오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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